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뉴스분석 왜?
서경식, 다시 와다 하루키에 묻다
|
어버이날을 앞둔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229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 참석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
▶ <한겨레>는 3월12일치 토요판 20·21·22면을 통해 와다 하루키(78) 도쿄대 명예교수에게 보내는 서경식(65) 도쿄경제대 교수의 도발적인 공개편지를 실었다. 3월26일치 토요판 18·19면에는 와다 교수가 서경식 교수에게 보내는 답신을 소개했다. 한차례씩 공개편지가 오간 뒤, 서경식 교수가 와다 교수의 주장에 재반론하는 형식의 글을 다시 보내왔다. 서경식 교수는 이 글에서 자신이 공개서한을 통해 밝혔던 3가지 물음에 대한 와다 교수의 명확한 입장 표명을 촉구했다.
|
왼쪽부터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
와다 하루키 선생님, 제가 <한겨레> 3월 12일치에 공표한 ‘일본 지식인의 각성을 촉구한다-와다 하루키 선생님에게 보내는 편지’(이하 ‘공개서한’)에 대하여, 답장 ‘서경식 교수의 공개서한에 답한다’(이하 ‘반론’, <한겨레> 3월 26일)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어 보니, 저로서는 진리탐구와 연대 구축을 위한 대화를 해보고자 한 것이었으나, 선생님의 답변이 뜻밖에도 노기를 띤 것이어서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 다시 여쭙고자 하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앞서 보낸 ‘공개서한’의 말미에 선생님의 답변을 구하는 3가지 사항을 구체적으로 적었습니다.
1. ‘아시아 여성기금’ 실패의 원인을 사상의 차원에서 깊이 파고 들어 고찰해 주십시오.
2. 지난해 12월 28일의 한일합의(‘12·28합의’)는 즉각 철회돼야 한다는 취지의 의사를 표명해 주십시오.
3. 박유하 교수의 저작과 언동에 대한 선생님 자신의 견해를 명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3에 대해 선생님은 ‘반론’에서 별다른 이유를 제시하지 않은 채 “지금 서씨와 논의할 생각이 없다”고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시작됐고 한국사회에서도 전개되고 있는 ‘박유하 현상’은 ‘위안부 문제’의 본질적인 평가와 관련돼 있을 뿐만 아니라 한일 두 사회에서 운동단체나 시민 상호간의 분열·대립상태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경위로 보건대 선생님은 결코 그 국외자가 아닙니다. 평소 ‘책임’을 강조하신 선생님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계신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다시한번 선생님의 견해를 여쭙고자 합니다.
선생님은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와 저의 ‘12·28합의’ 백지화론이 “안이하다”고 일축하고 아베 총리의 사죄표명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12·28합의’ 때의 아베 총리 담화는 총리가 직접 기자회견이나 국회 등에서 표명한 것이 아니며, 또 선생님 자신도 말씀하셨듯이 공식 서간 형태로 피해자에게 전달된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경위를 돌아보면 이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 합의라는 한국 쪽의 양보를 끌어내기 위해서 한 구두약속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 뒤의 일본정부 입장은 10억엔의 출연금은 “배상금은 아니다”는 견해표명과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한 외무심의관의 ‘사실 설명’ 등으로 보건대 일관된 국가책임 부정론에서 달라진 게 없습니다.
“양국 합의 백지화 어렵다” 주장엔
실패한 ‘아시아 여성기금’ 레토릭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일부 피해자들 비난하는 게 아니라
두 나라 정치권력 비판하는 것이죠
사회당은 관료·자민당과 타협
“필리핀·네덜란드 성공했다”지만
핵심적 과제는 손도 못댄 상태
가해자 쪽은 ‘성공’ 따위 평가를
스스로 금해야 하지 않을지요
피해자를 분단하는 레토릭
선생님은 2014년 6월의 제12회 아시아 연대회의의 결정을, “일본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형식을 생각해서 요구를 새롭게 표현한” 것이라며 중시하시고 자신도 “바로 일본 외무성 국장, 과장에게도 설명하고, 이후 만나는 사람마다 이 안의 의미를 설명하고 글도 써왔다.(<세카이> 2014년 9월호) 2015년 4월에는 도쿄에서 열린 ‘전국행동’ 집회에서 윤미향 정대협 대표와 함께 등단해서 이 안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고, 5월에는 신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를 써서 이 안에 따른 해결을 호소했다”고 하셨습니다.(‘반론’)
그러나 한일 양국 정부는 와다 선생님의 열의에 성실하게 답하지 않았고, 당사자들과 상의도 하지 않은 채 ‘합의’를 공표했습니다. 선생님이 접촉한 외무성 관리는 선생님에게 이번 합의 발표에 대해 사전에 통고도 하지 않은 듯합니다. 와다 선생님의 열의는 국가에 의해 그들 편의대로 이용당한 것은 아닌지요?
일본정부는 나아가 실행할 생각도 없는 구두약속의 대가로 ‘불가역적인 최종해결’ 합의라는 외교적 성과를 거뒀습니다. 앞으로 한일 양국의 권력은 이 ‘합의’를 지렛대 삼아 피해 당사자의 것도 포함한 여러 비판들을 봉쇄하려 하겠지요. 이 ‘합의’를 통해 잃어버린 것은 많고, 진정한 ‘해결’의 길은 더욱 멀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운동단체는 바로 그날 ‘12·28합의’의 ‘백지 철회’를 촉구하고 “일본정부의 국가적 법적 책임 이행이 반드시 실현될 수 있도록” 요구하는 입장을 명확하게 한 것이겠지요.(공동성명 ‘시민단체의 입장’) 제가 와다 선생님에게 바라는 것은 선생님 자신도 이런 입장에 서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
어버이날을 앞둔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229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 참석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
하지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일 양국 정부의 합의를 백지철회케 하는 것은 일의 경과로 보건대 어렵다고 할 수밖에 없다. (중략) 아베 총리에게 그 ‘최종적 해결’안을 백지철회하게 하고 완전히 새로운 해결안을 내놓게 할 수 있는 힘은 일본 국내에는 없다. 따라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바라온 일본인으로서는 이번 한일합의의 개조, 개선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이제까지 운동을 해온 자의 책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반론’)
이 견해는 저로서는 대단히 의문스럽습니다. 이제와서 철회는 어렵다, 새로운 해결안을 내게 할 힘은 일본에는 없다, 따라서 이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책임’이다,….여기에는 실패로 끝난 ‘아시아 여성기금’의 레토릭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책임’일까요? 저는 냉철한 비판을 통해 실패의 반복을 막으려 하는 것이야말로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선생님은 ‘반론’에서 이런 얘기도 쓰셨습니다. “운동가든 전문가든 한일합의의 백지철회를 주장한다면, 이번 합의를 받아들일 피해자 할머니가 있을 경우 그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람을 비난하는 꼴이 된다.”
이는 제가 ‘공개서한’의 ‘균열’ 장에서 얘기한 ‘아시아 여성기금’이 ‘보상금’ 지급을 강행했을 때의 레토릭을 충실히 재현한 것입니다. 지난 번의 역사적 실패 경험을 토대로 한 발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시아 여성기금’ 때도 그 발족 전부터 구상 자체에 대한 위구와 비판의 소리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기금’은 강행됐고 비판자들에 대해서는 “돈을 받은 피해자 할머니들을 비난하는 것인가”라는 사리에 어긋난 반론이 반복됐습니다. 이번에도 피해 당사자나 운동단체의 의향을 무시하고 양국 정부가 ‘합의’를 당돌하게 공표했습니다. 와다 선생님은 그것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피해자 할머니를 비난하는 것이 된다”는 논법으로 반론하십니다. 이는 기성사실화해서 피해자의 분단(分斷)을 꾀하고, 그 분단된 피해자의 일부를 방패로 삼아 자기정당화를 하려는 레토릭이 아닌가요? 공해문제, 기지문제, 원전문제 등등 국가보상이 얽힌 수많은 사례들에서 권력 쪽이 취해 온 상투적인 수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런 분단책을 이제부터 실행하겠다는 예고로 들리기조차 합니다. 와다 선생님 같은 존경받는 지식인한테서 이런 논법을 두 번에 걸쳐 듣게 된 게 되다니 유감스럽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정부가 내놓은 사죄와 그에 따른 조치에 대해 받을 것인가 받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이름을 밝히고 고발한 피해 당사자에게 권리가 있다. 이제와서 피해 당사자 모두의 소리를 확인하지 않고, ‘백지로 돌려 다시 한번 바로잡아야 한다’고 단정할 권리가 요시미 요시아키씨에게 있을까.”(와다 ‘반론’)
그렇게 주장할 ‘권리’는 사실인식을 기초로 한 이성적인 논의인 한, 요시미 선생은 물론 저에게도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12·28합의’를 받아들일지도 모를 일부 피해당사자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방식은 피해자를 분단하는 것이고, 진정한 ‘해결’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보고 일본과 한국의 정치권력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두 가지를 혼동해서 논하는 것은 ‘권력 비판’을 ‘피해자 비판’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지난 번의 공개서한에서 국가책임을 부정하는 국가의 입장을 개인의 도덕론으로 덮어 감춰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게 바로 이것입니다. 와다 선생님한테서 답변을 듣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노력 부족이 아니라 그 방향성이 문제
와다 선생님은 이번 ‘반론’에서 ‘12·28합의’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긴 싸움의 제3 라운드의 마지막 국면을 이루고 있다”면서 1990년 이후의 경과를 얘기한 뒤, 서경식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운동의 이런 힘들고 험난한 도정을 얼마나 이해하고 발언하고 있을까”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공부하기 싫어하는 저로서도 선생님이 근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를 비롯해서 곳곳에서 거듭 밝혀오신 견해를 여기서 되풀이하신 점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쭙고자 한 것은 ‘아시아 여성기금’은 ‘초기 설정’이 잘못돼 있었던 게 아닌가, 잘못된 초기 설정을 수정하지 않은 채 강행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 아닌가, 그렇다면 잘못을 낳은 원인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라는 원리적인 차원에서 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이번의 ‘12·28합의’에서 그 과오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 제 주장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최대한의 노력을 해왔다, 우리가 얼마나 고생해 왔는지 모르겠는가, 라는 선생님의 질책은 유감스럽지만 저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비판하는 게 아니라 그 노력의 방향성이 잘못돼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여쭙는 것입니다.
와다 선생님은 아시아 여성기금 발족 당시부터 1995년에 이르는 상황에 대한 저의 인식이 “현실과 매우 동떨어져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일본정부의 대원칙은 “피해자에 대한 국가보상은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라야마 연립정권이 탄생하자 우파의 ‘종전 50주년 의원연맹’ 등의 강력한 대항운동이 조직돼 “한일 운동세력의 연대는 존재했으나 이 사태를 타파할 힘은 없었다.”(‘반론’)고 했습니다.
제가 이와 같은 일본 우파의 완강한 저항에 대해 무지했다면 그 인식은 “매우 동떨어져 있다”고 하실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제4의 호기’라는 졸고에서도 언급했듯이, 저는 그 이전부터 일관되게 일본의 우파·보수파의 암반이 두텁다는 것을 경시한 적이 없습니다. ‘아시아 여성기금’이 발족할 무렵 우리 재일 조선인 젊은 연구자들의 연구회 리셉션에 내빈으로 오신 와다 선생님이 발언하시고 격론을 교환했던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기금’구상의 필요성의 근거로 이런 일본 우파의 암반이 두텁다는 것을 통감한다고 지금과 같은 말씀을 하셨을 때, 실례지만 저는 내심 와다 선생님 정도의 인물도 자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그 정도로 낙관적이었나 하고 놀랐습니다.
그런 것은 오히려 전제이고, 바로 그와같은 우파의 완강한 저항과 맞서 싸우기 위해 “일본의 진보적 시민과 한국의 반식민지주의 세력이 연대해서 일본정부에 대항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 초반에 ‘위안부’문제를 비롯한 전후보상문제, 전쟁책임문제가 떠오르게 됨으로써 마침내 희미하게나마 연대의 맹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시아 여성기금’ 구상은 이런 연대에 균열과 대립을 가져왔고, 우파와의 싸움에서 불리한 조건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저의 논점입니다.
“한일 운동세력의 연대는 존재했으나, 이 사태를 타파할 힘은 없었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물론 곧바로 사태를 타파할 힘은 없었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국가책임 추궁이라는 원칙을 높이 내걸고 연대를 강고하게 해서 장기적인 싸움에 대비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태를 타파”할 수 없겠지요.
사실 그때부터 4반세기 이상 지난 지금도 와다 선생님은 거듭 “새로운 해결안을 내놓게 만들 힘은 일본 국내에는 없다”고, 같은 논법을 되풀이하고 계십니다. 사실인식으로서는 그게 맞을지라도, 그처럼 “일본은 영원히 바뀔 수 없다”는 전제 위에 서서, 게다가 그 전제를 공유하도록 피해자 쪽에 요구하는 논법으로 보건대, 결국 일본을 바꿀 생각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일본사회의 보수파 암반이 강고하면 할수록 피해자쪽과 연대해서 거기에 맞서 싸워야만 어려움 끝에 “사태를 타파할” 희망이 보이는 게 아닐까요. ‘아시아 여성기금’ 발족 당시에 한국쪽에서 제기된 비판은 바로 그런 연대를 위한 호소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난 번 공개서한에서 선생님의 ‘초심’에 대해 여쭈었던 것도 그런 문제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한국 민주화 연대운동 속에 ‘제3의 찬스’가 있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연대다. 일본인과 조선반도 사람들간의 역사를 모든 면에서 다시 묻고,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만들어가기 위한 연대다”라고.
“일본국민은 이 ‘제3의 찬스’를 붙잡았나요?”라는 저의 질문은 일본국민은 “다시 태어난” 것인가, 일본-조선 두 민족의 역사를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만들 수” 있었던가 하고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만일 그랬다면 선생님이 지금까지도 “새로운 해결안을 내놓게 할 힘은 일본 국내에는 없다”고 거듭 말씀하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지나간 4반세기의 과오를 냉철하게 뒤돌아보면서 종합 평가하고, 이제부터라도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태어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가비판과 개인비판 바뀌치기
‘아시아 여성기금’ 구상을 추진한 무라야마 내각의 이가라시 고조 관방장관이 <아사히신문>의 “전 위안부에게 ‘위로금’, 민간모금으로 기금 구상, 정부는 사무비만”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대해 반론을 하지 않았던 일에 대해, 저는 이 기사가 “당시 (사회당을 포함한) 정권의 의도를 정직하게 전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와다 선생님은 “이는 무랴아마 내각에 반감을 지닌 사람의 근거없는 비난”이라고 반발하셨습니다. “반감을 지닌 사람”이라는 표현은 상호 견해차이를 전제로 진실을 추구하려는 이성적인 대화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것입니다. 설사 제가 ‘반감’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해야겠지요. ‘반감’ 때문에 근거없는 트집을 잡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한 행위의 결과가 제게 어떤 감정을 품게 만든 것입니다.
“이가라시 관방장관도, 전후 50년문제 프로젝트 팀의 사회당 위원도 필사적으로 주장했지만 피해자에게 줄 돈을 정부자금으로 충당하는 것에 대해 관료와 자민당 위원들의 찬성을 얻지 못해 단념하게 됐다”…그렇게 와다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가라시씨는 물론 노력을 많이 했겠지요. 저는 그것을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그때의 논의 포인트가 아니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가라시씨는 ‘관방장관’, 즉 정부의 공식 대변인입니다. 그 사람의 결정이나 발언은 그 이치상 정부의 의사표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내심이나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노고를 헤아리는 것과 정책 그 자체의 평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더구나 선생님 자신이 쓰셨듯이 “피해자에 대한 (보상금) 지불에 정부자금으로 충당하는 것에 대해 관료와 자민당 위원들의 찬성을 얻지 못해, 단념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그는 ‘관료와 자민당 위원’의 의향을 받아들여 관방장관으로서 그것을 공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하는 “(사회당을 포함한) 정권의 의도”입니다. 이가라시씨 개인의 사람됨이 어떠하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처럼 사회당은 그때까지의 원칙을 버리고 ‘관료와 자민당’과 타협해서 체제내화했습니다. 그 결과 사회당은 자멸했고, 일본의 진보적 리버럴세력은 무력화됐습니다. ‘아시아 여성기금’ 구상도 그 틀 안에서 만들어진 것인만큼 초기 설정 단계에서부터 모순과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저의 문제제기였습니다. 그 문제제기에 대한 와다 선생님의 반응은 저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이가라시씨나 자신들의 노고를 이해해야 한다는 논법의 반복입니다. 여기에도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은 국가비판과 개인비판의 (경우에 따라서는 의도적인) 혼동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혼동의 대표적인 예는, 천황제라는 국가제도의 전쟁책임과 식민지지배 책임을 논하려 할 때,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천황 개인은 평화지향이었다”와 같은 빗나간 응답이 돌아와 논의가 깊어지지 못하는 현상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선생님의 응답에는 이것과 유사한 레토릭이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기본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아시아 여성기금은 일본정부가 추진한 사죄와 보상(속죄) 사업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을 ‘일본정부가 공식사죄와 법적 배상을 회피하는 수단’이었다고 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선생님은 이렇게 쓰셨습니다만, 실로 ‘아시아 여성기금’은 ‘기본적인 결함’(초기 설정의 잘못)을 지닌 채 추진된 ‘일본정부의 사업’이었고, 거기서 일본정부의 지난 20년간 변하지 않은 방침은 오늘날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듯이, 국가의 법적 책임을 끝까지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와다 선생님은 그 ‘아시아 여성기금’의 전무이사를 맡으셨습니다. 즉 단순한 일반시민이 아니라 정부의 정책의사를 실천하고 체현하는 위치에 자발적으로 서셨습니다. 선생님 개인의 선의였다는 것, 자기희생적인 노력을 하셨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습니다만, 그런 ‘개인의 도덕성’ 차원과 국가정책 평가 차원은 냉정하게 구별돼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시아 여성기금’에 출연금을 낸 일반시민의 선의라는 차원과 그 ‘기금’이 객관적으로 수행한 정치적 역할은 냉정하게 구별해서 고찰해야 겠지요. 후자를 논하려 할 때 전자를 강조하고, 후자에 대한 비판이 일반시민의 선의에 대한 비판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빗나간’ 것이고, 굳이 얘기하자면 출연금을 낸 시민의 선의조차도 국가목적에 이용하려는 ‘바꿔치기’였을 뿐입니다.
아시아 여성기금은 필리핀과 네덜란드에서는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신데 대해 “네덜란드는 피해자로 이름을 밝히고 일본국가를 비판해 온 장 러프 오한씨가 기금을 거절했다, 이 한 사람의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금이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고 저는 비판했습니다. 이 비판에 대해 선생님은 자신의 저서에서 오한씨는 “일본인이 잊을 수 없는 네덜란드인 여성입니다라고 강조한 것은 나”라고 반론하셨습니다. 저도 그것은 선생님의 저서를 읽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선생님의 이 말씀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네덜란드에서 기금이 “성공했다”는 평가와, 오한씨는 “일본인이 잊을 수 없는 네덜란드인 여성입니다”라는 강조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으며, 어떻게 논리적으로 정합될 수 있을까요? 오한씨의 고발을 잊을 수 없다면 ‘기금’이 성공했다고 얘기할 순 없지 않을가요? 설령 그런 “잊을 수 없는 피해자”가 있더라도 받아들인 사람의 수가 많으면 ‘성공’이라고 평가하는 것인가요? 더구나 ‘기금’을 받아들이기를 계속 거부하고 있는 피해자가 한국, 대만 등에 다수 존재할 뿐만 아니라 애초에 ‘기금’사업의 대상이 되지 못한 피해자들이 중국, 북조선, 동티모르 등 각지에 현존하고 있다는데.
여기서 만일 선생님이 “오한씨와 같은 존재가 있는 이상 기금이 성공했다고는 도저히 얘기할 수 없다”고 하셨다면 저는 선생님의 노고에 공감하고 존경심을 다시금 마음에 새겼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말하자면 ‘자율적 윤리규범’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신적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가해진 (일본국민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자국이 이 사람들에게 가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잔학·냉혹한 행위를 생각하면, ‘아시아 여성기금’을 통한 ‘사죄와 보상’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하물며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역사 교육, 기념사업 등 핵심적 과제는 손도 대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피해자들이 “마음의 평안”을 얻었는지의 차원을 넘어서, 가해자 쪽은 적어도 ‘성공’ 따위의 평가는 스스로 금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래야만 오한씨와 같은 사람까지 포함한 피해자들로부터 신뢰를 서서히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필리핀의 로사 헨슨씨에 대해서도,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오한씨와는 달리 그녀는 죽기 전 해에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그것은 빈한한 함석지붕의 판자집이었던 자택 개축비용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가난하니까, 고령이니까 ‘보상금’을 받았다고 보는 것은, 필리핀의 피해자들에 대한 편견은 아닌가”라고 와다 선생님은 저를 비판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는 저의 ‘편견’이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제가 그것을 얘기하는 것은 ‘보상금’을 받은 피해자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다만 무력한 피해자들을 이런 한계상황에까지 내몰고는, 그 사람들에게 그 심한 굴욕과 고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보상금과 사죄’를 전달한 것으로 사업의 ‘성공’을 얘기하는 그 정신상태에서 ‘자율적 윤리규범’의 결여를, 덧붙이자면, 도덕성이라는 이름을 빌린 국가의사의 냉혈성을 느낄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율적 윤리규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원래 누군가로부터 요구받았기 때문에 실행한다는 차원의 얘기는 아닙니다. 따라서 저도 또한 이 점에 대해서 더 이상의 얘기는 그만두고, 와다 선생님과 독자 여러분들이 조용히 자기성찰을 해주시기만을 바라겠습니다.
“아시아 여성기금에 관여했던 자의 심정으로 얘기하자면, 피해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 불충분하더라도 일본 국가 국민의 책임을 지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지, 내 양심을 만족시키는 것만을 생각했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작은 노력에 대해 초월적인 높은 곳에서 판정을 내리는 일은 그만두기 바란다.”
사람을 질리게 하는 이 힘주어 하신 말씀에 대해서도, 이미 얘기한 내용이 저의 응답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인간의 작은 노력’을 냉소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인간의 작은 노력’이 국가에 횡령당하게 둬서는 안 된다, 피해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는, 그 자신은 훌륭한 개개인들의 바람을 국가의 법적 책임 회피를 위해 이용하게 내버려둬서는 안된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일본은 ‘반동기’
선생님은 쇼와 천황이 타계한 1989년 1월 31일, 쓰루미 ??스케씨 등의 지식인들과 함께 성명을 발표한 일을 이번의 ‘반론’에서 상기하셨습니다. “우리 국가는 식민지지배를 청산하지 않았다”, 식민지 지배를 통해 조선민족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준 것을 사죄한다는 국회결의를 채택하라고 요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도 그때 제가 느낀 환희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쇼와 천황의 타계를 계기로 ‘1억 총 면책’ 상태로 우루루 몰려가려던 당시 일본사회에서 매우 귀중한 저항의 움직임이었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연대의 맹아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한국 민주화투쟁의 전진에 고무받아, 한일 민중간의 연대가 급속도로 진전되는 듯 보였던 순간”의 한 정경이며, 와다 선생님은 그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의 순간은 글자 그대로 불과 몇 년만에 사라졌습니다.
와다 선생님은 제가 쇼와 천황 사망에 즈음해서 쓴 ‘제4의 호기’를 들어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와다 ‘반론’) “(서경식은) 식민지지배는 천황의 이름으로 행한 것인데 천황이 사망한 일본은 ‘천황의 전쟁책임을 면책함으로써 일본인 전체의 1억 총면책이 이뤄지도록’ 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아사히신문> 사설이 천황의 책임을 면책하고, 미국의 천황제 온존에 감사하고 있는 데에 분개하면서 논란을 벌인다. 서씨는 이 때문에 일본에 절망한 듯하다.”
이 인용은 대체로 저의 논지를 그대로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명확한 것은 그에 대한 와다 선생님 자신의 견해입니다. 앞서 얘기한 대로 와다 선생님 등은 일본의 조선식민지 지배가 청산되지 않은 점을 문제삼고 그것을 ‘사죄’하는 국회결의를 촉구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들이 문제시하신 미결 과제들 중에는 당연히 천황제 및 천황 개인의 책임이라는 문제도 포함돼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저는 아무래도 나이브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천황의 전쟁책임 및 식민지지배 책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시의 <아사히신문> 사설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천황을 면책한 것은 잘했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식민지 지배의 죄를 사죄한다는 문제의식과 미국의 천황제 온존에 감사한다는 의식은 아무리 봐도 논리적 부정합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전후 50주년 기자회견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국가들의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고 얘기한 직후에 기자로부터 천황의 전쟁책임에 대한 질문을 받고 “아, 그것은 없다”고 즉답을 한 무라야마 총리의 스탠스(자세)와 그 비논리성에서 합치하는 것이겠지요. 즉 원칙을 버리고 여당화의 길을 택함으로써 결국은 자멸에 이르게 된 당시 사회당의 스탠스입니다.
‘제3의 호기’를 살려낼 수 없었다, 연대의 희망은 1990년대 중반까지 가면 혼미에 빠졌고, 사태는 악화돼 일본사회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긴 반동기’에 돌입했다. 그것이 저의 인식입니다. 이 인식을 와다 선생님은 “현실무시의 폭론이다”라고 일도양단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럴까요?
1990년에는 가네마루·다나베 대표단이 북조선을 방문해서 일조교섭이 개시됐다고 말씀하십니다만, 그 뒤 국교교섭은 좌절되고 지금 일본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는 최악의 대립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제기돼 1993년에는 고노 담화가 나왔고, 1995년에는 무라야마 담화가 나오지 않았느냐고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지난 1월28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위안부 피해자 쉼터 ‘평화의 우리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12·28 합의가 국제인권기준과 유엔 권고에 부합하는지를 묻는 유엔 청원서 제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그러나 그 뒤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가 납득할 수 있는 해결’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일본사회에서는 관민 모두의 역사 수정주의 앞에 공격의 표적이 돼 왔습니다. 1997년에는 대다수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등장했던 ‘위안부’에 관한 기술이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국가주의와 배외주의가 고조되고 거리에는 혐한론과 헤이트 스피치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교육과 보도에 대한 국가 개입, 비밀보호법, 안보법제, 공공연한 개헌 기도…. 이런 상황을 ‘반동기’라고 부르는 것이 ‘현실무시의 폭론’인가요? 현실주의자인 와다 선생님이야말로 ‘현실’을 보지 못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요?
“1989년의 씨(서경식)는 2년 전의 한국 민주혁명의 승리도 무시하고 있다. 그것이 일본에 영향을 주었고, 다음해인 1990년에는 가네마루·다나베 대표단이 북조선을 방문해 일조교섭을 개시하기에 이른다. 위안부 문제가 제기됐고 1993년에는 고노 담화가 나온다. 나아가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로 이어진다. 서경식씨는 이 전진을 전진이라 인정하지 않고, 1990년대에 들어서면 반동일색이 된다고 본다.”(와다 ‘반론’)
먼저 말할 것도 없이, 저는 ‘6월 항쟁’을 정점으로 한 한국 민주혁명의 승리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의 육친을 포함한 정치범들도 이 혁명의 결과 출옥할 수 있었습니다. 그 승리를 제가 “무시하고 있다”는 선생님의 해석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한국의 민주혁명을, 일본이 반동기에 들어갔다는 저의 논의에 대한 반증으로 들고 나오는 발상이 불가해합니다. 저는 ‘일본의 반동기’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한국 민주혁명의 승리는 ‘일본의 반동기’에 대한 반증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의 진보적 리버럴 세력이 한국 민주혁명의 승리라는 호조건을 살리지 못하고, 가네마루 방조단으로부터 무라야마 담화에 이르는 겨우 5년 정도의 ‘순간’ 뒤에 ‘긴 반동기’의 도래를 허용하고 만 것에 대한 사상적 반성재료가 돼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그 한국도 지금은 ‘반동기’를 맞고 있다는 것은 지난번 공개서한에서 언급했습니다.)
“일본인과 조선민족은 변함없이 적대관계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1989년의 서경식씨 예언이었다”고 와다 선생님은 쓰셨습니다만, 저는 ‘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그런 피상적인 인식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두 민족은 서로 ‘적’이 아니라 일본국과 그 국민이 식민지 지배라는 과거와 계속되는 식민지주의를 극복하지 않는 한 조선민족은 영원히 저항을 그만둘 수 없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1989년의 저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유감스런 일입니다.
일본인의 자율적인 힘으로 ‘자기변혁’을
와다 선생님은 “2016년의 일본에서 나는 적어도 일·한 양 국민의 관계는 제3의 찬스를 살려서 변했다고 생각한다. 한국 국민의 협력을 믿고, 일본국민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을 계속하는 것-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일본국민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을 계속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한국 국민의 협력을 믿고”라는 말씀의 함의는 무엇일까요? ‘한국 국민’뿐만 아니라 대다수 조선민족은 식민지주의와 싸워 자기변혁을 하고자 하는 ‘일본인’에게 협력(오히려 ‘연대’)을 아끼지 않겠지요. 그러나 자기변혁의 과제에 등을 돌리고 국가책임을 회피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저항을 계속하겠지요. ‘한국 국민의 협력을 믿고’ 같은 말을 하기 전에 자기자신들의 힘으로 자기변혁을 위한 싸움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990년대 중반에 일본의 사상계에 중대한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와다 선생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제가 느낀 바를 얘기하자면, 앞뒤가 맞지 않는 ‘현실주의’가 그 이전의 ‘초심’을 대체해버렸습니다. 일본이 ‘바뀔’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시던 선생님이 일본은 변하지 않는다고 거듭 말씀하시고, 피해자들에 대해서까지 그것을 설득하려 들게 됐습니다. 이 전환은 지난 번의 공개서한에 썼듯이 동서대립시대의 종언과 사회당(진보파 리버럴 세력)의 자멸이라는 현상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듯합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그것은 사상적으로도 일본 근현대사상의 중요문제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맞서 해명하려는 노력을 다하지 않는 한 현상을 이해하고 타파할 수 없겠지요. 저는 예전(1980년대)의 와다 선생님과 같은 지식인들이 나타나 ‘일본의 자기변혁’이라는 어려운 과제에 맞서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지식인 중에서 이 사상적 과제와 진지하게 격투를 벌이는 사람들이 지금 얼마나 존재할지 생각해보면 적막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현상이야말로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개별과제를 넘어 동아시아의 평화구축에 참으로 위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논의에
보탬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 제 생각을 정직하게 선생님께 털어놔 봤습니다. 솔직한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2016년 4월 8일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