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뉴스분석 왜?
일본 역사교과서의 역사
▶ 박근혜 정권이 추진하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에 대해 일본 시민사회가 “우려스럽다”는 의견을 쏟아내고 있다. 이들의 반대 이유를 알기 위해 일본이 1903년부터 시행한 소학교(초등학교) 교과서 국정화의 흐름과 그렇게 만들어진 교과서의 내용을 들여다봤다.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교과서를 통해 국민의 정신을 지배하고, 무모한 침략전쟁으로 젊은이들을 내몬 일본 정부의 검은 속셈이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한 건의 우연한 분실 사고였다.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 등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대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가던 1902년 11월의 어떤 날이었다. 도쿄 시나가와역 주변을 지나던 한 주민이 논밭에 떨어져 있는 가죽가방을 하나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가방 안에는 수첩 한개와 당시 대형 교과서 출판사였던 ‘보급(후큐)사’의 사장이었던 야마다 데이자부로(1871~1930)의 명함이 들어 있었다. 경찰엔 이미 야마다로부터 가방을 잃어버렸다는 분실 신고가 접수된 상황이었으니, 가방은 틀림없는 야마다의 것이었다.
가방을 받아 든 담당 경찰은 호기심에 수첩을 펼쳐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한국의 광역자치단체장에 해당하는 일본 각 현의 지사, 시학관(장학관), 그 밖의 교육 관계자의 이름, 바로 옆엔 돈의 액수를 적시하고 있는 것 같은 작은 숫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를 보고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은 담당자는 경시청(도쿄도 경찰)에, 경시청은 도쿄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이 사실을 통보했다. 한달 정도에 걸친 내사를 진행한 검찰은 그해 12월17일 이번 사건을 교과서 출판사들이 교과서 채택 권한을 가진 교육 관계자들에게 대규모 뇌물을 상납한 것으로 규정하고, 사건을 공개수사로 전환하게 된다. 이후 일본 정·관계를 뒤흔드는 대형 뇌물 스캔들로 발전하게 되는 ‘교과서 의옥(疑獄·뇌물) 사건’의 시작이었다.
수신·역사·국어부터 국정화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부는 1887년 5월 ‘교과용 도서 검정규칙’ 제정 이래 16년 동안 유지해 오던 소학교(초등학교) 교과서의 검정제도를 철폐하고 본격적인 국정화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명분은 물론 ‘국민의 정신을 통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교과서 채택을 둘러싼 업계의 비리를 일소한다’는 것이었다.
지난 12일 한국 정부가 2017년부터 중·고등학교에서 쓰이게 될 한국사 교과서를 유신 시절 도입됐던 국정제로 회귀하겠다고 밝힌 뒤, 이를 우려하는 일본 시민사회의 격렬한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위험한 교과서를 아이들에게 건네지 말자, 오사카 모임’ 등 일본의 24개 교과서·역사 관련 시민단체들은 16일 성명에서 “과거 일본은 러일전쟁 직전인 1903년부터 패전한 1945년까지 42년 동안 국정화 교과서를 사용했고, 그 결과 많은 일본인들이 침략전쟁을 ‘성전’이라고 믿으며 아시아인들을 살육했다”고 지적했다. 일본 <아사히신문>도 19일 사설에서 “민주화 이후 30년 정도가 지난 한국은 다양한 가치관이 존재하는 선진국이다. 왜 역사 교과서만을 국정화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박근혜 정부를 에둘러 비난했다.
일본의 시민사회는 왜 한국의 교과서 제도에 큰 관심과 우려를 밝히고 있을까. 그 배경엔 일본인들이 옛 군국주의 시절에 겪은 쓰라린 경험이 있다.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이 1982년 5월 방영한 다큐멘터리 ‘메이지 교과서 의옥 사건, 국정화로 가는 길’을 보면, 일본 정부가 교과서 의옥 사건을 활용해 교과서 국정화를 주도면밀하게 관철해 나가는 과정이 묘사돼 있다.
검찰이 사건을 공개수사로 전환한 지 한달이 못 된 1903년 1월9일 교과서 국정화 안이 각의에 제출되고, 이어 석달 뒤인 4월13일 소학교령이 개정돼 수신·일본역사·지리·국어 등 4과목의 국정화가 입법화됐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이었다. 당시 일본 국회에서 정부의 이 같은 움직임을 반대한 의원은 네모토 쇼(1851~1933)가 유일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일본의 교과서 국정화를 지휘한 이는 메이지 시기의 군인 고다마 겐타로(1852~1906)였다. 그는 사건 발생 직전인 1902년 9월18일 가쓰라 다로(1848~1913·조선 강제병합 당시의 총리) 총리에게 교과서계에 만연된 뇌물 비리 적발을 서두르라는 편지를 보냈다. 뇌물 사건 적발을 계기로 국정화 방침이 확정되자 그는 1903년 7월 가쓰라 내각의 내무대신과 문부대신을 겸임하며 교과서 국정화를 본격 지휘해 나간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교과서 국정화와 전쟁 수행을 위한 ‘충량한 황국신민의 양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 일본의 교과서는 국민 정신 개조를 위한 도구로 변해간다. 일본이 가장 먼저 국정화를 추진한 과목이 인간의 사상과 관련되는 수신·역사·국어 등의 과목이라는 사실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와 함께 기존 검정제 교과서의 내용이 대폭 수정되기 시작한다. 시가대학 부속도서관이 2006년 11월 펴낸 <근대 일본의 교과서의 발자취-메이지기부터 현재까지>를 보면 “그동안 많은 검정 교과서가 신대(神代: 일본의 역사에서 신화의 시대에 해당되는 시기)를 생략해왔지만, 국정 교과서에선 일부러 신대부터 시작하는 역사교육을 부활시켰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일본의 아이들이 자국의 역사를 석기시대라는 ‘고고학적 사실’이 아니라 “(일본의 창조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는 우리 천황 폐하의 선조”라는 ‘주관적인 신화’로부터 배우기 시작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전쟁 말기 사용된 <초등과 국사> 하권은 일본이 일으킨 만주사변과 대동아전쟁을 “동양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 정당화하며 “우리는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신민이 되어 천황 폐하를 위해 진력을 다해야 한다”는 호소로 끝을 맺고 있다. 이 같은 일왕 중심의 역사관은 야스쿠니 사상 등과 결합돼 “일본은 신국(神國)이기 때문에 절대 전쟁에 지지 않는다” “천황을 위해 죽어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맹목적인 국가관으로 이어져 갔다. 당시 일본 정부의 선전전이 얼마나 난폭했는지는 조선총독부가 발행하던 기관지 <매일신보>의 지면을 몇장만 들춰 보면 쉽게 감을 잡을 수 있다.
1902년 교과서 뇌물사건 활용해1945년까지 국정교과서 사용
석기시대 아닌 건국신화로 시작
맹목적 국가관으로 전쟁 미화
침략전쟁을 ‘성전’으로 믿게 해 일본 점령한 연합군사령부의
첫 조처는 기존 교과서에 있는
전쟁미담 먹물로 지우라는 명령
무늬만 검정제라는 비판 있지만
‘국정화’는 안된다는 합의 있어
미담 ‘수병의 엄마’가 수록된 옛 초등학교 5학년용 국어 교과서.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엄마의 편지에 눈물짓는 수병 이야기다. 그러나 실제 수병은 병약한 인물로 이 일화를 남긴 뒤 머잖아 가고시마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3년 뒤 숨진 것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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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군국 미담은 실제 현실을 교묘히 왜곡하거나 날조한 것이 많았다. 제1차 상하이 사변 때 폭탄을 짊어지고 적의 철조망 진지를 향해 육탄공격을 벌였다고 전해지는 육탄 3용사의 미담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효고현 오케스케산의 한 신사에 남아 있는 육탄 3용사 관련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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