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2월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 의혹 사건’ 항소심 선고를 받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항소심에서는 징역 3년이 선고됐지만 7월16일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해 다시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지난 23일 새정치민주연합은 원세훈 전 원장의 재임 시절 국정원 해킹 의혹과 관련해 그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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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원세훈의 시간, 4년 1개월
▶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다시 검찰에 고발됐다. 원 전 원장이 검찰의 수사선상에 오르는 것은 이번이 세번째다. 2013년 6월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것이 시작이었다. 같은 해 7월에는 건설업체 대표에게 1억6900여만원을 받아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그리고 23일 국정원 해킹 의혹으로 다시 고발됐다. 세 사건 모두 그가 국정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의 일이다. 도대체 그 시절 국정원에선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7월16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및 국정원법 위반 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판결문에 ‘피고인 원세훈을 위하여’ 이름을 올린 변호사는 모두 11명이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도 변호인 명단에 포함됐다.
양과 질이 모두 뛰어난 변호인단 덕인지 대법원의 눈치보기 탓인지 알 순 없지만 이날 재판에서 원 전 원장의 유무죄는 확정되지 않았다. 대법원은 ‘원 전 원장이 공직선거법을 위반했다는 항소심 판결은 증거능력이 없는 파일 내용을 근거로 내려진 것’이라는 취지로 원심을 파기해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피고인 원세훈’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좋은 일에는 언제나 마가 낀다는 속담처럼 원 전 원장의 앞길이 순탄해 보이지는 않는다.
2013년 1월에도 거짓말을 했다
원 전 원장의 대법원 판결이 있기 열흘쯤 전인 7월5일(현지시각) 이탈리아 밀라노의 정보기술(IT) 업체 ‘해킹팀’의 자료가 유출됐다. 해킹을 당해 400기가바이트가량의 자료가 공개된 것이다. 독재국가 등에 감시 프로그램을 팔아 악명이 높던 이 업체의 고객 중에는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5163부대’. 국정원의 다른 명칭이다. 국정원은 이 업체에서 아르시에스(RCS)라는 해킹 프로그램을 구매했다.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 의혹이 불거졌고 사건의 파장은 점차 커졌다. 또다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구입 시기가 원 전 원장이 재임할 때인 2012년이기 때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23일 원 전 원장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 등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그는 구속된 상태에서 다시 검찰 수사를 받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국정원은 “내국인은 해킹하지 않았다”며 ‘국정원 직원 일동’ 명의의 성명까지 내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국정원을 쉽게 믿을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과거 때문이다. 굳이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2013년 1월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이 불거졌을 때 국정원은 “정치적인 게시글을 쓴 적이 없다”고 여러 차례 해명했다. 거짓이었다. 결국 원 전 원장은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지난 2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형이 선고돼 5개월 넘게 서울구치소에서 생활하고 있다. 앞서 개인비리 혐의로 1년2개월을 감옥에서 지낸 것을 합치면 구속기간은 총 1년7개월로 늘어난다. 지난해에는 국정원이 검찰과 법원에 제출한 증거서류마저 조작한 사실이 드러났다. “설마 국가기관이 내국인을 해킹했겠느냐”는 의문은 ‘국가기관이 서류를 위조해 법정에 냈다’는 사실 앞에서 무너진다.
불신의 또 다른 이유는 원세훈 전 원장에게 있다. 원 전 원장 재임 중 국정원에서는 ‘어떤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구심 때문이다. 그는 2009년 2월부터 2013년 3월까지 4년1개월간 국정원장으로 일했다. 국정원 안팎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4년 동안 국정원은 ‘상식’과 거리가 먼 조직이었다. 국가기관이 노골적으로 특정 정치세력의 편을 들어 활동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원세훈 국정원장 지시·강조 말씀’을 보면 이런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야당이 되지 않는 소리 하면 강에 처박아야지”(2012년 2월17일), “서울의 경우 비정당, 비한나라당 후보가 시장(박원순 시장)이 됐는데 그쪽에서 내놓은 것이 문제”(2011년 11월18일), “어쨌든 선거에는 (야당이) 단일화해라 하는 게 북한의 지령이라고, 북한 지령대로 움직이는 건 결국은 뭐 종북단체”(2010년 4월16일).
국정원 각 차장들과 기조실장, 전국 지부장들이 모인 ‘전 부서장 회의’ 등에서 원 전 원장이 한 말들이다. 그는 당시 한나라당에 불리한 것에는 모조리 ‘종북’과 ‘좌파’ 딱지를 붙였다. 그리고 국정원 직원들에게도 자신이 딱지를 붙인 상대를 증오하길 원한 것으로 보인다. 원 전 원장이 취임한 뒤 새로 생긴 행사 중 하나가 ‘헌법수호대회’였다고 한다. 국정원 직원 대부분은 매년 이 행사에 참가해야 했다. 말이 좋아 헌법수호대회지, 종북과 좌파를 상대로 한 직원들의 분노를 키우는 자리였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 한 국정원 직원은 “조별 발표 같은 것을 하는데 1970년대 머리띠 두르고 웅변하는 자리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국정원의 종북과 좌파 개념이 일반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국정원이 작성한 ‘서울시장의 좌편향 시정운영 실태 및 대응 방향’ ‘좌파의 등록금 주장 허구성 전파’ 등 문서를 보면 국정원은 박원순 서울시장이나 반값 등록금을 주장하는 대학생들을 좌파로 인식해 공격하는 계획을 세우는 모습을 보인다.
개인비리-공직선거법 위반 이어해킹 의혹으로 세번째 검찰 수사
재임 4년간 인사전횡, 공포정치
‘비판 상대 증오하라’는 명령은
이제 직원들 습관으로 굳어진듯 원장 취임뒤 ‘헌법수호대회’ 신설
종북과 좌파를 상대로 직원들의
분노 키우는 웅변대회 같은 자리
서울시정과 등록금 인상 주장도
좌파 딱지 붙이고 공격하게 해 비리혐의 구속, 국정원 직원의 제보? 원세훈 전 원장의 편향적인 국정원 운영은 당연히 반발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이 시작됐던 2013년 2월 한 국정원 간부는 “댓글 논란은 모르겠지만 나도 원세훈은 구속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정원 활동의 불법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자신의 입맛대로만 국정원을 운영하는 원 전 원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원 전 원장이 재임하던 때 나온 말이다. 심지어 원 전 원장이 건설업체에서 1억6900여만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데는 국정원 직원의 제보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후문도 돌았다. 하지만 공포정치 앞에서 직원들은 무기력했다. “4·3항쟁은 정부가 잘못한 측면이 있다”고 말한 대공수사국의 고위 간부(2급)는 대기발령을 받았다. 수사국에서 ‘전설’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또 다른 수사국 간부(4급)는 “보고서 제목을 ‘지난 좌파정권 10년’에서 ‘지난 정권 10년’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했다는 이유로 지역으로 좌천됐다고 한다.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원 전 원장의 이런 인사는 국정원이 그토록 강조하는 국가안보나 정보역량 등은 고려하지 않은 채 이뤄졌다. 그는 2009년 취임한 직후 국외파트 직원 수십명을 일제히 불러들여 자신의 구미에 맞는 인사들로 바꿨다고 한다. 국외파트는 인사 등에서 유리한 부서이기 때문이었다. 베테랑들을 잃은 국외파트의 정보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국외파트의 정보력이 떨어지자 대북정보 수집도 어려워졌다. 국정원이 대부분 외국을 거쳐 북한과 관련한 첩보를 입수해왔기 때문이다. 원 전 원장 때 각종 대북정보 수집에 번번이 실패한 것도 국외파트 붕괴가 그 원인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채찍에는 당근도 따랐다. 하지만 당근을 얻는 것은 원 전 원장의 심복인 극소수뿐이었다. 원 전 원장은 대선 하루 전날인 2012년 12월18일 자신이 서울시 부시장이던 때 서울시를 담당했던 국정원 정보관 이아무개씨 등을 비롯한 측근들을 승진시켰다. 대선 전날 국정원 인사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반면 이명박 정부가 2009년 12월 아랍에미리트에서 186억달러 규모의 원전을 수출하는 데 기여한 직원들에게는 어떤 포상도 없었다고 한다. 한 전직 국정원 관계자는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출에는 국정원이 큰 기여를 했다. 많은 직원들이 정말 열심히 뛰었다. 그런데 누구에게도 포상이 없었다고 한다. 원 전 원장이 ‘국정원이 기여했다는 말을 절대 하지 말라’고 단속한 것으로 안다. 모든 공이 대통령에게 가야 한다는 이유였다”고 말했다. “원 전 원장은 국정원을 자기와 대통령 개인 소유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한 국정원 직원의 말이다. 원 전 원장 재임 때 이뤄진 많은 일이 그 증거로 남았다. 원 전 원장은 국정원장 특수활동비 200만달러를 미국 스탠퍼드대학 부설 연구소에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 전 원장은 이 대학의 한국학연구소 과정을 거친 바 있다. 또 퇴임 뒤 이 대학의 객원연구원으로 갈 계획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 관계자는 “어떤 대학인지는 확인해주기 힘들지만 국정원장 특수활동비 200만달러가 미국에 있는 대학으로 간 것은 맞다”고 사실을 일부 인정했다. 원 전 원장이 퇴임 직전 국정원의 국외 안가를 전직 국정원장도 쓸 수 있도록 내부 규정을 손봤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한 국정원 관계자는 “(안가 사용과 관련해) 알려진 내용은 일부 틀린 부분이 있다. 하지만 원 전 원장이 전직 국정원장의 편의를 보장해주는 여러 조항을 수정한 것은 맞다. 남재준 원장이 취임한 뒤 모두 원상태로 돌려놨다”고 설명했다. 원 전 원장이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국정원장 공관이 아닌 서울 강남구 도곡동 안가로 거처를 옮기려고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2011년 원 전 원장은 국정원 산하 연구소가 입주한 도곡동 건물 일부를 개조해 가족들과 함께 사용하려고 했다. 이런 사실이 드러나자 국회에서 논란이 일었다. 정보기관의 수장이 공관을 두고 보안이 취약한 건물에 사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정원은 “공관이 낡아 수리가 필요했다. 잠시 거주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원 전 원장이 입주하기 전 도곡동 건물은 새 단장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거용으로 건물 내부 공사가 이뤄졌고 가구와 전자제품도 모두 새로 들여온 것으로 전해졌다. 원 전 원장이 당분간만 거주하기 위해 도곡동으로 이사를 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한 국정원 직원은 “애초에 도곡동 건물로 이사를 준비했다. 내곡동은 주변에 편의시설도 없고 적막한 분위기라 원 전 원장과 가족들이 도곡동 쪽으로 이사를 원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조직이 사유화되면 시스템의 통제가 사라진다. 결국 일인자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건 해야 하거나 할 수밖에 없다. 내국인 상대 해킹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이 쓴 글에서도 이런 징후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2012년 6월13일 검찰이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사찰 사건 재수사 결과를 발표하자 이틀 뒤 트위터에 ‘사찰 대상이 문제이지 사찰 자체는 문제가 아니고 과거 정부와 달리 반역세력을 사찰하는 것인데 무슨 문제냐’는 취지의 글을 남겼다. ‘차단의 원칙’ 어긴 직원 일동의 성명 4년1개월 동안 인사 전횡, 공포정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비판 상대를 증오하라는 원 전 원장의 ‘명령’은 이제 직원들의 ‘습관’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국가를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고 믿는 정보요원들에게 동료의 죽음은 무엇보다 큰 절망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해킹 프로그램 구매와 관리를 담당했던 국정원 직원 임아무개(45)씨가 18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나온 ‘국정원 직원 일동’ 명의의 성명에 담긴 것은 애도가 아니었다. 이 성명은 야당을 비롯해 국정원 해킹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을 상대로 한 노골적인 증오로 가득 차 있다. “정치권과 일부 언론의 무차별적 매도에 분노” “자국의 정보기관을 나쁜 기관으로 매도하기 위해 매일 근거 없는 의혹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나라” “10일 넘게 백해무익한 논란이 지속” “그의 죽음을 정치적 공세를 이어가는 소재로 삼는 개탄스런 현상” “국정원이 약화되어도 상관없다는 위험하고 무책임한 발상” 등 증오에 찬 문구들이 성명을 가득 메웠다. 국정원 직원들이 이런 성명을 쓰는 일은 불가능하다. 국정원에는 ‘차단의 원칙’이라는 절대규칙이 있다. 다른 직원이 하는 일을 알아서도, 알고 싶어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부서에 있는 직원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모든 부서와 업무, 정보요원들 사이에는 칸막이가 쳐진다. 성명에서 임씨는 “2012년도 문제의 해킹 프로그램 구입을 실무 판단하고 주도한 사이버 전문 기술직원”이라고 표현됐다. 국정원 직원들은 이런 임씨의 업무를 알 방법이 없다. 국정원 직원들은 임씨가 어떤 자료를 삭제했는지, 그 자료를 삭제한 이유가 무엇인지 등도 알 권한이 없다. “사이버 작전은 극도의 보안이 요구”된다거나 “그 직원의 극단적인 선택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이라는 내용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이버 작전이 진행돼 보안이 필요한지, 임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국정원 직원 일동은 알 수 없다. 따라서 국정원 직원 일동이 쓴 이 성명에 나온 내용은 믿을만하지 않다. 하지만 이 성명에 담긴 국정원 직원들의 증오만은 진짜로 보인다. 원 전 원장이 국정원을 자신의 뜻대로 바꾼 가장 성공한 국정원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의 그림자가 아직 국정원에 어려 보이기 때문이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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