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우 전 에스케이 사외이사가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국내 대기업의 지배구조 실상과 과제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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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상법 개정안과 경제민주화
▶ 정부가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상법 개정안을 내놓자, 재계는 외국 자본에 의한 경영권 위협을 내세우며 반대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재계의) 우려는 잘 알고 있다”며 수용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이는 경제민주화 공약 후퇴이고, 재계 주장은 과장·왜곡됐다고 비판한다. 과연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남대우전 에스케이 사외이사를 만났다. 남씨는 6곳에서 독립적 사외이사를 지낸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다.
정부의 상법 개정안은 감사위원인 사외이사를 분리 선출할 때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 주총에서 선임되는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해 소액주주들이 자신이 원하는 이사 후보에 표를 몰아줄 수 있도록 하는 집중투표제의 의무화를 골자로 한다. 이밖에도 주총에 참석하지 않고도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전자투표제 의무화, 자회사의 부정이 드러났을 때 모회사의 주주가 직접 자회사 이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다중대표소송 제도 도입, 감독 기능을 하는 이사회와 별도로 업무 집행만 전담하는 집행임원제의 의무화도 포함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공약이기도 한 상법 개정안은 경영 투명성을 높이고, 총수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독립적 사외이사를 최소 한명 이상 선임되도록 해서 총수의 전횡을 막자는 게 취지다. 하지만 재계는 획일적인 지배구조 강요는 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외국 자본에 의해 경영권이 위협받을 수 있다며 개정안 전체에 대해 반대한다.
남대우(75) 전 에스케이(SK) 사외이사는 대주주나 경영진과 아무런 지연·학연 없이도 6개 민간기업과 공기업에서 13년 동안이나 독립적 사외이사를 맡은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다. 특히 분식회계 사태와 외국 자본의 지배구조 개선 요구를 경험한 에스케이의 사외이사를 6년간이나 맡아, 국내 대기업의 지배구조 실상과 과제를 그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버린으로부터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돼
그가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은 2004년 초다. 당시 에스케이㈜ 주총을 앞두고 외국계 펀드인 소버린으로부터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됐다. 소버린은 한해 전인 2003년 초 분식회계 사태로 기업가치가 급락한 에스케이의 주식을 대거 사들인 뒤 투명경영과 독립된 이사회 운영 등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했다. 재계와 보수언론은 외국 투기자본이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위협한다며 공격했다. 소버린의 사외이사 후보 추천 제의를 받아들인 남씨에게는 자연스럽게 ‘배신자’라는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솔직히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어요. 사람들이 당신은 누구 편이냐고 묻더군요.” 남씨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독립된 사외이사로서 4개 기업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생각했어요. 외국 펀드의 추천을 받은 사외이사라고 해서 외국인 주주들의 이익만 대변하는 게 아니지요. 결국 에스케이를 정상화시키고 4년간 기업가치를 5배 이상 높여 전체 주주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에스케이는 소버린이 추천한 5명의 사외이사 후보 중에서 남씨만 받아들였다. 당시 함께 추천된 후보 중에는 한승수 전 국무총리, 조동성 서울대 교수 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에 세간의 관심은 더 컸다. 그가 선임된 배경에는 그 이전에 이미 4개의 기업에서 사외이사와 감사위원을 맡으며 쌓은 풍부한 경험이 작용했다. “1998년 가스공사에서 비상임이사(현 사외이사)를 처음 맡았을 때 회계감사기관을 경쟁입찰을 통해 선정할 것을 국내에서 처음 제안했어요. 회계감사기관을 경영진과 가까운 곳으로 선임하면 회계감사의 공정성을 믿을 수 있겠어요? 회사와 넉달간 씨름을 해서 결국 경쟁입찰 방식을 도입했어요.”
그는 비상임이사의 윤리강령 제정에도 앞장섰다. 당시 가스공사의 사장후보추천위원회는 비상임이사들로 구성됐는데, 남 전 사외이사는 사장 후보하고 지연·학연 등이 있는 비상임이사는 배제하는 규정을 윤리강령에 넣었다. 당시 이사회를 9차례씩이나 열며 예산심의를 깐깐하게 한 일도 있다. “산업자원부에서 찾아와 자신들이 이미 확인했으니 그냥 회사안대로 승인해달라고 합디다. 그래서 내가 ‘산자부가 무슨 권한으로 그러느냐. 비상임이사 역할이 이런 것 아니냐’고 따졌더니, 머쓱해서 돌아가더군요.”
남대우 전 SK 사외이사가 6개 민간기업과 공기업에서
13년 동안 겪은 독특한 경험은
재계의 상법 개정안 반대가
얼마나 설득력 없는지 보여준다 “총수 입맛 맞는 사람만 뽑히면
이사회가 제 역할을 못합니다
총수들 탐욕이 화를 자초하는데
사회가 계속 방치하는 책임 커요” 남 전 사외이사는 에스케이의 첫 이사회 때부터 적당히 넘어가지 않았다. “회사 쪽에서 감사실장 인사 내용을 보고하더군요. 감사실이 감사위원회의 하부조직인데, 실제론 사장 직속으로 돼 있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어요. 감사위원회와 감사실의 관계에 대해 설명을 요청했더니 회사가 크게 당황하더군요. 전문경영인이 제대로 말을 못하자, 최태원 회장이 ‘앞으로 연구해서 시스템을 바꾸겠다’고 약속했어요. 결국 감사위원회가 감사실을 지휘하게 됐지요.” “토론 없는 이사회는 사실상 거수기에 불과” 남 전 사외이사는 에스케이에서도 내부통제 시스템 구축을 맡은 용역업체와 회계감사기관의 선정을 경쟁입찰 방식으로 바꾸었다. 회사는 다시 한번 발칵 뒤집혔다. 그는 토론이 없는 이사회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강조한다. “토론 없는 이사회는 사실상 (경영진의) 거수기에 불과해요. 사실 에스케이 이사회도 내가 가기 전까지는 토론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남 전 사외이사는 이사회에서 토론이 이뤄지려면 이사들의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수라고 말한다. “회사 쪽에 이사회가 열리기 최소 5일 전에 안건을 보내라고 했어요. 미리 공부를 해야 하니까요.” 한번은 회사에서 발전소 건립 프로젝트를 상정했는데, 그 안건만 가지고 1시간이나 토론을 했다. 일부 임원은 사외이사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못한 뒤 창피하다며 사표를 내기까지 했다. 에스케이는 2004년에 위기를 딛고 1조6천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한해 전보다 100배나 많은 규모였다. “직원들은 이사회 중심의 투명경영을 사내 10대 뉴스의 1위로 뽑을 정도로 더 높이 평가했어요. 회사가 앞으론 엉뚱한 짓을 해서 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 것이지요.” 남 전 사외이사는 2008년 대우조선 인수 추진 건을 사례로 꼽았다. “회사가 이사회를 두번이나 열었지만, 나와 조순 사외이사(전 부총리)가 반대하니까 결국 포기했어요. 그런데 그로부터 한달 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어요.” 에스케이 대신에 대우조선을 인수한 한화는 결국 수천억원에 이르는 계약금을 포기했다. “사외이사들이 반대해서 회사에 수천억원의 손실을 막아준 겁니다. 대우조선 인수를 추진했던 사장이 나중에 찾아와서 고맙다고 인사합디다.” 그는 이사회에서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고, 사외이사들이 회사의 무리한 계획에 소신껏 반대할 수 있으려면 대주주의 입김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독립적인 사외이사가 최소한 전체 이사회의 3분의 1 내지 2분의 1은 되어야 합니다. 총수의 입맛에 맞는 사람만 뽑히면 이사회가 제 역할을 못해요.” 남 전 사외이사는 독립적 사외이사 선임을 정부가 제도적으로 의무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상법 개정안에 담긴 것처럼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대주주 의결권 제한도 한 방법입니다.” 재계가 상법 개정안에 대해 정상적인 이사회 활동이 어려워진다고 반대하는 것에 대해 남 전 사외이사는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일축한다. “내가 에스케이에서 6년간 사외이사를 했는데, 회사 경영에 도움을 주면 줬지 차질을 빚은 일은 없었어요. 이사회는 합의의결기구입니다. 설령 일부가 반대해도 나머지가 찬성하면 다수결 원칙에 따라 의안이 처리됩니다.” 그는 독립적 사외이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를 소개했다. 에스케이 분식회계 사건 이후 외국계 은행들이 수억달러에 이르는 회사의 크레디트 라인(신용한도)을 끊었다. 회사의 재개 요청이 거절당하자 상황은 심각해졌다. 이때 한 은행으로부터 남 전 사외이사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외국 은행 고위 인사가 ‘분식회계를 한 회사는 경영이 좋아지면 다시 (불법행위를) 한다. 이것을 막는 것이 기업지배구조인데, 당신이 약속할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내가 ‘그러겠다’고 약속했더니, 바로 크레디트 라인을 회복시켜줬어요.” 남 전 사외이사는 국제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와 무디스와도 단독 인터뷰를 했다. 이후 두 기관은 에스케이의 신용등급을 올려줬다. 재계가 외국 자본에 의한 경영권 위협론을 펴며 대표 사례로 꼽는 것이 2003~2004년의 소버린 사태다. 시민단체들은 재계의 주장이 현실 가능성이 없고, 왜곡·과장된 것이라고 반박하지만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는 재계의 주장은 대중들의 마음을 교묘히 잡아끈다. 남 전 사외이사는 이를 시대착오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대외 개방을 할 수밖에 없어요. 수많은 외국 투자자들이 국내 기업의 주식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민족 자본과 외국 자본을 대립적으로 놓고, 외국 자본에 의한 경영권 위협론을 부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는 소버린도 결코 에스케이의 경영권을 위협한 적이 없다고 강조한다. “소버린이 2004년 주총에서 독립적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한 5명 중에는 나 외에도 조동성 서울대 교수, 한승수 전 국무총리 같은 인사들이 포함돼 있었어요. 소버린이 에스케이의 경영권을 위협했다면 그분들이 소버린의 추천을 수용했겠습니까?” 재계가 제2, 제3 대주주 또는 소수 주주들의 지지를 받는 독립적인 사외이사가 선임되면 이사회가 정파적, 당파적으로 운영되어 정상적 의사결정이 어려워진다는 주장을 펴는 것에 대해서도 그는 펄쩍 뛴다. “현재도 대기업의 경우 전체 이사가 10명이라면 사외이사가 7명으로, 사내이사 3명보다 더 많은데, 회사가 산으로 올라갔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2008년 이후 분위기 바뀐 에스케이 재계는 기업지배구조에는 정답이 없다며, 정부가 법으로 강제하기보다 기업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 전 사외이사는 이에 대해 “국내 기업들은 법에 정해진 것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데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고 고개를 젓는다. 미국은 2001년 엔론 분식회계 사건 이후 사업보고서에 최고경영자가 의무적으로 서명하도록 법을 개정했다. 사업보고서에 거짓이 있으면 최고경영자가 책임지라는 취지다. 한국 역시 에스케이 분식회계사건 이후 대표이사가 서명하도록 의무화했다. 하지만 재벌 총수들은 이를 교묘히 빠져나갔다. 공동 대표이사로 있는 전문경영인만 서명하도록 한 것이다. 남 전 사외이사는 최근 한화·에스케이·씨제이 등 재벌 총수들이 배임·횡령·탈세 혐의로 줄줄이 형사처벌을 받고 있는 원인도 궁극적으로는 이사회가 제대로 감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총수들의 지나친 탐욕이 화를 자초하고 있는데, 우리 사회가 이를 계속 방치하는 책임이 큽니다. 불법 비리를 저지른 총수와 측근들은 사법적 처벌, 손해배상 책임과 함께 회사경영을 더이상 못하게 원천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남 전 사외이사는 에스케이가 분식회계와 소버린 사태 이후 투명경영과 이사회 중심 경영을 통해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는 성과를 냈지만, 2008년 이후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최태원 회장 형제가 회삿돈을 불법적으로 빼돌려 펀드에 투자한 시기와 일치한다. “언제부터인가 이사회가 상식과 합리 대신 경영진의 독선에 의해 운영되기 시작했어요. 펀드 투자 건도 이사회 의안으로 올라온 적이 없어요.” 남 전 사외이사는 2009년 스스로 에스케이 사외이사를 3연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외이사 임기를 두번 맡았으면 충분합니다. 회사와 정들면 사외이사 역할을 못해요.” 하지만 자신을 포함해 6년간 일했던 5명의 사외이사가 2010년 초 동반퇴진한 뒤 에스케이의 이사회 구성이나 성격이 크게 바뀌었다고 말한다. “소수 주주와 외국 주주가 추천하는 사외이사가 아예 없어졌잖아요. 만약 이사회가 제 기능을 했다면 최태원 회장 사건도 없었을 겁니다.” 남 전 사외이사는 “재벌 총수들의 과도한 탐욕이 경제민주화를 시대적 이슈로 등장시켰다”며 “기업지배구조 개선은 경제민주화를 이루려는 시대의 요구”라고 힘주어 말했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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