*안지: <메르켈의 애칭>
[토요판] 뉴스분석 왜? 독일 총선과 메르켈
▶ ‘메르켈이 대처를 넘어섰다.’ 3선 연임에 성공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 대한 국내 언론들의 장밋빛 평가였습니다. 그러나 메르켈의 승리가 독일 정치의 후퇴와 연관된다는 분석이 독일 현지에서도 나옵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독일유럽연구센터 대외협력위원장인 김누리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가 지난 13일부터 23일까지 독일학술교류처의 초청을 받아 독일 선거 현장을 직접 둘러본 뒤 ‘메르켈의 승리’ 이면을 전해왔습니다.
9월22일 치러진 독일 총선은 기독민주당(CDU·기민당)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기민당은 총 41.5%를 얻어 25.7%를 득표하는 데 그친 사회민주당(SPD·사민당)을 제치고 제1당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연방의회 의석수에서도 총 630석 중 311석을 차지하여 단독 과반에 불과 5석이 모자라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독일 통일 직후 치러진 1990년 선거 이후 기민당이 거둔 가장 압도적인 승리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기민당의 승리가 아니라 ‘안지’(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애칭)의 승리로 보는 게 정확하다. 거리의 포스터에서도, 선거홍보물에서도, 선거유세장에서도, 선거방송에서도, 보이고 들리는 것은 기민당이 아니라 온통 안지뿐이었다.
아데나워도 인기를 선거에 활용하진 않았다
독일 유권자들은 기민당이 앞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독일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독일 거리의 대형 포스터에는 모나리자 같은 잔잔한 미소를 짓는 안지의 커다란 얼굴사진과 그 옆의 ‘독일을 위한 총리’라는 글귀가 전부였다. 기민당의 유세장에서조차 선거공약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안지”라고 쓰인 푯말과 그 뒷면에 쓰인 ‘함께 성공하자’라는 구호가 유일했다. 24쪽짜리 기민당 공식 선거공보물에도 오직 안지 일색이었다. 안지의 사진이 무려 22장이나 실려 있고, 오직 2쪽에만 “기민당을 뽑아야 할 10가지 이유”라는 공약이 어색하게 담겨 있었다. 사진 설명에서 유일하게 언급되는 인물 또한 안지의 남편 한 사람뿐이었다.
이렇게 이번 선거는 독일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인물 선거’였다. 정책보다는 인물을 선택하는 선거였고, 후보의 인기가 승패를 가른 선거였다.
1948년부터 1963년까지 총리를 지냈고,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조차 자신의 개인적 인기를 이렇게 선거전에 활용하지는 않았다. 독일에서는 후보자의 인기가 선거의 승리를 보장하는 보증수표가 아니었다.
1980년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최악의 비호감으로 여겨지던 기독사회당(CSU·기사당)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에게 제1당을 내준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당시 슈미트의 지지도는 70%, 슈트라우스의 지지도는 20%였다. 16년을 집권한 독일 최장수 총리 헬무트 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정당보다 지지도가 낮았으나 선거에서는 연승했다. 콜은 독일 통일의 해에 치러진 1990년 선거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출마한 선거에서 모두 이겼다.
24쪽짜리 기민당 선거공보물에는 메르켈 사진이 22장이나 실렸고
공약은 2쪽에 불과했다
독일에서 유례없는 인물 선거로
총선은 반선거·반정치가 됐다 ‘정치적 아버지’ 콜 총리 비판,
기민당 총재 선출된 뒤 승승장구
몸에 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소탈하고 합리적인 생활태도는
‘신비로운 인기’ 원천이 됐다 ‘안지의 승리’는 세상이 변했음을 보여준다. 매체 환경이 변했고, 정당간의 정책 차이가 희미해짐에 따라 후보자의 이미지가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이다. 그녀는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공유하는 기본 정서에 부응하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기민당은 안지를 비장의 무기로 삼았지만, 정작 안지는 철저히 소극적인 선거전을 펼쳤다. ‘어떠한 변화도 시도하지 않겠다’는 것이 안지가 유권자에게 보낸 유일한 메시지였다. 그것은 점수를 많이 따놓은 ‘아웃복서’의 태도 같았다. ‘실수만 하지 말자.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말자. 점수를 더 따려고 무리하지 말자’는 것이 안지의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성공했다. 그것은 기실 1957년 아데나워가 전후 독일 역사상 최고의 압승을 거둔 선거전략의 재판이었다. 당시 아데나워의 선거구호는 ‘실험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정당보다는 인물을 앞세우고, 적극적 행위보다는 소극적 방어에 중점을 둠으로써 정치와 선거의 본래 의미가 크게 훼손되었다. 선거가 정당과 정책을 선택하는 민주적 절차라면 이번 독일 선거는 ‘반선거’(Antiwahl)였다. 정치가 사회적 쟁점을 부각시키고 해결하려는 시도라면 이것은 분명 ‘반정치’(Antipolitik)였다. 후보가 정당을 대신하고 인물이 정책을 대체함에 따라 독일 정치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 같다. 독일 매체 <쥐트도이체 자이퉁>의 표현대로 이제 “메르켈 정부의 시대는 저물고, 메르켈주의(Merkelismus)의 시대, 즉 권력을 느낄 수 없는 권력정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통일 뒤 첫 총선에서 연방의회에 진출 그렇다면 메르켈주의를 구현하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은 어떤 인물이며, 그의 국민적 인기는 어디서 연유하는가. 그녀의 이력부터 살펴보자. 앙겔라 메르켈은 1954년 7월17일 함부르크(독일 북부의 항구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는 신학을 공부한 목사였고, 어머니 헤를린트 카스너는 영어와 라틴어 교사였다. 앙겔라가 태어난 몇 주 뒤 가족은 함부르크를 떠나 당시 동독 지역이던 브란덴부르크주의 크비트초로, 다시 1957년에는 템플린으로 이사한다. 그곳 교구에 아버지가 목사직을 얻었기 때문이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까지 서독 국민이 동독으로 넘어가는 일은 왕왕 있었다. 학창시절 앙겔라는 그다지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학교생활에 잘 적응한 모범생이었다. 1973년에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같은 해에 라이프치히대학에 입학해 물리학을 공부했다. 원래는 러시아어와 물리학을 전공하여 교사가 되고자 했지만, 목사의 자식은 교사 자격을 얻기가 힘들었던 터라 물리학을 전공하게 된 것이다. 대학 시절 앙겔라는 정치적인 활동을 한 적이 없었지만,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작가 라이너 쿤체를 만났고 그의 애독자가 되었다. 석사 과정을 마친 앙겔라는 베를린 학술원 물리화학연구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1986년 그곳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4년 화학자 요아힘 자우어를 만나 1998년 결혼했다. 통일 이전까지 메르켈은 정치 활동을 해본 적이 없다. 어떤 정당과 재야 시민단체나 기독교단체에서도 활동한 적이 없다. 메르켈 전기를 쓴 게르트 랑구트에 따르면 메르켈 주위의 친구들과 지인들은 메르켈이 기민당 정치인이 된 것에 매우 놀랐다고 한다. 그녀는 녹색당 성향이었다는 것이다. 1989년 통일 정국에서 메르켈은 ‘민주변혁’(Demokratischer Aufbruch)이라는 정치단체의 회원이 되었는데, 이 단체는 1990년 기민당과 통합되었다. 1990년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기민당이 승리하자, 메르켈은 기민당 정부의 부대변인이 된다. 1990년 통일 이후 치러진 첫 독일 총선에서 메르켈은 독일 동북부 지역인 ‘뤼겐, 슈트랄준트, 그리멘 지역구’에서 처음으로 당선되어 연방의회에 진출한다. 연방의회 의원이 된 다음해인 1991년 1월18일 메르켈은 콜 정부의 여성청소년 장관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1994년에는 다시 환경부 장관에 오른다. 2000년 기민당 최초의 동독 출신 여성 총재가 된다. 2005년 총선에서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를 누르고 승리함으로써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에 오른다. 그 후 이번 총선까지 두 번의 총선에서 내리 승리함으로써 3번째 연임하는 여성 총리가 된다. 통일 이후 시작된 메르켈의 정치 역정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헬무트 콜 총리와의 관계이다. 메르켈은 콜 총리에 의해 두 차례에 걸쳐 장관으로 임명되어 ‘콜의 양녀’라는 별칭까지 얻었으나, 1999년 자신의 정치적 대부였던 콜이 불법 정치자금을 모은 사실이 드러나자 그를 비판하면서 “헬무트 콜 시대를 끝내고 미래로 가자”는 취지의 글을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기고한다. 이 사건 이후 메르켈은 대중들에게 “용기있는 믿음의 지도자”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2000년 기민당 전당대회에서 96%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총재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그녀의 ‘신비로운 인기’의 원천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목사의 딸로서 몸에 밴 ‘프로테스탄트 윤리’이다. 둘째는 동독에서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습득된 평등의식, 셋째는 자연과학자로서 훈련된 과학적·합리적 정신이다. 헬무트 콜에 대한 용기있는 비판이 엄격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일반 대중의 사랑을 받게 한 메르켈의 소탈하고 범용한 생활태도는 평등의식의 자연스러운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정치지도자로서 위기의 순간에 그녀가 보인 신중함과 침착함은 자연과학자의 냉정하고 합리적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영리한 그녀는 4선에 도전하지 않을 것” 앙겔라 메르켈의 대승으로 끝난 이번 총선에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점을 특히 눈여겨보아야 한다. 첫째는 이번 메르켈의 승리가 곧 우파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우선 이번 선거 결과 독일 의회는 하나의 우파 정당과 세 개의 좌파정당(사민당·좌파당·녹색당)으로 구성되게 되었고, 의석수 또한 311석 대 319석으로 좌파 정당이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또한 메르켈 대승의 요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메르켈이 기민당을 좌클릭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메르켈은 사민당의 사회적 의제, 녹색당의 생태적 의제를 과감하게 흡수함으로써 전통적인 기민당의 영역을 넘어 당세를 확장했다. 둘째는 자민당의 충격적인 몰락이다.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은 4.8%를 득표하는 데 그쳐, 5%를 득표하지 못한 정당은 의회에 진출할 수 없다는 이른바 ‘5% 조항’에 따라 의회 진출에 실패했다. 이는 전후 독일 정치사에서 처음 발생한 대사건으로 메르켈의 압승 못지않게 주목을 요하는 대목이다. 자유시장경제를 기치로 감세, 규제 완화,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앞장서 주장해온 자민당의 완전한 몰락은 지금도 자유시장경제와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세력이 의회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을 돌아볼 때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셋째는 극우정당의 괴멸이다. 이번 선거에서 독일의 극우정당인 독일민족당(NPD)은 1.3%를 얻는 데 그쳐 의회 진출은 물론 존립마저도 위태롭게 되었다. 이는 프랑스, 폴란드, 헝가리 등에서 극우정당이 세를 확장해가는 유럽의 정치 현실과 확연히 대조되는 현상이다.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 극우정당의 지지율이 평균 10~15%에 이른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번 독일민족당의 파국적 패배는 독일 정치가 얼마나 안정적 기반을 갖추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향후 독일 정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에 대해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매우 흥미로운 전망을 내놓았다. “대승 뒤에는 반드시 위기가 뒤따르는 법이다. 1957년에 대승을 거둔 아데나워 때도 그랬다. 그는 1961년 선거에서 거의 패배할 뻔했다. 그는 시한부 총리에 머물렀다. 메르켈에게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영리하니까. 그녀는 4선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기민당은 메르켈 이외에는 뚜렷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기민당이 거둔 대승의 어두운 면이다. 머지않아 사민당에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나 현재 사민당도 한가로이 기회를 기다릴 형편이 아니다. 자민당의 연방의회 진입 실패로 기민당이 사민당한테 연정을 요청해왔지만 사민당은 사면초가의 상태다. 사민당의 바닥 정서에는 2005년 대연정에 참여함으로써 2009년 선거에서 전후 최악의 참패를 맛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렇다고 연정 제의를 무조건 거부할 입장도 아니다. 그럴 경우 기민당이 재선거를 요구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재선거가 치러지면 사민당은 이번보다도 더욱 참담한 패배를 맞을 개연성이 다분하다. 게다가 사민당은 2005년의 대연정의 경우처럼 동등한 파트너로 연정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 거둔 낮은 득표율 때문에 기민당의 ‘부속물’로서 참여하게 되는 처지이다. 쥐트도이체 차이퉁의 분석처럼 이는 가히 “페스트와 콜레라 사이에서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민당, 좌파당, 녹색당의 좌파 연정은 탄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사민당과 좌파당의 반목과 갈등의 골이 워낙 깊은데다 70%를 넘는 국민이 이른바 적-적-녹 연정이라고 불리는 좌파 3당의 연정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누리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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