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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1.22 19:59 수정 : 2013.11.23 10:07

재일동포 이동석(오른쪽 넷째)씨가 20일 오전 11시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두번째 공판을 마치고 일본에서 함께 온 ‘이동석을 구원하는 모임’ 회원들과 법원 입구 앞에 섰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이씨의 석방을 위해 힘써온 회원들은 이제 재심 무죄를 기다리고 있다. 이씨 양옆에 선 사람은 함께 재심을 받는 강종건(왼쪽)씨와 이씨의 둘째아들 성훈씨.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뉴스분석 왜? / 재일동포 조작간첩과 구원모임

▶ 물론 일본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식민지 지배나 재일동포 문제에 관심을 가지진 않을 겁니다. 반대로 한국인이라고 해서 전부 ‘간첩’이라며 재일동포를 외면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재일동포 간첩사건에 관심을 가진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의 노력이 모여, 늦었지만 이제라도 이분들의 무죄가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습니다.

“2011재노13 사건 이동석 피고인.”

정형식 판사의 호명에 이동석(61)씨가 피고인석에 섰다. 20일 오전 11시 서울고등법원 302호에서 이씨의 재심 두번째 공판이 시작됐다. 재일동포 2세인 이씨는 1976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소속 북한 공작원의 지시를 받아 한국에 유학온 뒤 국가기밀을 수집해 건네준 혐의(국가보안법 위반·간첩)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당시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현 국군기무사령부) 수사관들의 고문과 가혹행위가 드러나 2012년 9월7일 재심 개시가 결정됐다.

“증인으로 김○○씨를 신청하셨네요.” “수사에 참여했던 인물인데, 피고인이 주장하는 가혹행위가 있었는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판사의 질문에 고병민 검사가 답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이미 조사를 했으니 또 부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석태 변호사(법무법인 덕수)의 말에도 김씨는 증인으로 채택됐다. “그럼 12월18일 오후 3시에 보겠습니다.” 공판은 5분도 안 돼 끝났다.

이날 방청석에는 자비를 들여 이씨의 재심을 보러 온 일본인 8명이 앉아 있었다. 38년째 이씨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이동석을 구원하는 모임’ 회원들이다.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지만 재판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사가 질질 끄는 것 같아서 너무 분해요.” 하타 아키오(60)씨는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판사가 자리를 뜬 뒤에도 이들은 한동안 재판장을 떠나지 못했다.

재일동포 간첩 색출하겠다는 보안사의 계획

이동석씨는 1975년 ‘학원침투 북괴간첩단’ 사건으로 보안사에 체포된 사람 중 한명이다. 1975년 11월22일 중앙정보부(중정·현 국가정보원)가 김동휘씨 등 재일동포 유학생 12명과 국내 대학생 9명 등 21명을, 12월에는 보안사가 이동석씨 등 재일동포 17명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고 밝혔다. 이른바 ‘11·22사건’으로, 가장 큰 규모의 ‘재일동포 및 일본 관련 간첩사건’이었다.

‘재일동포 및 일본 관련 간첩사건’은 대부분 ‘총련 소속 북한 공작원과 접촉하거나 지령을 받아 간첩 활동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총련 소속이라는 북한 공작원의 실체나 증거는 주일대사관의 영사증명서, 신원확인서 등이 전부였다. 간첩 행위에 대한 증거도 본인 진술이 대부분이었는데, 당사자가 재판 과정에서 이를 부인하거나 고문 등 가혹행위 사실을 폭로하면서 조작 의혹이 꾸준히 제기됐다.

보안사가 낸 <대공 30년사>를 보면 ‘1968년 1·21 사태 이후 경계가 강화되어 북괴는…소극적인 활동이 불가피하자 침투수법의 새로운 방향전환을 모색했다’고 써 있다. 이런 판단 아래 공안당국은 1970년대부터 외국을 통해 들어오는 우회 간첩에 주목했다. 북한이 교민단체로 인정한 총련이 있고, 일본공산당이 합법 정당으로 활동할 만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됐고, 최대 규모의 동포 사회가 있던 일본이 특히 주목받았다. 실제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1970~1989년 간첩사건 통계를 분석해보니, 전체 966건 중 319건이 ‘일본 우회 간첩’ 사건이었다.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은 생계유지, 강제동원 등의 이유로 일본으로 이주했다. 1945년 111만명으로 크게 늘어난 재일동포들은, 해방 뒤 모두 귀국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일본에서 닦은 안정된 기반, 한반도의 정치적 혼란 등을 이유로 60여만명 정도는 일본에 남았다. 일본과 남한 정부는 이들의 국적 등 처우에 관한 문제를 방치했다. 그사이 재일동포의 생활 문제를 챙겼던 건 총련이었다.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총련과 한국 정부가 교민단체로 인정한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을 엄격하게 구분했지만, 분단 전부터 구분 없이 살았던 재일동포 사회에서 양자는 가족이자 친구, 이웃으로 어울렸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민족차별 속에서 고통받던 재일동포 중 일부는 1965년 한일협정 뒤 학업·취업 등을 위해 한국에 돌아왔다. 박정희 정권도 모국방문단·모국유학생제도 등을 통해 이를 장려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이동석씨도 1971년 모국 유학생제도를 통해 한국에 왔다. 일본식 이름을 쓰던 그는 정체성 혼란 끝에 고등학교 3학년 때 한글 이름을 쓰겠다는 ‘본명 선언’을 발표했고 ‘조선인문화연구회’라는 동아리도 만들어 한글을 공부했다. 그는 ‘모국어를 배우는 것이 민족성을 찾는 일’이라는 생각에 한국에 와 1972년 한국외대에 입학했다.

이동석씨 재심 두번째 공판이
서울고등법원에서 20일 열렸다
재판 방청한 8명의 일본인은
1975년부터 그의 곁을 지킨
‘이동석을 구원하는 모임’ 회원들

식민지시기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동포의 2세들 한국 왔지만
독재정권은 간첩사건 조작해
민주화운동 탄압 위해 이용
석방운동이 일본에서 시작됐다

‘같은 민족’이라며 앞에서는 재일동포를 환영했던 한국 정부는 이들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 1970년대부터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강화되자, 정부는 재일동포 간첩사건을 터뜨려 민주화 운동을 ‘북한의 지시를 받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반체제 활동’으로 매도했다. 11·22 사건이 터진 1975년도 박정희 정권 유신반대 시위가 대학가에서 퍼지고 있을 때였다. 국내 민주화 운동 탄압을 위해 재일동포는 공안 당국의 관리 대상이 됐다. 보안사가 펴낸 <대공활동사>를 보면, 재일동포 중 유학을 가장해 한국에 온 간첩을 색출하기 위한 ‘수사 근원 발굴’ 계획을 1981년 중점사업으로 삼기도 했다. 중점 조사 대상자는 ‘총련 동포가 많이 거주한 지역에 살았던 학생, 국어 실력이 출중한 학생, 민족의식이 강한 학생’ 등이었다.

재일동포는 식민지·분단·독재 3중의 희생자였다. 한국인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왜 왔는지 알지 못한 채 ‘반공’이란 색안경을 끼고 이들을 바라봤다. 역사의 피해자라는 사실도, 가혹행위나 사건 조작을 통해 인권을 침해받았다는 사실도 ‘간첩’ ‘빨갱이’라는 낙인 앞에선 외면당했다. 민주화 운동 세력조차 함께 간첩으로 묶일까 이들을 보듬지 못했다. 가족도 없는 낯선 모국에서 이들은 수사도 재판도 수감생활도 홀로 버텨야 했다. 도움의 손길은 오히려 그들을 차별했던 일본 사회에서 왔다.

“일본 차별 느껴 한국까지 갔는데…”

이동석씨의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이케가미 마치코(70)씨는 1975년 말 그의 구속 소식을 제자들에게 들었다. 이씨의 가족·동급생·이웃들을 중심으로 ‘이동석을 구원하는 모임’이 꾸려지자 이케가미씨도 참여했다. “그가 간첩행위를 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어요. 일본에 있을 때 그런 행동을 한 걸 본 적도 없고, 한꺼번에 10명이 넘는 사람이 구속된 것도 놀라웠어요. 의도적으로 한국 정부가 조작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죠.” 가족과 지인을 중심으로 시작된 구원모임은 이씨가 살았던 히가시오사카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노동운동을 하던 야마다 다카쓰구(61)씨, 재일동포의 취업 차별 반대 운동을 했던 오오토 히로시(67)씨, 학생운동을 하다 공무원으로 있던 이노우에 가즈오(64)씨, 교직원 노동조합 전임이었던 다카야나기 다다오(63)씨 등 이씨를 전혀 모르던 사람들도 참여했다. 이들은 이씨의 가족을 돌보면서 석방 서명운동, 단식투쟁, 이씨를 지지하는 엽서 보내기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77년 8월 이동석씨가 대전교도소에서 받은 엽서. 일본에서 만들어진 그의 구원모임은 이씨를 위해 ‘하루에 엽서 한 개 보내기’ 운동을 펼쳤다. 이동석씨 제공

간첩 혐의로 체포된 재일동포 구원모임은 1971년 ‘서승·서준식 형제’ 사건을 시작으로 결성됐다.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구원모임은 재일동포 간첩 사건이 연이어 발표되자 1976년 ‘재일한국인 정치범 지원회 전국회의’, 1977년 ‘재일한국인 정치범을 구원하는 가족·교포회’ 등 일본 민주 세력까지 포괄하는 모임으로 확대됐다. 1977년에는 10만명 서명운동을 진행해온 ‘이철씨를 구원하는 전국연락회의’를 시작으로 35개 개별 구원회가 일본 정부에 감옥에 수용된 재일동포의 인권 구제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1975년 사형 선고를 받은 재일동포 간첩사건 관련자 7명을 석방할 수 있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8명이 형이 확정된 지 18시간 만에 사형당하던 시절이었다.

왜 일본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간첩 사건에 관심을 가졌던 걸까. 그 배경에는 일본의 1960년대가 있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태어난 이른바 ‘단카이 세대’는 고등학생·대학생 시절 일-미 상호방위조약 개정 반대투쟁(안보투쟁)과 베트남 반전운동에 참여하면서 국제·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갖게 됐다. 폭발적으로 확대되던 일본 사회운동은 1959년 재일동포 북한 귀향, 1968년 김희로 사건(재일동포 김희로씨가 일본 야쿠자를 죽인 뒤 88시간이나 인질극을 벌인 사건), 재일동포 2세들의 취업 차별 등을 목격하며 재일동포 문제로까지 확대됐다. 1973년 도쿄의 한 호텔에서 벌어진 ‘김대중 납치사건’도 독재정권과 민주화 운동이라는 한국 현실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전쟁은 이미 끝났는데 아직까지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이 일본 제도권 밖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자각이 1960년대 일본 사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던 중 식민지배로 상처받았던 재일동포들이 한국으로 돌아가 간첩이라며 수난당하는 것을 알게 됐죠.” 권혁태 성공회대 교수(일어일본학과)가 말했다. 야마다씨가 이런 경우였다. “치료를 받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한 한국인 피폭자, 고마쓰가와 사건(재일동포의 일본인 여고생 살인사건) 등을 보면서 재일동포의 고통이 엄청나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자신을 차별하는 일본 사회에 절망을 느껴 한국까지 갔는데 오히려 독재 정권에 당하는 모습을 보니 속상했습니다. 친구가 해준 이동석씨 이야기를 듣고 구원모임에 참여하게 됐어요.” 이들에게 재일동포 간첩사건은 ‘인권’의 문제로 다가왔다.

구원모임은 이동석씨에게 큰 힘이 됐다. “재판 때 온 일본인 동창들이 눈짓으로 ‘힘내라’고 말해줬어요. 확정 판결 뒤 교도소로 면회를 오거나 엽서를 보내줬는데 그럴 때마다 ‘혼자가 아니다’ 싶었죠.” 1980년 8월15일 특별사면으로 5년간 감옥에 있다 석방된 이씨가 일본에 돌아갔을 때, 그들은 삶의 버팀목도 돼주었다. 이씨는 그들과 함께 간첩사건으로 구속된 재일동포 사업가 손유형씨(1981년), 재일동포 유학생 윤정헌씨(1984년) 등의 구원모임에 참여하며 ‘살아 돌아온 자’의 몫을 다했다.

재심 무죄에도 ‘종북’이라고 비난하는 한국

‘재일한국인 정치범을 구원하는 가족·교포회’가 1993년 해산되는 등 1990년대 초부터 구원모임은 해산되기 시작했다. 간첩사건 관련자들이 대부분 석방되면서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을 하면서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문제의 뿌리를 찾은 일부 구원회원들은 한·일 역사 문제나 재일조선인들과 연계된 지역공동체 운동으로 구원회 활동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씨 구원모임 회원들은 위안부·민족교육 등 한·일 역사 문제나 원전 반대 등 지역사회 운동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무죄’라는 구원운동의 최종 목표는 노무현 정권의 과거사 청산 뒤에야 달성될 수 있었다.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는 김정사씨 등 3명의 재일동포 간첩사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강종헌씨 등 10명의 재일동포 간첩사건을 ‘조작’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2010년 7월15일 이종수씨가 처음으로 재심 무죄를 선고받은 뒤, 11월 현재 15명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확정받았고 8명의 재심이 진행중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변호사들이 모인 ‘재일동포 재심 변호인단’이 이들의 재판을 지원하고 있다.

이씨 구원모임 회원들은 38년이나 함께했던 구원운동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지난 10월 첫 공판에 이어 두번째로 한국을 찾았다. 보행보조기가 있어야 걸을 수 있는 이노우에씨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비행기를 탔다. “구원운동 했을 때는 재심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동안 열심히 운동한 게 있으니 힘들지만 그 결말을 직접 보고 싶어 왔지요.” 이케가미씨는 한국의 과거사 청산을 높이 평가했다. “일본은 식민지배라는 과거를 외면하지만 한국은 과거와 맞서고 있잖아요. 정부가 과거사 청산을 하게 한 국민의 힘이 일본보다 한국이 큰 것 같아요. 그것도 민주화 운동의 힘이겠죠.”

과거사 위원회나 재심을 통한 과거사 청산은 그의 말처럼 성과가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 사건을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색깔론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재일동포 간첩사건으로 사형까지 선고받았던 강종헌씨는 지난 1월 재심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지난해 총선 통합진보당 비례대표였던 그가 이석기 국회의원이 제명될 경우 의원직을 승계할 것으로 알려지자, 보수언론은 조작으로 드러난 그의 간첩 전력을 내세워 ‘종북’으로 맹비난했다. 재일동포들의 억울한 옥살이와 가혹행위가 밝혀지기까지 40여년이 걸렸지만, 그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은 4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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