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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2.26 20:13 수정 : 2016.02.27 13:07

김석철씨는 지난해 국가정보원 합동신문센터에 입소했지만 두 달여 만에 나와야 했다. 그는 중국인으로 분류됐지만, 김씨는 자신이 북한이탈주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씨는 여러 증거를 제시해도 국정원이 확인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씨가 국정원에서 받은 겨울 점퍼를 입고 24일 경기도 안산시의 임시거처에서 앉아 있다. 안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뉴스분석 왜?
김석철의 국적 딜레마

▶ 북한이탈주민이 대한민국 국적 신청을 하면 법무부와 국정원은 심사를 거쳐 이들의 보호 여부를 결정합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전에 탈북한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왔을까요. 대부분 중국에서 조선족처럼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이들 중 일부가 뒤늦게 한국 국적을 신청하고 있습니다. 신청자는 자신이 중국인이 아닌 탈북민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런데 법무부의 처리방식이 좀 모호합니다. 김석철씨의 사례를 통해 들여다보았습니다.

북한이탈주민이 남한으로 올 수 있는 길이 사실상 전무했던 시기에 북한이탈주민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1992년 8월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기 전 혹은 1997년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기 전 북한이탈주민은 중국에서 조선족처럼 행세하며 살아가는 게 최선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뒤늦게 남한 국적 판정 신청을 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어떻게 처리하고 있을까.

<한겨레>는 법무부에 이에 대한 질의를 하였지만 25일 법무부는 답변을 거부했다. 다만, 대법원은 비슷한 사건에 대해 이렇게 판결한 적이 있다. 북한이탈주민 이영순(당시 55살)씨는 1961년 탈북해 중국에서 살다 1992년 남한으로 뒤늦게 와 일했다. 법무부는 이씨가 체류 만료일에도 출국을 거부하자 이씨를 강제추방하려 했다. 이씨는 자신이 북한이탈주민이라고 호소했지만 법무부는 이씨가 중국 여권을 갖고 있어 중국인이라고 판단했다.

이씨는 법원에 소송을 내었고 대법원은 이씨의 강제추방에 제동을 걸었다. 1996년 11월 대법원은 “헌법 3조의 규정에 따라 이씨는 외국인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판결했다. 헌법 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씨의 중국 여권은 돈을 주고 산 가짜 여권이어서 중국 국적자로 볼 수 없고, 이씨가 북한 공민증을 갖고 있어 북한이탈주민으로 봐야 한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당시 법무부는 중국 내 조선족 중 5만명 정도가 북한 공민증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언론(1994년 5월29일 <동아일보>)은 전했다. 대법원의 판결은 지금 어떻게 적용되고 있을까.

중국인으로 사는 게 편하지 않냐고요?

김석철(51)씨의 사례를 보면, ‘탈북 조선족의 국적 부여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혼란스런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김씨는 1984년 3월 북한을 나왔다. 북한 인접 지역인 중국 헤이룽장(흑룡강)성에서 ‘가짜’ 중국 호구(일종의 주민등록증)를 만들어 조선족처럼 살았다. 그는 한국과 중국의 교류가 활발해지자 뒤늦게 한국에 북한이탈주민 지위 인정 신청을 했다. 하지만 끝내 거절당했다. 김씨는 “엄연히 내 조국이 있는데 왜 나더러 중국인으로 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는 현재 경기 안산 외국인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오는 8월까지가 김씨가 합법적으로 국내에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이다. 22일 김씨를 만났다.

“저더러 국가정보원 직원이 (탈북자 지위 인정을 거절하면서)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중국인으로 사는 게 더 편할 거래요.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게 뭐가 더 편하다는 건지…. 인간적으로 (국가에 대한) 실망감이 커요.” 김씨는 답답해했다.

김석철씨가 16살 때인 1981년 황해북도 사리원시에서 지내며 친구들과 찍은 사진. 가운데가 김석철씨. 김석철씨 제공

김씨의 사연을 이해하려면 수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김씨의 설명을 종합하면, 그는 1965년 황해북도 사리원시 철산동에서 태어났다. 김씨 아버지는 함경북도 명천군 출신인데 1953년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60년대 초 다시 북으로 돌아왔다. 김씨 아버지는 평양 김책공업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사리원 건설전문학교의 교사로 지낼 때 김씨를 낳았다고 한다.

1960년대 후반 북-중 관계는 좋았다 나빴다 하는 부침을 겪었다. 북한은 중국의 내정 간섭을 우려해 내부 숙청을 하기도 했다. 김씨의 아버지도 이때 탄압을 우려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북에 남은 김씨와 그의 어머니 등은 김씨가 16살 때인 1981년께 함경북도 회령시(북-중 국경 도시)로 이사를 갔다. 어린 김씨는 고향이 그리워 당의 허락 없이 사리원시를 다녀왔고 이게 발각되어 강제노동을 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불만이 쌓여 김씨는 1984년 탈북을 결심했다.

“회령 철길대(철길 건설 및 보수를 담당하는 부대)가 두만강 바로 옆에 있어요. 제가 거기서 노동자로 일했기 때문에 국경 경비 시간대를 잘 알았어요. 중국 흑룡강성 같은 곳에 가면 호구 없이도 살 수 있고 남의 집 가서 일해주면 밥 세끼는 먹는다고 해서 탈북했어요.”

수소문 끝에 김씨는 아버지도 찾았다. 아버지는 아들 김씨에게 가짜 중국 호구를 만들어주었다. 호구 기록을 전산화하기 이전 중국에서는 북한이탈주민들이 공무원에게 뒷돈을 주어 호구를 얻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사망신고를 앞둔 사람의 호구를 돈을 주고 사는 등의 방법이 쓰였다고 한다.

김씨는 탈북한 뒤 남한으로 올 생각을 못 했다. 한국과 중국은 수교 국가가 아니었다. 남한이 북한이탈주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주 특이한 몇몇 경우를 빼곤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다. 대부분 북한이탈주민은 김씨처럼 중국에 정착했다.

그러다 세상이 변했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으며 조선족이 남한에 합법적으로 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김씨에게는 조선족 호구가 있었고 그는 1998년 중국 여권으로 남한을 오가며 옷장사 등의 사업을 벌였다.

“1998년에는 남한에 솔직하게 탈북자라는 이야기를 못 했어요. 북한 출신이라면 남산(국정원)에 끌려가 1년간 고문을 받는다고 들었거든요. 한국 사람들에게는 제가 중국 길림성 안도현 출신이라고 설명했어요.”

김씨는 이때 지인을 통해 남한의 군 기무사 관계자로부터 북에 대한 첩보활동을 의뢰받았다고 한다.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장사하는 이들을 기무사에 소개해주는 등의 업무였다. 김씨는 위험한 일인 것을 알았지만 모두 통일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탈북자들이 중국 국경을 넘게 해주는 일(탈북 브로커)을 하기도 했다.

김씨의 대북 첩보활동이 계속되자 북한 국가안전보위부가 눈치 챘다. 회령 보위부가 연길에서 김씨의 친구를 이용해 체포를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씨는 미리 첩보를 듣고 도망가 화를 면했지만 이때부터 김씨의 중국 체류는 점점 위험해졌다.

중국 내 조선족 중 탈북자도 있다
가짜 호구 구해 조선족처럼 살다
뒤늦게 탈북자 지위 인정 신청해
이들은 중국민인가 대한국민인가
90년대 중반까지 5만여명 추정해

84년 탈북한 김석철씨 조선족 호적
갖고 살다가 최근 탈북자라고 밝혀
“강제 북송 우려로 탈북자들은
가짜 호구 만들지만 중국인 아냐”
법무부, 사건마다 임의 처리 추정

가수 유승준 예로 들며 거절해

2002년 남한에 머물 때 한국 경찰에게 자신의 탈북 사실을 처음 털어놓았다. 그러나 경찰은 김씨에게 탈북자임을 증명하라고 할 뿐이었다. 이때 김씨는 탈북 브로커 일을 하다 한 탈북자와 금전 문제로 다툼이 있었고 고소를 당했다. 경찰 수사 끝에 그는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등으로 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1년’형의 판결을 받았다. 통일부 장관 허가 없이 북한 주민을 접촉하고 북한이탈주민에게 중국 여권을 위조한 것 등이 유죄로 인정됐다고 김씨는 설명했다. 2002년 8월 중국으로 강제 추방됐다.

남한 국적을 받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2006년 지인을 통해 타이의 난민수용소를 가면 남한으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8개월을 수용소에서 보냈다. 그러나 중국인으로 분류돼 다시 중국에 보내졌다. 2013년 11월 김씨의 조선족 부인이 한국으로 취업을 오게 됐다. 2014년 11월 김씨가 부인을 따라 임시방문 형태로 한국에 재입국했다. 3개월 뒤인 지난해 2월 그는 국정원 합동신문센터에 자진 입소해 다시 ‘북한이탈주민 지위 인정 신청’을 했다. 한 달간 조사를 받았으나 역시 중국인으로 분류돼 국정원은 그를 내보냈다.

“중국 호적을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받았다고 설명하고, 제가 북한 공민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연길에 있는 제 아버지 전화번호, 아버지의 김책공업대학 졸업증을 국정원에 제출했어요. 하지만 국정원은 제 아버지에게는 전화 한 통 하지 않고 저더러 무조건 중국인이라는 거예요.”

국정원은 북한이탈주민 지위 인정을 거절하며 김씨에게 유승준이라는 가수를 예로 들었다고 한다. 김씨는 유승준이 누구인지 그때 처음 들었다. “유승준이 미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한국 국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저도 중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거예요.”

유승준은 병역 문제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에 한국으로 입국이 금지된 경우다. 게다가 유승준은 미국 국적자라 귀화 신청이 반려된 것이다. 김석철씨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이 없고, 귀화 신청이 아니라 북한이탈주민 지위 인정 신청을 한 것이다.

김씨는 지난해 4월 국정원 합동신문센터를 나왔다. 13만원의 차비와 겨울 점퍼를 받았다. 그는 더이상 대한민국 국적을 받을 의지를 잃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9월 북한의 대남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가 김씨를 거론하는 보도를 냈다. <우리민족끼리>는 남한에서 북한 인권운동을 펴고 있는 정광일(53) ‘노체인’(북한정치범수용소피해자가족협회) 대표를 비난했다. 이 매체는 “정광일은 1984년 월남 도주한 괴뢰 정보원 첩자 김모에게 매수되어 탐지한 군사비밀을 넘겨줬다”고 보도했다. 여기서 거론된 김모가 바로 김석철씨 본인이라고 김씨는 주장했다. 군 기무사로부터 대북 첩보원 업무를 제안받은 김씨가 회령시에 거주하는 정광일씨를 기무사에 연결해주었다는 것이다. 김씨는 북쪽 매체가 자신의 탈북 사실을 입증해준 것이라며 다시 북한이탈주민 지위 인정 신청을 고민하고 있다.

정광일 노체인 대표는 23일 <한겨레>를 만나 “김석철은 북한 주민이 맞다. 회령에 살았을 때 같은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잘 안다. 집안의 친척들끼리도 다 알고 지낸 사이다. 98년께 정수반이라는 가명을 쓰는 군 기무사 직원을 김석철이 소개해주어 만난 적이 있다. 이것을 북한 보위부가 알게 됐고 2003년 내가 정치범수용소에 갇히게 된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는 수용소에서 석방된 뒤 탈북해 2004년부터 한국에서 살고 있다. 2006년 국정원은 김석철씨가 북한이탈주민 지위 인정 신청을 하자 정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와 김씨가 북한 사람이 맞는지 물었고 정 대표는 맞다고 확인해주었다고 한다.

중국 연길에서 살고 있는 김석철씨의 아버지 김아무개(82)씨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석철이의 중국 호구를 만들지 않으면 북한에 강제로 보내지기 때문에 동무들에게 돈을 주어 가짜로 호구를 만들었다. 석철이를 중국에 귀화시키려던 게 아니라 석철이를 살리려면 아버지로서 당연히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법조계의 설명을 들어보면, 법무부는 김씨 같은 ‘탈북 출신 조선족’의 대한민국 국적 부여 문제를 접수 사건에 따라 달리 처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국적자여도 북한이탈주민임이 입증되면 대한민국 국적자로 분류된 사람이 여럿 있다는 것이다. 다만 법무부와 국정원 등의 조사 내용에 따라 결정이 달라지기 때문에 사실상 임의적인 의견이 반영될 여지가 크다는 분석이다.

익명을 요구한 북한이탈주민단체 관계자는 “한국 정부를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국적 부여를 꺼릴 수 있다. 김석철씨가 과거 중국에서 남한 정보당국을 도우며 각종 비밀을 접했기에 역차별을 받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2013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 때 국정원 직원의 부탁을 받고 증거조작을 실행한 김원하씨는 지난해 12월 법무부에 국적판정신청서를 제출했다. 김원하씨 역시 1965년 탈북해 중국 조선족 호구를 불법 취득한 북한이탈주민이라는 것이다. 김씨의 변호를 맡은 박종흔 변호사는 <한겨레>에 “김원하씨가 증거조작 사실을 폭로해 국정원을 곤궁에 빠뜨렸기 때문에 국적 판정신청이 반려되고 강제 추방될까 염려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다음달 초 형이 만료되면 추방 대상이 된다.

북한인권정보센터 부설기관 정착지원본부 신효성 국장은 “생존의 문제 때문에 불가피하게 중국 국적을 취득한 것인지 명확하게 가리고, 일종의 난민 성격을 가진다면 남한 정부가 좀더 전향적인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선족과 탈북자의 가장 큰 차이는?

“조선족과 탈북자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 아세요? 축구 경기를 볼 때 우리는 북이든 남이든 조선 민족이 골을 차면 미친 듯이 좋아해요. 조선족은 조금 분위기가 다르죠. 제가 절대 중국인이 될 수 없는 이유예요. 저는 중국에 오래 머물렀기에 (북한이탈주민보호법상 정착지원금 등을 받는) 보호처분을 받을 수 없어요. 괜찮습니다. 그냥 대한민국 국민임을 인정받는 게 소망입니다.” 김석철씨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가 중국으로 추방되면 또 어떤 일을 겪을지 알 수 없다. “언론에 이런 거 얘기했다고 무슨 더 보복을 당하지는 않겠죠?”

국정원은 25일 “김석철씨는 자발적으로 중국 국적을 받았고 30년간 중국에서 생활했다. 탈북 뒤 강제북송 우려 등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중국 국적을 취득한 경우에만 북한이탈주민으로 인정해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하고 있다. 김씨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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