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규모 세계 3위인 네덜란드연기금의 자산운용사인 에이피지(APG)의 박유경 이사가 지난 7일 서울 강남에서 <한겨레>와 만나 삼성물산 합병 논란을 계기로 드러난 한국의 후진적 기업지배구조의 실상과 향후 개선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열정적으로 밝히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토요판] 뉴스분석 왜?
네덜란드연기금 박유경 이사 인터뷰
▶ 삼성물산-제일모직 간 합병 논란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세계 최대 규모 연기금 중 하나인 네덜란드연기금의 자산운용사인 에이피지(APG)의 박유경 이사를 만났다. 박 이사는 아시아지역 지속가능성 및 지배구조 담당 총책임자다. 지난 6월초 엘리엇이 삼성 공격에 나선 이후 외국인 투자자 30~40곳의 뜻을 반영해 삼성과의 대화창구 구실을 하면서, 합병비율이 주주들의 이익을 해치기 때문에 합병에 반대하지만 엘리엇과 직접 행동을 같이하지는 않는다는 일관된 입장을 지켜왔다.
“한국은 올바른 기업 지배구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라.”
네덜란드연기금자산운용사(APG)의 박유경(46) 이사는 최근 삼성, 에스케이 등 한국 재벌 계열사들의 합병 논란을 바라보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생각을 이렇게 압축했다.
박 이사는 지난 7일 서울에서 <한겨레>와 단독 인터뷰를 하면서 “시대는 이미 21세기인데 한국은 여전히 20세기 지배구조를 고수하다니 어찌 이런 일이라는 탄식이 나온다”며 좋은 기업지배구조를 갖지 못한 기업은 진정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박 이사는 “과거 지배구조 후진국으로 불렸던 일본은 아베 정부가 들어선 뒤 지배구조를 대폭 개선하면서 이제는 한국보다 (지배구조가) 낫다는 평가가 나온다”며 “중국 기업도 한국보다 훨씬 더 주주친화경영을 하는 것을 보면 한국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박 이사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당장 주총에서 합병이 성사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니라, 기업이 입은 명성과 이미지의 타격을 어떻게 회복할 것이냐”라며 “이를 위해 기업들과 협력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지배구조란 무엇인가
-최근 한국 시장에서는 재벌 계열사 합병을 둘러싸고 잇달아 주주이익 훼손 논란이 일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생각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지배구조’다. 다시 말해 한국은 지배구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대는 이미 21세기인데 한국은 여전히 20세기 지배구조를 고수하다니 어찌 이런 일이’라고 할까? 한국 기업들의 후진적 지배구조로 인한 코리아디스카운트(한국 기업들의 주가 저평가)는 최소 20%다.”
-지배구조란 간단히 무엇인가?
“교역선에 상품을 실어 먼 나라로 떠나보내는 상인에 비유할 수 있다. 상인은 직접 배를 타고 가지 않는 대신 배가 돈을 많이 벌어 되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배가 항해는 제대로 하는지, 외국에 도착해서 거래는 제대로 하는지 등을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투자자들에게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내부 감시·견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어떤가?
“일본은 아베 정부가 들어선 뒤 지배구조가 대폭 개선됐다. 투자자들이 맡긴 돈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스튜어드십 코드와, 기업들이 지켜야 할 지배구조 코드가 새로 만들어졌다. 아베 정부는 일본 경제 활성화를 위해 돈을 더 풀고, 엔화의 가치를 떨어뜨린 것뿐만 아니라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건강한 시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기업들이 주주를 위한 경영에 관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면 경제가 활력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 일본은 과거 지배구조 후진국으로 불렸으나, 이제는 한국보다 (지배구조가) 낫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은 어떤가?
“홍콩이나 중국 상장기업의 경우 일정 규모 이상의 투자와 외부차입, 이해관계자와의 거래(내부거래)를 할 때면 주총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사회 결정으로 끝내는 한국에 비해 주주권한이 훨씬 강하다. 내부거래를 승인할 때는 지배주주나 계열사 지분은 제외하고, 나머지 독립적 주주들로만 의결을 한다. 중국 기업이 한국보다 훨씬 더 주주친화경영을 한다. 솔직히 중국을 보면 한국이 걱정된다. 주주친화적이지 않은 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제 대접을 받을 수 없다. 이전에는 한국 기업은 핵심 장기투자 대상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지배구조 문제 때문에 자본시장의 건강성이 약해지고 불확실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배당성향(당기순이익 중에서 배당이 차지하는 비율)만 봐도 선진국은 50%를 넘고, 대만은 평균 80%에 달하는데, 한국은 12%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내부거래를 할 때 주총 승인을 받지도 않지만, 주총을 거치게 하더라도 지배주주나 계열사의 의결권을 제한하면, 역차별이라고 난리가 날 것 같다.
“이해관계자를 의결권 행사에서 제외하는 것은 선진국은 물론 홍콩, 싱가포르, 인도 등 모두 동일하다. 한국과 일본만 예외다. 한국의 재벌이 모든 주주들을 위한 경영이 아닌, 특정 지배주주(오너)를 위한 경영을 하는 것과 대조된다. 한국 기업은 말로는 주주를 위한 경영을 강조하지만, 그 말뜻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 분기에 한번씩 투자자설명회(IR)를 하고, 해외에 직접 나가 설명한다고 주주를 위한 경영을 하는 게 아니다.”
-투자, 차입, 내부거래 등을 모두 주총에서 결정하면 회사의 의사결정 지연 등 부작용도 있지 않을까?
“전자투표를 하면 주총을 자주 열어도 부담이 없다. 한국도 빨리 도입해야 한다.”(박근혜 정부는 전자투표 도입 등이 포함된 상법 개정안을 추진하다가 재계가 반대하자 사실상 포기한 상태다.)
-주주친화경영은 무엇인가?
“기업의 내재가치를 높이고, 투자하고 남은 잉여이익은 주주들에게 적절히 환원하는 경영을 말한다. 중국 상장기업들의 경우 정관에 배당성향은 30% 이상이라고 못박아 놓고 있다.”
-평균 5% 지분도 갖고 있지 않은 재벌 총수들이 절대권한을 행사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관행은 부당하고, 나머지 주주들도 제대로 주인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나름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인 투자자나 소액주주들은 배당 확대만 요구하고 회사의 장기 발전에는 관심이 적다는 비판도 있다.
“기업 이익을 무조건 배당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성장동력 확보에 필요한 투자를 우선적으로 하고, 남은 재원은 주주들에게 환원하라는 것이다. 주주친화경영을 제대로 하려면 주주들의 뜻을 반영하는 이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국 기업의 이사회는 제 기능을 못한다. 사외이사들의 역할은 경영진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주주들을 위한 경영을 하는지 감시·견제하는 것이다.”
-사외이사들이 거수기라는 지적을 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사회의 독립성이 중요하다. 사외이사는 단지 회사 밖에서 선정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배주주와 경영진으로부터) 독립돼야 한다. 또 수적인 독립성도 중요하다. 그래서 50% 이상을 사외이사로 해야 한다.”
한국은 21세기에 20세기 지배구조경영진과 이사회가 전체 주주 아닌
특정 1인(지배주주) 이익만 중시해
일본은 아베 정부 이후 대폭 개선
중국도 한국보다 주주친화경영 석유화학과 철강업종 바닥일 때
한·중의 투자자 리포트 분석했더니
중국은 70~80%가 주식매각 권유
한국은 90% 이상이 주식매수 권유
수십년간 이런 게 개선 안되더라 헤지펀드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독립된 사외이사를 어떻게 뽑나?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회사가 사외이사의 취지에 맞게 제대로 운용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지배구조는 일종의 ‘문화’다.” -주주친화경영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의 지배구조 개선과제를 꼽는다면? “주주-이사회-경영진으로 이어지는 이해관계의 불일치 문제가 심각하다. 경영진이나 이를 감시해야 할 이사회가 전체 주주가 아닌 특정 1인(지배주주)의 이익만 중시한다. 합병비율의 불공정성 논란이 빚어지는 이유다. 또 이사회가 경영진을 감시·견제하는 기능을 못하는 ‘마네킹’이다. 이사들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왜(Why)라고 물어야 하고, 주주이익에 배치되는 의사결정에 대해서는 아니오(NO)라고 말해야 하는데,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 -한국의 재벌체제와 관련된 개선과제도 있을 텐데?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경영권의 안정을 확보하면서도 (지배주주뿐만 아니라) 모든 주주를 위한 지배구조를 확립해야 한다. 그러면 외국 주주들이 투자하지 말라고 해도 투자한다.” -특정 지배주주가 없는 비재벌 기업들은 어떤가? “주인 없는 기업들의 지배구조도 문제다. 어쩌면 주인 있는 회사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주인 있는 회사는 최소한 회사 가치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주인 없는 회사는 경영진이 자기 이익을 위해 회사를 망칠 수 있고, 이를 막아야 하는 이사회도 제구실을 못한다.” -국민연금 같은 기관투자가들이 제구실을 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은데. “한국은 국내 시장참여자들이 제구실을 안 하는 것 같다. 석유화학과 철강업종이 바닥 상황일 때 한국과 중국 증권사의 투자자 리포트를 분석한 적이 있다. 중국 리포트는 70~80%가 주식 매각(Sell)을 권유했다. 하지만 한국 증권사 리포트는 90% 이상이 주식 매수(Buy)를 권유했고, 나머지 10%도 주식 보유(Hold)였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한국은 수십년간 이런 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기자가 아는 자산운용사의 임원은 주총에서 회사에 찬성 의결권을 행사하라는 압력 때문에 고민이라고 털어놓더라. “이해관계 때문에 투자자들의 돈을 받아서 운용하는 사람들이 독립적인 결정을 못하는 것은 선진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소외되는 것도 문제다. 일본의 평균 외국인 지분율은 30% 정도다. 한국은 40% 정도로 훨씬 높다. 삼성전자 등 대표기업들의 외국인 지분은 50%를 넘는다. 그리고 외국인은 모두 세계적인 투자자들이다. 한국의 대기업은 글로벌 기업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외국인 주주들에 대해서도 제 대접을 해달라고 요구하면, ‘여기는 한국이다’라며 딴소리를 한다.” -제도적 측면에서 개선과제는? “한국 상법은 주주권이 너무 약해 개선이 필요하다. 앞서 중국은 투자, 차입, 내부거래 등을 모두 주총에서 결정한다고 소개한 것과 대조적이다.” -2003년 이후 외국계 헤지펀드의 한국 기업 공격이 소버린, 칼아이칸, 헤르메스에 이어 엘리엇이 네번째다. 해당 재벌이나, 한국의 보수언론과 학자들은 단기차익을 노리는 먹튀자본으로 공격하는데? “시장에서 투자자들이 이익을 얻는 방법은 다양하다. 헤지펀드는 자신들이 잘하는 방법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들이 불법을 한 게 아니지 않은가? 사실 헤지펀드라고 다 단기 투자자도 아니다. 10~20년씩 투자를 하기도 한다. 한국 재벌은 내수 기업이 아니라 글로벌 기업이다. 글로벌 시장에 진출해 글로벌 고객과 거래업체, 이해관계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국제 규범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이것이 싫다면 한국 내수시장에서만 장사를 하면 된다.” -한국 기업들이 헤지펀드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주주친화경영을 통해 헤지펀드가 아닌 나머지 장기투자 성향의 투자자들에게 신뢰를 받으면 된다. 그 방법밖에 없다. 펀드들은 보수적이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현 경영진을 교체하기를 원하지 않고, 회사 경영에서 급격한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웬만하면 경영진을 신뢰하고 지지한다. 그런데 재벌이나 한국 언론은 외국인 투자자들을 모두 엘리엇과 동일시하면서 적으로 돌리고 있다. 큰 잘못이다.” -전경련 등 일부 경제단체들은 헤지펀드의 공격으로 경영권 불안이 커지고 있다며 황금주, 포이즌필(신주인수 선택권), 복수의결권제도 도입 등을 주장하는데? “포이즌필은 일본 등 극소수 나라에만 있다. 황금주나 복수의결권도 스웨덴이나 미국 등 일부에만 있다. 국제적으로 일반화된 제도들이 아니다. 가장 좋은 방어수단은 주주친화경영을 하는 것이다.” 3세 승계와 주주친화경영 -재벌 계열사 합병의 공정성 논란은 총수 일가의 지배력 강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국 재벌은 3세 승계 차원에서 지배력 강화 과제를 안고 있다. 다른 한국 재벌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3세 승계도 하면서, 주주친화경영도 하는 방안은? “일반 주주들 입장에서도 경영권 안정을 위한 지배력 강화는 필요하다. 경영권이 불안하면 경영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경영 승계를 위한 구조개편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개편을 하되 취할 것은 취하고(경영권 안정), 줄 것은 주라(주주친화경영)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조개편은 합법적이어야 하고, 지배주주 이외의 나머지 주주들의 이익을 훼손해서는 안 되며, 구조개편이 끝난 뒤 회사가 지금보다 좋아져야 한다(시너지 효과)는 세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을 하게 됐나? “처음에는 은행에서 일을 시작했다가 베어링증권으로 옮겨서 애널리스트로 10년 이상 근무했다. 베어링이 망한 뒤에 샐러먼스미스바니증권으로 옮겨서 일하다가, 다시 홍콩에 있는 지배구조 관련 비영리단체(NGO)를 거쳐 2009년부터 네덜란드연기금에서 일하고 있다.” -연기금의 지속가능성과 지배구조 관련 업무를 하면서 남다른 자부심이 있을 것 같다. “(긍정의 웃음을 지으며) 은행에서 일할 때는 모든 잣대는 돈이라는 한가지였다. 하지만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 않나.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싶었다. 배운 것이 금융이니 금융시장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었다. 지배구조와 지속가능성은 사회에 이로운 것이고, 기업이 제대로 대처하면 기업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우리가 중시하는 인권경영은 사회적으로도 필요하지만, 기업으로서도 이를 무시하면 제대로 경영하기 힘든 세상이 됐다. 선진국 기업들의 경우 산업재해율이 높은 기업과는 거래를 기피할 정도다. 그런 인사이트를 투자 기업의 경영진에게 전해주면서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네덜란드연기금
네덜란드의 일반공무원과 교육공무원 280만여명의 연금을 관리하는 펀드다. 한국으로 치면 공무원연금과 교원연금을 합친 것이다. 운용 자산 규모가 2014년말 기준 4030억유로(한화 약 500조원)로 연기금에서는 유럽 2위, 세계 3위권이다.(우리나라 국민연금의 운용 자산 규모는 올해 4월말 현재 491조원이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주식, 채권은 물론 대체투자(지하철 같은 인프라 투자와 빌딩 같은 부동산 투자 등을 합친 개념)를 하고 있다. 투자기업의 재무적 측면뿐만 아니라 비재무적인 환경(Environmental)·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 등의 세 요소(ESG)까지 고려하는 사회책임투자 원칙을 지키고 있다. 아시아권에서는 중국의 투자 규모가 가장 크다. 한국에도 100여개 기업에 2조원 정도를 투자하고 있는데, 삼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40%에 이른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