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 도쿄도 스미다구 일본 법원 앞에서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의 혜문 대표(가운데)와 ‘불교문화재 제자리찾기운동’의 상임대표인 영담 스님(왼쪽 둘째)이 평양 율리사지 석탑의 반환을 요구하는 펼침막을 들고 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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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남북 힘 모은 평양석탑 반환운동
▶ 일제강점기 약탈당한 우리 문화재 반환운동이 수년 동안 벌어져왔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문명의 양심과 지성에 호소하는 방식이었는데요. 이제 좀 달라지는 분위기입니다. 일본 법원에 반환 소송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호텔 오쿠라에 있는 평양 율리사지 석탑 반환을 위해 북한이 소송을 제기했는데 남한의 시민단체가 돕고 있습니다. 총련도 지원사격에 나섰다고 하는데 그 현장을 찾아가보았습니다.
“젯타이 하이레마센.”(절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친절하지만 단호했다. 16일 오후 일본 도쿄 미나토구의 미국 대사관 앞에 자리한 오쿠라 호텔 앞에 출입 차단 시설이 놓여 있었고 경비가 막아섰다. 잠시만 안에 들어가 탑의 위치만 확인하고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경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본 특유의 원칙주의인 것인지, 한국에서 찾아온 기자를 경계하는 것인지 속내는 알 수 없다. 포클레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호텔 앞 부지를 파헤치고 있었다.
오쿠라 호텔은 일본을 대표하는 호텔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 미국 가수 마이클 잭슨 등이 이곳에 머물렀다.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재개장을 하기 위해 한창 공사중이다. 그러나 이 호텔은 남북한의 국민에게는 일제 문화재 약탈의 현장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유물인 이천 오층석탑(이천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오층석탑(평양석탑)이 지난 4월까지 이 호텔 앞 ‘오쿠라 슈코칸’(오쿠라 사립박물관) 정원의 장식품으로 놓여 있었다. 남북한 사회 모두 이 탑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지금은 호텔 쪽이 석탑을 해체해 어딘가에 보관하고 있다.
‘북관대첩비’ 이후 첫 반환협력사업
탑의 존재와 탑이 있던 자리를 살펴보기 위한 방문은 헛걸음이 되었다. 마침 호텔 앞을 지나가던 20대 일본 여성 직장인에게 ‘호텔이 소유한 고려 석탑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여성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뭣 때문에 이제 와서 돌려 달라 하는 거지요?” 여성은 강탈해 온 문화재라는 것을 몰랐다.
-이것은 강제로 가져온 겁니다.(기자)“아, 그렇습니까?”(여성)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라 그 고장의 정신 같은 것인데….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돌려주는 것이 어떤가요?”
-오쿠라 호텔 외에도 다른 곳에 이러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아, 그런 문제인가요. 이곳을 매일 지나다니지만 아직까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차라리 반환받아 가져가는 것보다 이곳에 두어 일본 사람들이 빼앗아 온 조선 문화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건 어떤가요?”
-하지만 조선 사람들의 심정이…. 통역을 맡은 총련계 재일동포 량대륭(42·재일동포 3세)씨는 “일본의 학교는 메이지유신(1868년 일본 근대 개혁) 이후의 현대사에 대해서는 잘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10% 정도의 사람들만 아시아 각지에서 일본이 약탈해 온 문화재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재 약탈과 관련해 오쿠라 호텔이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북쪽의 조선불교도연맹(서기장 차금철)이 최근 평양석탑의 반환을 오쿠라 문화재단 쪽에 공식 요청하고 지난 7월22일부터 일본에서 법원 조정절차에 돌입했다. 남쪽의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가 통일부의 허가를 받고 이들의 소송을 대리하고 있다. 남과 북이 2005년 힘을 모아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돼 있던 북관대첩비(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왜군을 크게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숙종이 세운 비를 일제 때 일본군이 가져감)를 되찾아왔던 사건 이후 남북의 첫 문화재 반환 협력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법정 싸움에서 만약 오쿠라 쪽이 진다면 일본 곳곳에서 문화재 반환 소송이 줄을 이을 수 있다. 지금까지는 명분에 호소해 문화재를 되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문화재 반환 운동을 하는 시민단체는 이제 약탈 근거가 명확한 문화재에 대해서는 반환 소송 전략을 쓰겠다는 입장이다. 남과 북, 일본 당국이 모두 일본 법원의 결정에 주목하고 있다. 오쿠라 호텔은 오쿠라 재벌의 창립자 오쿠라 기하치로(1837~1928)가 설립자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진출에 앞장섰고 무역과 군수업, 건설업에 진출했다. 덕수궁 석조전은 오쿠라 기하치로가 세운 회사 ‘오쿠라구미’가 담당하여 준공했고,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 때 지반공사에 사용된 재료들도 오쿠라구미가 공급한 목재였다. 서울 용산의 선린상업학교(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의 설립자도 오쿠라 기하치로다. 그는 조선과 중국 등지에서 많은 유물을 수집하기도 했는데 불법과 합법적인 방식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현재의 오쿠라 호텔 부지 앞에 1909년 최초의 사립 박물관을 세웠고 조선에서 반출해 간 유물을 전시했다. 경복궁의 자선당(세자와 세자빈의 침전)을 통째로 옮겨다 ‘조선관’으로 삼아 1917년 일반에 공개하기도 했다. 자선당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소실됐다. 바로 이 오쿠라 박물관의 정원에 남한의 이천 오층석탑과 북한의 평양 율리사지 오층석탑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것이 어떤 탑인지 설명하는 안내문도 없었지만 이곳을 다녀간 남북의 학자들은 <조선고적도보>(일본 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1915~35년 우리나라 각종 유물의 사진을 모아 발간한 책)에 근거해 이 탑이 어디서 온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이천석탑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었다. 2006년 이천 시민들이 환수위원회를 구성해 수년간 반환 협상을 진행했고 오쿠라 문화재단은 1억5000만엔(약 14억원) 상당의 문화재와 교환하자는 요구를 해 협상이 결렬된 바 있다. 반면, 평양 율리사지 석탑은 북쪽이 그간 반환 시도를 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 두 탑은 모두 8각형의 돌을 쌓아 올린 석탑으로 평양석탑은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은 북방형, 이천석탑은 남방형으로서 한반도 탑 양식의 두가지 큰 갈래를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는 탑들이라는 게 문화재 환수 운동을 오랫동안 벌여온 혜문 대표의 설명이다. 특히 평양석탑은 기단부가 연화대좌(연꽃 모양의 불상 놓는 자리)와 같은 형식을 취해 희귀성이 강하고 보물급 유물로 평가된다. 이천석탑은 3월 일본에서 지진이 났을 때 여파로 석탑 4층 몸체 부분이 파손되고, 탑 전체가 뒤틀려 보수를 하기도 했다. 일본 대표하는 오쿠라 호텔에
고려시대 석탑 두 개가 있다
북한이 남쪽 시민단체와 함께
석탑 반환 법정 싸움 진행중
문화재 반환운동 새 길 열릴까 16일 오쿠라 호텔 찾았지만
석탑 어딘가로 옮겨져 없고
호텔쪽은 예민해하는 모습
혜문 “석탑 유출 경위 설명
안하는 건 불법 유출 아는 것” “만경봉호에 석탑 싣고 북일관계 회복” 오쿠라 박물관 정원에 왜 두개의 고려시대 석탑이 오게 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오쿠라 문화재단 쪽은 명확한 근거를 대지 않고 있다. 다만 조선총독부가 이천석탑의 반출을 허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있는데, 조선총독부는 오쿠라 쪽이 평양정거장 앞에 놓여 있던 칠층석탑의 일본 반출을 요청한 것을 거절하며 대신 경복궁에 보관중이던 이천 오층석탑을 가져가라고 권했다. “(이천석탑은) 제작상 특이한 점이 없을 뿐 아니라… (중략) 박물관에 보존하여 진열품의 하나로 헤아림은 적당하지 못한 감이 있다”(조선총독부 문서, <한국탑파연구자료>에서 재인용)는 이유에서였다. 이로 미루어 이천석탑은, 비록 비윤리적일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당시 행정부의 승인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평양 율리사지 석탑과 관련해서는 어떤 반출 경위 기록도 없다. 현재 평양의 율리사는 흔적만 있을 뿐 실제 사찰은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도 풀만 무성한 곳에 석탑만 덩그러니 있던 곳이기에 도굴꾼이 가져가기 쉬웠을 것이다. 율리사 사찰이 없었기에 당시 주지가 있었을 리도 없고 주지승이 오쿠라 쪽에 선물로 주거나 팔았을 가능성도 없다는 게 혜문 대표의 생각이다. <한겨레>는 오쿠라 문화재단 쪽에 평양석탑의 반출 경위를 묻고자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재단은 거절했다. 시부야 오쿠라 박물관 부관장은 17일 통화에서 ‘평양석탑의 합법적 입수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있느냐’는 질문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재차 ‘그것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 석탑을 어느 곳에 보관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도 “말할 수 없다”고 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혜문 대표는 “2011년 변호사와 함께 오사키 이와오 오쿠라 문화재단 이사장을 만나 ‘약탈한 문화재를 돌려달라’고 말하자 오사키 이사장은 들고 있던 문서를 집어던지며 ‘나가라’고 화를 냈다. 일본인은 화를 내는 경우가 잘 없는데 그러한 강경한 태도를 보고 이들이 문화재 반출 경위가 떳떳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비쳤다”고 말했다. 반환운동이 사실상 사그라든 이천석탑에 비해 평양석탑은 명분 면에서 좀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천석탑은 남쪽의 문화재이기에 1965년 한일협정에 의거해 환수 주장을 해야 한다. 한일협정 뒤에 4479점의 반출 문화재 중 1432점을 ‘인도’라는 용어로 반환받았다. 그러나 일본 민간인이 갖고 있는 반출 문화재는 일본 정부가 기증을 권고할 수 있다는 합의 의사록만 별도로 작성하는 데 그쳤다. 오쿠라 호텔이 안 주면 그만이다. 혜문 대표가 지난 2월 오구라 컬렉션을 소장한 도쿄 국립박물관을 대상으로 소장품 소장을 중지하라는 내용의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도쿄지방재판소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완전히 최종적으로 타결된 문제이므로 반환 의무가 없다’고 판결했다. 남쪽의 문화재는 한일협정이 발목을 잡아 일본 쪽의 추가적인 선의에 기대어 반환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그러나 2002년 평양선언 때(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총리의 정상회담 합의) 북한과 일본은 ‘일본이 강탈한 문화재 반환을 협의한다’고 선언했다. 국가간 협정은 아니지만 양국 정상의 선언이기에 정치적 의미는 매우 크다. 이 때문에 최소한 평양석탑 반환 문제에 대해서는 소송으로 가져가도 붙어볼 만하다는 게 혜문 대표와 조선불교도연맹의 판단이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장 허종만)는 북쪽 당국과 협력해 평양석탑의 반환 운동에 총력을 기울일 태세다. 16일 혜문 대표는 통일부에 접촉 승인을 받고 차금철 서기장을 대신해 허종만 총련 의장을 만났다. 허종만 의장은 “총련이 단순히 협력하는 수준을 넘어 주요 사업으로 인식하고 반환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총련은 평양석탑의 반환이 민족 정기를 회복하고 북-일 관계를 회복하는 데 하나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총련계 활동가 량대륭씨는 “일본과 조선(북한)이 지금 아무런 교류를 못하고 있지만 평양석탑을 만경봉호(북한 원산항과 일본 니가타항을 오가던 여객선이지만 북-일 교류가 단절돼 운영이 중지됨)에 실어 북으로 돌려보낸다면 서로 대화의 싹이 틀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오쿠라호텔에 있던 평양 율리사지 석탑. 문화재제자리찾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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