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이동석(오른쪽 넷째)씨가 20일 오전 11시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두번째 공판을 마치고 일본에서 함께 온 ‘이동석을 구원하는 모임’ 회원들과 법원 입구 앞에 섰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이씨의 석방을 위해 힘써온 회원들은 이제 재심 무죄를 기다리고 있다. 이씨 양옆에 선 사람은 함께 재심을 받는 강종건(왼쪽)씨와 이씨의 둘째아들 성훈씨.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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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 재일동포 조작간첩과 구원모임
▶ 물론 일본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식민지 지배나 재일동포 문제에 관심을 가지진 않을 겁니다. 반대로 한국인이라고 해서 전부 ‘간첩’이라며 재일동포를 외면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재일동포 간첩사건에 관심을 가진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의 노력이 모여, 늦었지만 이제라도 이분들의 무죄가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습니다. “2011재노13 사건 이동석 피고인.” 정형식 판사의 호명에 이동석(61)씨가 피고인석에 섰다. 20일 오전 11시 서울고등법원 302호에서 이씨의 재심 두번째 공판이 시작됐다. 재일동포 2세인 이씨는 1976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소속 북한 공작원의 지시를 받아 한국에 유학온 뒤 국가기밀을 수집해 건네준 혐의(국가보안법 위반·간첩)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당시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현 국군기무사령부) 수사관들의 고문과 가혹행위가 드러나 2012년 9월7일 재심 개시가 결정됐다. “증인으로 김○○씨를 신청하셨네요.” “수사에 참여했던 인물인데, 피고인이 주장하는 가혹행위가 있었는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판사의 질문에 고병민 검사가 답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이미 조사를 했으니 또 부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석태 변호사(법무법인 덕수)의 말에도 김씨는 증인으로 채택됐다. “그럼 12월18일 오후 3시에 보겠습니다.” 공판은 5분도 안 돼 끝났다. 이날 방청석에는 자비를 들여 이씨의 재심을 보러 온 일본인 8명이 앉아 있었다. 38년째 이씨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이동석을 구원하는 모임’ 회원들이다.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지만 재판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사가 질질 끄는 것 같아서 너무 분해요.” 하타 아키오(60)씨는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판사가 자리를 뜬 뒤에도 이들은 한동안 재판장을 떠나지 못했다. 재일동포 간첩 색출하겠다는 보안사의 계획 이동석씨는 1975년 ‘학원침투 북괴간첩단’ 사건으로 보안사에 체포된 사람 중 한명이다. 1975년 11월22일 중앙정보부(중정·현 국가정보원)가 김동휘씨 등 재일동포 유학생 12명과 국내 대학생 9명 등 21명을, 12월에는 보안사가 이동석씨 등 재일동포 17명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고 밝혔다. 이른바 ‘11·22사건’으로, 가장 큰 규모의 ‘재일동포 및 일본 관련 간첩사건’이었다. ‘재일동포 및 일본 관련 간첩사건’은 대부분 ‘총련 소속 북한 공작원과 접촉하거나 지령을 받아 간첩 활동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총련 소속이라는 북한 공작원의 실체나 증거는 주일대사관의 영사증명서, 신원확인서 등이 전부였다. 간첩 행위에 대한 증거도 본인 진술이 대부분이었는데, 당사자가 재판 과정에서 이를 부인하거나 고문 등 가혹행위 사실을 폭로하면서 조작 의혹이 꾸준히 제기됐다. 보안사가 낸 <대공 30년사>를 보면 ‘1968년 1·21 사태 이후 경계가 강화되어 북괴는…소극적인 활동이 불가피하자 침투수법의 새로운 방향전환을 모색했다’고 써 있다. 이런 판단 아래 공안당국은 1970년대부터 외국을 통해 들어오는 우회 간첩에 주목했다. 북한이 교민단체로 인정한 총련이 있고, 일본공산당이 합법 정당으로 활동할 만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됐고, 최대 규모의 동포 사회가 있던 일본이 특히 주목받았다. 실제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1970~1989년 간첩사건 통계를 분석해보니, 전체 966건 중 319건이 ‘일본 우회 간첩’ 사건이었다.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은 생계유지, 강제동원 등의 이유로 일본으로 이주했다. 1945년 111만명으로 크게 늘어난 재일동포들은, 해방 뒤 모두 귀국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일본에서 닦은 안정된 기반, 한반도의 정치적 혼란 등을 이유로 60여만명 정도는 일본에 남았다. 일본과 남한 정부는 이들의 국적 등 처우에 관한 문제를 방치했다. 그사이 재일동포의 생활 문제를 챙겼던 건 총련이었다.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총련과 한국 정부가 교민단체로 인정한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을 엄격하게 구분했지만, 분단 전부터 구분 없이 살았던 재일동포 사회에서 양자는 가족이자 친구, 이웃으로 어울렸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민족차별 속에서 고통받던 재일동포 중 일부는 1965년 한일협정 뒤 학업·취업 등을 위해 한국에 돌아왔다. 박정희 정권도 모국방문단·모국유학생제도 등을 통해 이를 장려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이동석씨도 1971년 모국 유학생제도를 통해 한국에 왔다. 일본식 이름을 쓰던 그는 정체성 혼란 끝에 고등학교 3학년 때 한글 이름을 쓰겠다는 ‘본명 선언’을 발표했고 ‘조선인문화연구회’라는 동아리도 만들어 한글을 공부했다. 그는 ‘모국어를 배우는 것이 민족성을 찾는 일’이라는 생각에 한국에 와 1972년 한국외대에 입학했다. 이동석씨 재심 두번째 공판이서울고등법원에서 20일 열렸다
재판 방청한 8명의 일본인은
1975년부터 그의 곁을 지킨
‘이동석을 구원하는 모임’ 회원들 식민지시기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동포의 2세들 한국 왔지만
독재정권은 간첩사건 조작해
민주화운동 탄압 위해 이용
석방운동이 일본에서 시작됐다 ‘같은 민족’이라며 앞에서는 재일동포를 환영했던 한국 정부는 이들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 1970년대부터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강화되자, 정부는 재일동포 간첩사건을 터뜨려 민주화 운동을 ‘북한의 지시를 받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반체제 활동’으로 매도했다. 11·22 사건이 터진 1975년도 박정희 정권 유신반대 시위가 대학가에서 퍼지고 있을 때였다. 국내 민주화 운동 탄압을 위해 재일동포는 공안 당국의 관리 대상이 됐다. 보안사가 펴낸 <대공활동사>를 보면, 재일동포 중 유학을 가장해 한국에 온 간첩을 색출하기 위한 ‘수사 근원 발굴’ 계획을 1981년 중점사업으로 삼기도 했다. 중점 조사 대상자는 ‘총련 동포가 많이 거주한 지역에 살았던 학생, 국어 실력이 출중한 학생, 민족의식이 강한 학생’ 등이었다. 재일동포는 식민지·분단·독재 3중의 희생자였다. 한국인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왜 왔는지 알지 못한 채 ‘반공’이란 색안경을 끼고 이들을 바라봤다. 역사의 피해자라는 사실도, 가혹행위나 사건 조작을 통해 인권을 침해받았다는 사실도 ‘간첩’ ‘빨갱이’라는 낙인 앞에선 외면당했다. 민주화 운동 세력조차 함께 간첩으로 묶일까 이들을 보듬지 못했다. 가족도 없는 낯선 모국에서 이들은 수사도 재판도 수감생활도 홀로 버텨야 했다. 도움의 손길은 오히려 그들을 차별했던 일본 사회에서 왔다. “일본 차별 느껴 한국까지 갔는데…” 이동석씨의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이케가미 마치코(70)씨는 1975년 말 그의 구속 소식을 제자들에게 들었다. 이씨의 가족·동급생·이웃들을 중심으로 ‘이동석을 구원하는 모임’이 꾸려지자 이케가미씨도 참여했다. “그가 간첩행위를 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어요. 일본에 있을 때 그런 행동을 한 걸 본 적도 없고, 한꺼번에 10명이 넘는 사람이 구속된 것도 놀라웠어요. 의도적으로 한국 정부가 조작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죠.” 가족과 지인을 중심으로 시작된 구원모임은 이씨가 살았던 히가시오사카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노동운동을 하던 야마다 다카쓰구(61)씨, 재일동포의 취업 차별 반대 운동을 했던 오오토 히로시(67)씨, 학생운동을 하다 공무원으로 있던 이노우에 가즈오(64)씨, 교직원 노동조합 전임이었던 다카야나기 다다오(63)씨 등 이씨를 전혀 모르던 사람들도 참여했다. 이들은 이씨의 가족을 돌보면서 석방 서명운동, 단식투쟁, 이씨를 지지하는 엽서 보내기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77년 8월 이동석씨가 대전교도소에서 받은 엽서. 일본에서 만들어진 그의 구원모임은 이씨를 위해 ‘하루에 엽서 한 개 보내기’ 운동을 펼쳤다. 이동석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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