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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3.11 18:58 수정 : 2016.03.13 10:53

북한이탈주민 김련희씨가 7일 오후 서울 주재 베트남대사관에 망명 신청을 했다가 대사관 요청을 받고 출동한 경찰의 인도 아래 대사관을 다시 나온 뒤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뉴스분석 왜?
베트남대사관에 간 김련희씨

▶ <한겨레>가 지난해부터 보도해왔던 북한이탈주민 김련희 이야기는 이제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북한은 김씨의 송환을 주장하고 있고 해외 매체들도 김련희씨를 주목합니다. 김씨가 지난 7일 서울 주재 베트남 대사관에 망명신청을 했습니다. <뉴욕 타임스>가 다음날 속보로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직 베트남 대사관의 연락은 없습니다. 한국 경찰은 김씨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의 망명신청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북한이탈주민 김련희(47)씨는 7일 저녁 6시께 서울 삼청동 주한 베트남대사관 철문 앞을 걸어 나왔다. 김씨 뒤로 경찰 5~6명이 따라 나왔다.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뉴욕 타임스>, <시엔엔>(CNN) 등 외신 기자들이 이미 소식을 듣고 와 있었다. 국내보다 외국 매체 기자들이 취재에 더 열중이었다. 대사관 철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 김씨가 뒤돌아서 철문 앞으로 달려들었다.

“저는 그냥 내 남편과 부모님, 딸을 보러 집에 가고 싶을 뿐이에요.”

대사관 정문 앞에 김씨의 울부짖는 소리와 눈물이 떨어졌다. 땅거미가 햇살을 집어삼켜 어둑어둑해진 길바닥 위에 그의 절망도 함께 떨어졌다. 김씨는 이날 베트남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하러 진입했다 쫓겨나는 길이었다. 김씨는 주저앉았다.

베트남대사관 앞마당에서 대사관 관계자(오른쪽)에게 자신의 퇴거를 결정한 것에 항의하고 있는 김련희씨. 강재훈 선임기자

전화번호 4150의 공민

김련희씨는 <한겨레>가 지난해 보도(2015년 7월4일 1·3·4면)하며 알려진 인물이다. 김씨는 여행 목적으로 중국에 갔다가 탈북 브로커에게 설득당해 2011년 9월 남한에 입국했으나 자신은 실수로 입국했다며 국가정보원에 북한 송환을 요구했다.

탈북 브로커가 ‘남한에 들어가서 얼마간 돈을 벌다가 중국으로 나오면 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 탈북자 대열에 합류했지만, 남한에 도착한 뒤 머물게 되는 국가정보원 합동신문센터에서 줄곧 북송을 요구했다는 게 김씨의 주장이다. 국가정보원과 통일부는 김씨의 북송 요청을 거절해왔다.

<뉴욕 타임스>, <시엔엔> 등 외국 매체들도 김씨의 사연을 조명했고, 북한 당국의 목소리를 전하는 매체 <우리민족끼리>는 수차례에 걸쳐 김씨와 평양에 머물고 있는 그의 가족들의 사연을 보도했다. 지난해 12월 <노동신문>은 ‘2015년 남조선인권유린조사통보’라는 제목으로 김련희씨의 북송 요청을 거부하는 남쪽 정부를 비난하는 보도를 냈다. 김련희씨는 왜 극단적인 망명 신청을 결심하게 된 것일까. 김씨의 연락을 받고 6일 서울의 한 주택가에서 그를 만났다.

이날 밤 김련희씨는 네평 남짓한 방에서 짐을 꾸리고 있었다. 5년간 남한에서 지내다 북으로 돌아가며 꾸리는 짐은 책가방 한 개 분량이 전부였다. 몇 가지의 겨울옷, 그리고 자신의 망명신청서, 약간의 여비가 그의 가방 안으로 구겨넣어졌다. “정말 꿈만 같아요. 이제 곧 가족을 볼 수 있다 생각하니….” 김씨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가족을 만나면 단정하게 보이고 싶어 머리도 단발머리로 다듬었다.

김씨는 북한이탈주민이다. 김씨 주장으로는 남한에 “강제 억류”돼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국민의 개념)이다. 지난해부터 통일부, 적십자사, 국가인권위원회 등을 쫓아다니며 자신을 북으로 송환해 달라고 요구해왔다. 지난달부터 통일부가 들어서 있는 서울 종로구 정부청사 앞에서 1인시위도 했다. 허사였다.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다. 남북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결국 김씨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북한이탈주민이 북송을 요청하며 제3국의 대사관에 진입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제가 왜 돌아가려 하냐고요? 제 가족이 평양에 살고 있잖아요. 아버지(77), 어머니(73). 그리고 저의 남편(51)과 외동딸(22)이요. 제 딸이 곧 결혼을 해요. 어머니는 병환이 깊어 1년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고 연락이 왔어요. 또 제게 중요한 건 조국(북한)이에요. 저를 태어나게 하고 공부시키고 입혀주고 먹여줬어요. 오늘의 저를 있게 해준 조국이에요. 저는 조국을 떠나서 살 수가 없어요.”

김련희씨는 북으로 돌아가려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전화번호 뒷자리는 4150이다. 김일성 주석의 생일이 4월15일이다.

‘돈 벌 수 있다’ 탈북 브로커 꾐에
한국 왔다가 다시 북송 요청
일인시위 해도 정부는 묵묵무답
결국 망명 위해 택시 탔다
“베트남대사관으로 가주세요”

망명 신청서 받아든 직원들
회의하더니 “일단 돌아가라”
경찰 신고해 퇴거 요청
발걸음 돌려 주저앉아 울었다
“가족 보러 가고 싶을 뿐인데…”

“저 하나 간다고 체제 흔들립니까”

-대사관 진입 계획은 어떻게 세우게 된 건가요?

“(한국 정부에) 여권을 달라고 해도 5년째 발급을 안 해주고 있어요. 국가정보원(합동신문센터에 있을 때 북송해 달라고)에 호소하며 단식투쟁도 하고, (합동신문센터를 나와서) 밀항 계획도 세우고, 간첩 행세도 해보고 했는데 소용이 없어요. 여기저기서 제 사연을 보도했는데도 정부 당국자가 저를 찾아와 뭘 물어보는 것도 없어요. (통일부 앞에서) 시위를 해도 소용없고. 그러면 제가 뭘 해야겠어요.”

-대사관에서 추방될 수 있어요.

“저는 감옥 가는 게 두렵지 않아요. 조국이 저를 지켜보고 기다린다고 믿기 때문에. 그래도 (베트남대사관이 인도주의적 조처를 할 거라고) 기대해요. 망명하는 거잖아요.”

지난해 4월 대구고등법원은 김씨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잠입·탈출, 회합·통신 등)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아직 집행유예 기간이 끝나지 않았다. 만약 수사기관이 김씨가 베트남대사관에서 북한으로 송환 요청을 했다고 판단할 경우, 김씨는 국가보안법상 잠입·탈출 시도로 재구속될 수도 있다.

베트남대사관은 김련희씨에 대한 보호 결정을 내릴까. 불가능한 건 아니다. 외국의 공관은 치외법권으로 인정되어 한국 공권력이 함부로 진입할 수 없다. 참조할 만한 사례가 있다.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이 한창이던 1967년, 한국 태생이자 미군 사병인 김진수(22·당시 나이)씨는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에서 근무하다 일본으로 휴가를 와 머물던 중 이탈해 도쿄의 주일 쿠바대사관으로 들어갔다. 쿠바대사관은 김씨의 망명 신청을 받아 그를 장기간 보호했다. 김진수씨는 일본 반전운동 단체의 도움을 받아 밀항해 1968년 4월21일 유럽으로 향했다고 전해진다.

망명 신청자에 대한 보호는 각국의 정치적 상황과 판단에 따라 달리 결정된다. 김련희씨 사건에서 핵심 변수는 우리 정부와 국제사회의 시선이다. 대한민국 헌법(3조)은 대한민국 영토를 한반도 및 그 부속도서로 정의하고 있다. 김씨를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하고 북한이탈주민으로서 보호조처에 들어간 것에 법률상 하자는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국제법상 한 나라의 영역은 국가권력이 미치는 공간에 한정된다. 우리의 국가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휴전선 이북지역은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영토로 인정받기 어렵다. 1991년 북한과 남한은 각각 유엔에 가입했고 사실상 국제사회는 남북한을 각각 주권을 가진 별개의 나라로 구분한다.

2000년 마련된 유엔 국제조직범죄방지협약 부속 의정서인 ‘인신매매 방지 의정서’ 기준대로 보면, 김씨는 국정원과 협업하는 탈북 브로커로부터 유사 인신매매의 피해를 당해 남한에 사고로 들어오게 된 북한이탈주민일 가능성이 있다.(<한겨레> 2015년 9월26일 10면) 북한 당국이 김씨가 남한으로 납치됐다고 주장하고 김씨가 남쪽에 억류되어 있다고 느끼는 배경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 때문에 남북 당국이 대화를 통해 김씨의 북송을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가끔 북한 어선이 남쪽 바다로 표류해 왔을 때 체류 의사를 밝히지 않은 북한 주민은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내고 있다. 1993년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씨를 북송할 때 ‘가족 방문’이라는 명분으로 보낸 적도 있다. 김련희씨의 북송 문제는 법률적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 결단의 문제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통일부는 북한이탈주민을 북송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어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베트남대사관 바깥에서 기독교평화행동 목자단 회원들이 김씨의 북송을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통일부에서 당신의 북송을 거절하는 이유가 뭐라고 보나요?

“통일부 출입기자한테 전해 들었어요. 통일부가 (백브리핑 형태로) 기자에게 설명했는데, 제가 북송되면 체제 선전에 이용될 수 있고 다른 탈북자들도 서로 보내달라고 하면 어떡하냐고 했다는 거예요. 저는 황당해요. 저 하나가 북으로 간다 해서 남한의 체제가 흔들립니까? 또 저는 엄연히 북한이탈주민이 아니에요. 애초부터 국정원에서 남한에 체류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는데 강제로 남한 국민으로 만든 거잖아요.”

-남한에 정착해 살 수 없나요?

“(<한겨레> 등의) 보도 이후 다니던 회사(재활용공장)에서 해고됐어요. 처음에는 사장님이 저와 관련한 보도를 보고 무슨 일이든 돕겠다고 하셨는데 경찰 보안수사대가 회사에 자꾸 찾아오니까 저더러 나가달래요. 제 전화번호로 (신원 미상의 사람들로부터) 어디 사는지 알면 죽이겠다는 협박 문자도 와요. 저를 도와주는 남쪽 사람들도 많지만 이곳에선 제가 살 수 없어요.”

출동한 경찰과 실랑이하는 김련희씨.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경찰 부른 베트남대사관

김련희씨와는 7일 오후 1시께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다시 만났다. 통일부 앞에서 1인시위를 마친 그는 지인들과 함께 점심을 들고 있었다. 식사 뒤 그는 택시를 잡아탔다. 삼청동 베트남대사관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경복궁 돌담이 보였다.

“저는 경복궁 구경도 못 해보고 고향으로 가게 되네요. 왠지 남쪽에서 편히 지내면 안 될 것 같아 관광이란 것도 못 해봤어요. 고향에 가게 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게, 흙을 만져보고 싶어요. 제 고향의 흙.” 김씨가 눈물을 왈칵 쏟았다. 차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베트남대사관 문 앞에 도착했다. 오후 3시를 조금 넘긴 시각, 민원 업무를 보러 찾아왔다고 설명하며 대사관에 들어서자 관리인은 출입증을 건네고 김씨를 들여보냈다. 잔뜩 긴장하며 들어왔지만 대사관 안은 적막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대사관은 마당이 딸린 일반 고급주택 같은 곳이었다. 건물 안에서 처음 마주한 남성 직원에게 김씨는 서류를 건넸다. “저 망명 신청하러 왔습니다.”

직원은 잠시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곧 김씨를 접견실로 안내했다. 직원은 대사관 영사로 보이는 남성을 데려왔다. 그는 김씨가 제출한 서류를 찬찬히 살펴본 뒤 김씨에게 한국어로 물었다. “한국에서 어떤 압박과 피해를 당하고 있나요?” 김씨가 자신의 사연을 짧게 설명했다. 남성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직원들은 다시 접견실을 나갔다. 회의를 한다고 했다.

김련희씨는 그래도 일단 자신을 쫓아내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조금씩 웃기도 했다. “아, 이제 정말 고국으로 가게 되는 건가요.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아요. 남한에서 저를 도와주셨던 분들 정말 고마워요. 남이나 북이나 인간성은 그저 정 많고 선량하고 똑같아요.”

그러나 김씨의 안도감은 채 한 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책임자급으로 추정되는 대사관 남성 직원이 돌아와 “베트남은 남과 북 모두와 외교관계를 갖고 있다. 이것(망명)은 매우 민감한 문제라서 당장 결정할 수 없으니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통보했다. 김씨는 망명 여부를 결정할 때까지 대사관에 머물게 해달라고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씨가 이틀 정도만 머물게 해달라고 재차 부탁하자 대사관 관계자는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퇴거 관련 법으로 한국 경찰을 부르겠다”고 경고했다.

오후 5시께 한국 경찰이 갑자기 대사관 접견실에 나타났다. 베트남대사관의 신고로 출동한 종로경찰서 형사 5~6명이 김씨에게 퇴거를 요청했다. 대사관 직원은 더 이상 접견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김련희씨가 울면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당신들도 가족이 있을 거 아니에요. 가족과 영영 헤어져 살아야 하는 사람의 심정을 생각해보셨나요. 저는 못 나가요!” 그러나 김씨는 끝내 대사관을 나와야 했다. 자칫 강제 연행되면 구속될 염려가 있었다.

<뉴욕 타임스>는 8일 오전 “김련희는 북으로 돌아가려고 서울 주재 타국 대사관으로 들어간 첫번째 북한이탈주민”이라며 속보를 전했다. 서울 종로경찰서는 김씨에 대해 퇴거불응 혐의로 출석요구서를 발부하겠다고 10일 밝혔다. 김씨는 서울의 한 주택가로 피신했다. 베트남대사관으로부터 별다른 연락은 받지 못했다. 김씨는 자신의 문제를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소할지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김련희씨 사건에 국내 북한이탈주민 사회와 세계의 이목이 모아지고 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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