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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2.04 20:12 수정 : 2015.12.05 18:14

지난달 26일 도쿄 지요다구 일본 프레스센터 9층 회견실에서 일본인 지식인들이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를 기소한 한국 검찰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왼쪽부터 야스오 요시노리 <교도통신> 전 서울특파원, 우에노 지즈코 도쿄대 명예교수, 와카미야 요시부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 나카자와 게이 호세이대 교수(작가), 고모리 요이치 도쿄대 교수. 사진 길윤형 특파원

[토요판] 뉴스분석 왜?
일본 리버럴과 ‘제국의 위안부’

▶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문제적 저서’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의가 한·일 양국의 지식인 사회를 들썩이게 만들고 있다. 지난달 26일 일본 지식인들이 한국 검찰의 기소 결정을 맹비판한 데 이어, 2일 한국의 지식인들도 논쟁에 가세했다. 일본 지식인들은 왜 박 교수를 지지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다 보면, 한국의 ‘지나친’ 일본 비판에 질려버려, 위안부 제도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포기해버린 일본 지식인 사회의 뒤틀린 모습을 만나게 된다.

지난달 26일 도쿄 지요다구 일본 프레스센터 9층.

잔뜩 흐린 날씨 때문인지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뚫고, 우에노 지즈코 도쿄대 명예교수, 고모리 요이치 도쿄대 교수, 와카미야 요시부미 전 <아사히신문>주필 등이 연단에 올랐다.

이날 기자회견은 최근 일본에선 좀처럼 열린 적이 없는 희귀한 행사였다. 일본 지식인들이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한국의 군사정권을 공개 비판하는 회견을 연 적은 많았지만, 민주화가 이뤄진 뒤 이 같은 행사를 연 적은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성명엔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과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까지 참여해 상당한 무게가 실렸다.

<제국의 위안부>
우에노 명예교수 등이 기자회견을 연 직접적인 계기는 박유하 세종대학교 교수의 ‘문제적 저서’ <제국의 위안부>(2013년)에 대한 한국 검찰의 기소 결정이었다. 이들은 성명에서 “서울동부지검이 박 교수를 ‘명예훼손죄’로 기소한 것에 대해 커다란 놀라움과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운을 뗀 뒤 “검찰청이라는 공권력이 특정 역사관을 기반으로 학문과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동을 취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한국에서도 박 교수의 저서를 둘러싸고 두 차례 치열한 논쟁이 진행돼왔다. 1차 논쟁은 지난해 6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이 책의 일부 표현이 자신들의 인격권을 침해했다며 법원에 출판금지 가처분 소송을 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였다. 논쟁의 층위는 실로 복잡다단했지만, 국가가 특정한 학문적 견해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게 바람직한지에 대한 논란이었다. 1차 논쟁에서 사회적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수면에 잠복해 있던 논란은 지난 2월 법원이 할머니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위안부들이 일본군과 동지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기술 등 34곳을 삭제하도록 결정한 뒤 재발됐고, 지난달 18일 검찰의 기소 결정 이후 다시 한번 불이 붙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태는 한국 사회에서 2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제국의 위안부>논쟁의 제3라운드라 부를 수 있다.

‘제국의 위안부’ 논쟁 제3라운드
검찰의 박유하 교수 기소결정에
일본 지식인들 비판 기자회견
‘아시아 여성기금’ 지지해온
와다 교수는 뜻밖에도 다른 목소리

조선인 위안부들은 일본군 병사와
동지의식 지닌 제국의 위안부였다?
와다 교수는 “그렇지 않다”는 입장
표현의 자유라는 표면적 논쟁 넘어
위안부 성격 탐구로 논의 확장해야

일본 진보의 균열을 다시 확인하다

3차 논쟁에선 그동안 1·2차 논쟁에서 볼 수 없었던 두 가지 특징이 확인된다. 첫째는 그동안 한국 내 논의를 지켜보고만 있던 일본 지식인 사회가 개입을 시도했다는 점, 둘째는 ‘학문의 자유’를 둘러싼 공방에서 머무르던 논의가 책의 구체적인 내용으로까지 심화·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변화를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게 일본 지식인들의 성명이다. 성명엔 크게 두 개의 내용이 담겨 있다. 첫번째는 ‘언론의 자유’라는 관점에 기초해 한국 검찰의 기소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검찰 기소가 할머니들의 고소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언정 바람직한 게 아니라는 데엔 한·일 양국 모두에서 별다른 이견이 없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성명이 밝히고 있는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인식이다.

성명을 보면 이번 성명을 주도한 지식인들이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대단한 ‘호의’를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성명에서 “(<제국의 위안부>는)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면적인 인식을 넘어 다양성을 제시함으로써 사태의 복잡성과 배경의 깊이를 포착하고 있다”며 “식민 지배를 통해 그러한 상황(위안부 문제)을 만들어낸 제국 일본의 근원적인 책임을 날카롭게 지적했을 뿐 위안부 문제로부터 등을 돌리고자 하는 논조에 가담하는 책이 아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제국의 위안부>의 중심 주장은 위안부들이 일본군과 “기본적으로 동지적 관계”였고, 일본을 위해 애국하려는 ‘제국의 위안부’였기에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책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이견이 존재한다”고 유보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결론적으로는 박 교수의 위안부 인식에 적극적인 지지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이번 성명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박 교수의 위안부 인식에 동의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명을 주도한 이들은 분명 그에 대한 지지자라 분류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성명 발표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갈가리 찢겨 있는 일본 진보의 균열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현상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일본의 진보진영은 1990년대 중반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을 둘러싸고 커다란 분열을 겪은 바 있다. 균열은 위안부 문제를 일본이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전쟁범죄라고 파악한 이들과 (그런 면도 있지만) 한-일 양국이 서둘러 해결해야 하는 외교적 과제로 본 이들 사이에서 발생했다.

직접적인 분열의 계기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으로 내놓은 ‘아시아 여성기금’(이후 기금)의 수용 여부였다. 당시 무라야마 정권은 한-일 간의 청구권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두 해결됐다는 인식 아래 일본 정부의 책임을 ‘법적 책임’이 아닌 ‘도덕적 책임’으로 한정했다. 그에 따라 일본 정부는 정부 예산이 아닌 기금을 통해 모은 모금으로 할머니 한 명에게 200만엔의 ‘쓰구나이킨’(속죄금)과 일본 총리의 사죄의 편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한국에선 3분의 2 이상의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며 기금 수령을 거부한다.

일본에서 전자를 상징하는 인물은 위안부 문제 연구의 1인자로 꼽히는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 교수다. 그는 지난해 6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기금을 만들 때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지급하는 ‘쓰구나이킨’에 정부 예산이 한푼도 쓰이지 않는다는 설명을 들은 뒤 “‘그렇게 하면 보상이 되는 게 아니죠’라고 반발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것(위안부 문제)이 중대한 인권 침해이고 일본군이 저지른 것이라면 적합한 대응을 해야 한다. ‘군이 인권 침해를 했으니 일본 정부가 보상해야 한다’고 국민에게 설명하고, ‘이를 위해 지혜를 모으자’고 얘기를 해야 했다”고 밝혔다.

오누마 교수와 와다 교수의 엇갈린 행보

이들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부인하는 박 교수의 저서에 비판적인 의견을 유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번 성명엔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이 부류에 속하는 인물들로는 요시미 교수, 우쓰미 아이코 오사카경제법과대학 특임교수, 다나카 히로시 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 등이 있다. 이들은 지금도 한국의 시민사회와 연대해 위안부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활동 중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인물은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다. 그는 1995년 7월 발족한 아시아 여성기금에 이사로 참여해 2007년 4월 종료 때까지 줄곧 기금을 지킨 기금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와다 명예교수는 지난 5월 펴낸 저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에서 당시 기금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그로 인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함께 지원했던 ‘동지’들과 결별하게 된 회한을 비교적 담담히 기술하고 있다. 그는 기금에 부정적이었던 야스에 료스케 <세카이>편집장 등 일본의 진보세력들이 “(법적 책임을 부인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는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 보고 화가 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금을 부정한 뒤 지금부터 최선을 다해 노력해서 더 바람직한 조처를 정부로부터 끌어내는 게 가능할 것인가라는 점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당시 무라야마 정권은 ‘고노 담화’에서 밝힌 역사 인식을 뒤엎으려는 보수 세력의 반격으로 풍전등화 같은 상황이었다. 와다 교수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일본 정부로부터 기금보다 더 좋은 안을 끌어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와 비슷한 입장을 가진 또 다른 인물로는 오누마 야스아키 메이지대 특임교수가 있다. 그는 7월 나온 저서 <역사인식은 무엇인가>에서 “모든 위안부와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지원단체, 한·일 두 나라, 학자, 나아가 국제사회를 모두 만족시키는 진정한 해결 따위는 있을 수 없다. 한·일 정부가 교섭을 거듭하고 서로 양보해 정부 간의 해결에 합의해야 한다. 그예 얼마 남지 않은 생존 위안부를 위해서도 한-일의 우호를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2007년 저서에선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쪽의 ‘지나친 요구’를 비판한 박 교수의 전작인 <화해를 위하여>를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오누마 교수는 이번 성명에 이름을 올렸다.

흥미로운 것은 (당연히 성명파로 분류되는) 와다 명예교수의 판단이다. 그는 성명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와다 명예교수는 이유를 묻는 <한겨레>의 질문에 “성명에 참가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박 교수의 책에 대해선 검토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할머니들의 마음이다. 양쪽이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기 바란다”고 말했다.

와다 교수는 성명 불참의 이유를 명확히 밝히진 않았지만 추측해볼 만한 대목은 있다. 그의 저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를 다시 보자. 그는 이 책에서 지금까지 일본에서 발견된 위안부와 관련된 공문서들을 간략히 둘러본 뒤 위안소 제도에 대해 “군부대가 스스로의 결정으로 업자에게 여성 모집을 의뢰해 건물을 고르고, 위안소를 신규로 건설해, 업자에게 영업을 위탁한 것이 가장 폭넓게 확인되는 방식”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후 그가 주목하는 것은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과 피식민지인 조선 사이의 차이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전선이 확대되며 일본군 내의 위안부 수요가 급증한다. 그 때문인지 1938년 1월 상하이 파견군의 의뢰를 받은 업자들이 ‘황군위안부 3000명’을 모집하기 위해 일본 각지를 헤집듯 쑤시기 시작한다. 이런 움직임은 즉각 일본 행정당국에 감지됐다. 이 같은 움직임에 소스라치게 놀란 군마현 지사는 정부에 “공공질서 양속에 반하는” 이런 사업이 “황군의 위신을 실추시킨다”며 단속을 요청했다. 그러자 내무성 경보국장이 1938년 2월23일 ‘지나(중국)도항부녀의 취급에 관한 건’이라는 통달을 관계기관에 내려보내 교통정리를 시도한다. 내무성은 (전쟁 수행을 위한 위안부 모집이라는) “특수한 사정을 고려해 실정에 맞는 조처를 강구”할 필요를 강조하며 ‘제국의 위신’과 ‘황국의 명예’가 손상되지 않고 ‘출정병사유가족’에게 악영향이 없도록 △일본에서 이미 매매춘에 종사했으며 △21살 이상이고 △친권자가 도항을 승낙하는 이들이 위안부로 도항할 수 있도록 협조할 것을 지시한다. 그러나 이 통달은 일본 국내용으로 식민지 조선엔 전달되지 않는다.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선 찬성 의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여름 <역사비평> 지면을 통해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역사 인식을 비판한 정영환 메이지학원대학 교수가 지난달 28일 도쿄 릿쿄대학에서 일본 시민들을 상대로 ‘뒤틀린 식민지 지배 책임: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비판’ 강연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길윤형 특파원

일본인 여성과 식민지 여성의 차이

위안부와 관련한 여러 공문서를 근거로 와다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일본에서 이뤄진 위안부 획득은 대체로 이 같은 형태로 이뤄졌다. 민간 업자가 맘대로 여성들을 모은 것이 아니다. 업자도 국가적 통제의 일부였다. 일본에선 21살 이상의 여성이 모집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사람들에게는 금전적인 약속 외에 ‘나라를 위해’ ‘전쟁에 이기기 위해’라는 이데올로기적 설득이 이뤄졌을 것이다. 이들은 ‘제국의 위안부’(박유하)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략) 조선에선 21살 이하의 여성이 (위안부로) 도항했다는 사실이 확인돼 있다. 일본 정부가 21살 이하의 여성은 매춘을 시켜선 안 된다는 국제조약이 식민지엔 적용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요시미 교수 등의 연구로)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조선과 대만엔 내무성 통달이 적용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조선과 대만에선 ‘기왕에 매춘부였던 사람’이라는 조건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평범한 집의 성매매 경험이 없는)의 딸들이 좋은 일거리가 있다는 얘기에 속아 모집됐다는 게 가장 흔한 케이스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난했기 때문에 먼저 돈을 받은 다음에 (위안부 생활을) 승낙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도 ‘나라를 위해’ ‘전쟁에 이기기 위해’란 이데올로기적인 설득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먼저 조선인 업자였다. 모집된 조선인 여성들에게 그런 의식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일본군 병사와 동지 의식을 가진 ‘제국의 위안부’들이었을까. 와다 명예교수는 사실상 ‘그렇지 않다’고 답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표현의 자유라는 표면상의 논쟁을 넘어,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력한 제국의 위안부였는지에 대한 탐구로 논의를 확장해야 한다.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의가 ‘학문의 자유’를 둘러싼 공방에 머무는 한, 이 논쟁은 한국 사회를 떠도는 음험한 유령으로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지 모른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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