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후 서울 지하철 강남역 10번 출구에 강남의 한 노래방 화장실에서 살해된 여성 피해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
[토요판] 뉴스분석 왜?
서초동 노래방 여성혐오 범죄
▶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의 한 노래방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잔혹하게 살해됐습니다. 범인은 1시간30분 동안 화장실 안에서 범행 대상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9시간 만에 붙잡힌 범인은 “여성을 노렸다”고 경찰 조사에서 진술했습니다. 강남역엔 숨진 여성을 추모하는 이들이 모여들고, 일부에선 범인의 정신병력을 들어 사건을 ‘여혐 문제’로 몰지 말라며 반발합니다. 사람들은 같은 사안을 두고 왜 이리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걸까요? ‘우리 같이 문제를 풀어보자’는 응답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공통 감각이 발길을 이끈다. 여성들은 내가 표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떤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적지 않은 이들이 남녀 성 대결로 몰아가지 말라고 충고한다.
강남역 10번 출구를 바라보는 온도차
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19일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이 사건은 사회에 만연한 혐오가 문제이지 ‘여성만의 문제로 한정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다. 사회에 만연한 혐오도 문제고, 이 사건에서 ‘여성’을 삭제하려는 것도 문제다.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유머’(오유)도 ‘여자라서’ 죽었다는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도 ‘묻지마’ 살인을 가지고 여성 혐오로 몰아간다고 비난하면서 급기야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남자라서 죽은 천안함 용사들을 잊지 맙시다’라는 문구를 붙여 ‘노무현 외’의 이름으로 근조화환을 세웠다. 언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여혐-남혐 대결구도로 변질’ 운운하며 성 대결 구도를 만드는 데 힘을 낸다. 서초경찰서는 이 사건이 여성 혐오 범행이 아니라고 했다. 범인이 자백한 범행동기(여자들에게 무시를 많이 당해서)는 그의 정신질환 병력을 이유로 밀쳐지는 분위기다. 범인은 정신분열에도 불구하고 식당에서 일하고, 살인을 계획하고, 칼을 훔쳐서, 한 시간이 넘게 화장실에서 여성이 들어오기를 기다린 ‘환자’이다.
한 정신분열 환자의 우연적인 피해자 선택이라고 하는 입장과 여성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일어난 여성 표적 범죄라고 말하는 입장이 갈라지는 구분선은 ‘성별’인 것처럼 보인다. 여성들은 이 문제가 일탈적 개인의 우발적 범죄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하고, 남성들은 이런 여성들에게 여혐 문제로 몰아가지 말라고 비난하는 형국이다. 이 둘의 온도 차이는 꽤 크다. 이런 차이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 내가 이 글을 우아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얼마나 다르게 살아왔길래 이번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성을 두 개로 지정하는 세계에서 각각에게 얼마나 상이한 삶의 무대를 선사했기에 ‘서로’의 몸 경험을 이렇게 공감하기 어렵게 되었을까를 생각한다. 또한 서로 다르게 살았다고는 하지만 이 문제를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여성 살해’로 이해하는 일이 그렇게도 어렵고 화나고 억울한 일일까도 생각해본다.
‘더 이상 여성을 죽이지 말라’는 말에 대해서 한국 사회는 ‘남자도 죽는데?’라고 답하는 중이다. 내 상상력으로는 그 이상 황당하고 부적절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다. 이런 응답은 과거에는 답해진 적 없는 새로운 버전이다. 알다시피 여성이 표적이 되는 범죄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유영철도, 정남규도, 강호순도, 김길태도 주요 표적에서 ‘여성’을 제외한 적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한국 사회는 여성을 ‘보호’하고 ‘통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왔다. 여자화장실 비상벨은 그런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생겨났다. 여성의 옷차림, 활동시간, 주량에 대한 통제는 여성들이 쉽게 표적이 되기 때문에 만들어진 가부장의 지침들이고, 역설적으로 이것들이 여성이 주된 범죄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유영철·정남규·강호순·김길태…여성 표적 범죄가 있을 때마다
한국 사회는 ‘보호·통제’해왔다
‘여성살해’가 불편하단 반응에서
여성의 고립·절망·힘듦은 온다 나보다 덜 인간적인 인간을
만드는 데 혐오의 정서 활용
서초동 노래방 화장실 살인은
‘여자가 무시해서’라기보다
‘여자들마저’ 무시했기 때문 ‘묻지마 살해’가 주는 편안함 그런데 지금은 여성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사실 자체가 거부당하고 있다. 사람들은 ‘묻지마 살해’라는 말을 ‘여성 살해’라는 말보다 편안하게 느끼는 중이다. ‘묻지마’라는 말로는 적절한 대상자 선택을 위해 범인이 화장실에 숨어서 기다린 1시간30분이라는 시간을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묻지마’에 힘을 싣는다. 이유는 움직이는 성별관계 지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성은 화장실 비상벨이나 짧지 않은 치마, 밤 시간 외출 자제 등이 자신의 안전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다. 공교롭게도 눈치가 없는 일군의 무리는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 되지 않고 삶의 ‘주체’가 되겠다고 나선 여성들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아직 배우지 못했다. 남성 일부(?)는 집단적인 자기방어를 일으킨다. 유례없이 ‘남성’들이 이것은 ‘여성 살해’가 아니라 ‘묻지마’가 옳다고 말하는 일에 대동단결하는 모습은 그렇게밖엔 해석이 안 된다. ‘여성 살해’ 호명은 남성들에게 그 ‘불편감’을 감수해야 하는 비용을 발생시키며, 성찰 없이 그 비용을 감당할 마음이 일어날 리 없다. 그대로 토해지는 ‘불편감’은 이 사건에서 범인이 지목한 살해의 이유를 특별한 ‘이유 없이’ 삭제시키는 중이다. 가장 황당한 이유는 김복준 한국범죄학연구소 연구위원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문제를 여혐으로 봐 버리면 대한민국 여성들이 힘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여성의 힘듦은 이 사건에서 ‘여성’을 편의적으로 삭제하고 그 결과 여성의 안전을 발로 차버리는 그의 말에서 온다. 여성이 쉽게 원망의 대상이 되고 범죄의 표적이 되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외치는 여성들을 향해서 ‘여혐-남혐 구도로 몰아가지 말라’고 받아치는 바로 그들로부터, 여성의 고립과, 절망과, 힘듦이 온다. 여성 대상 범죄를 범죄의 오래된 유형으로 인식하고 공분하는 남성들이 있다. ‘잠재적 가해자’로 오인받는 불편감보다 ‘잠재적 피해자’로 살아가는 두려움이 더 구체적이고 중대한 피해와 연결된다는 사실과 직면하고, 여성을 잠재적 피해자로 만드는 사회 구조를 바꾸는 일에 힘을 보태는 사람들이 더 많을 거라 믿는다. 프로레슬러 김남훈과 투피엠(2PM) 황찬성처럼 말이다. 김남훈은 “이번 강남 노래방 살인사건은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여성 차별 살인’이 맞는 것 같다”고 정리해주었다. 정확한 명칭을 사용해서 이런 사건을 제대로 분석하고 대응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묻지마라고 하는데 제가 화장실 들어갔어도 그랬을까요?”라고 물으면서 젠더 위계가 이번 사건에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작동했다는 사실을 짚어주었다. 투피엠 황찬성도 “같은 남자였다면 그랬을까?”를 질문하면서 이번 사건이 “우발적 사고가 아닌 선택”이었다고 일갈했다. 이 사건이 “그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를 보여준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누가 이 문제를 성 대결로 만드나 이들의 지적대로 범인은 ‘여성’을 지목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만연한 여성 혐오의 정서가 자리한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나’라는 주체가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나’보다 덜 인간적인 인간을 만들어왔고, ‘덜 인간적인’ 인간을 만드는 일에 혐오의 정서가 활용되곤 했다. 유대인을 돼지라고 불렀던 나치, 흑인을 인간과 동물의 중간이라고 여겼던 백인, 인간과 자연을 구분한 뒤에 여성이 더 자연에 가깝다고 말해온 근대 남성의 언설 등은, 유대인-돼지-동물-흑인-자연-여성의 연결 속에서 ‘유대인, 흑인, 여성’을 ‘덜 인간적인’ 집단으로 감지되도록 도왔다. 여성을 도구로 사용하는 일에 큰 죄책감이 일어나지 않거나, 여성을 때리거나 살해하는 일이 다른 누구일 때보다 더 쉬운 건 (비단 물리적 힘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공기처럼 흘러다니는 여성-몸에 대한 혐오의 정서 덕분일 수 있다. 때문에 서초동 노래방 화장실에 숨어서 한 여성을 살해한 이는 ‘여자가 나를’ 무시해서 화가 났다고 말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여자들마저 나를’ 무시해서 화가 난 거다. 다른 이들의 무시를 참는 것보다 여자들의 무시를 참는 일은 더 어려웠을 거고, 갈수록 여성에 대한 원한은 커졌을 거다. 이 쌓여가는 원한이 그의 살해가 여성을 노린 ‘표적’ 살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조차도 그 이유를 몰랐을, 여성에게만 향하던 원한 말이다. <문화방송> 김세의 기자는 18일 에스엔에스를 통해서 이번 사건을 ‘미친 살인범이 저지른 일’로 일갈했다. 남자가 여자를 죽인 사건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도 잊지 않았다. ‘오늘의유머’에도 이번 사건을 굳이 남녀로 나누려 하는 것에 대한 꾸준한 비판이 이어졌다. ‘여자라서 죽었다’는 말이 ‘충격적’이라는 고백과 함께 남녀 대결로 몰아간다는 비난은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여든 ‘여자들’에게로 향했다. 이 사건을 두고 ‘인간성 미달된 사람이 (우위에 있을 때) 저지른 사건’이라는 댓글은 오유 개념댓글로 등극했다. 정치색은 달라도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의견일치를 보는 분위기다. 이 사건은 젠더 위계가 작동하는 사회와는 무관한 문제이며 ‘미친’ 혹은 ‘인간성 미달된’ 개인이 저지른 사고에 불과하다고 진단한다. 때문에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은 그 많은 포스트잇들은 피해자를 이용해 먹고 사회갈등을 조장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의 집단행동으로 매도됐다. 이 대목은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로 만들지 못해 안달난 사람이 보여준 잔혹함과 놀랍도록 닮았다. 아무것도 밝혀진 것 없이 교통사고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이야기를 우린 아직까지 듣는다. 진실을 밝힘으로써 ‘사람이 살 만한 세계’를 만들려는 사람들의 입을 갖은 방법을 동원해 틀어막는다. 이미 알고 있듯이, 말하는 입을 틀어막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여성 살해도 마찬가지다. 먼저 문제를 발견한 이들이 물꼬를 트고, 곁에 있는 이들은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애쓰면서 사건의 ‘본질’에 접근해가는 거고, 그런 힘들이 움직이면서 다른 세상으로 이동해가는 거다. 남녀 공용화장실은 죄가 없다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에서 ‘여성’을 삭제하는 일은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라고 말하던 사람들의 편협함에 빗댈 만하다. ‘여성들이 이렇게 일상적 위험 속에서 산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남혐’ 조장하지 말라는 생뚱맞은 말로 응대한다. 정신분열 환자에게 살해된 운 나쁜 여성 개인사로 정리됐다. 이제 응답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잠재적 가해자가 되는 불편감을 낯설게 바라볼 시간이다. 이건 상상력과 연대감을 선사할 것이다. 엘리베이터, 화장실, 버스 안, 길거리, 놀이터 등 어디에서건 여성들은 쉽게 크고 작은 ‘묻지마’ 폭력에 노출되어 산다. 그리고 그런 ‘말하기’는 남성 혐오도 성대결 구조 조장도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고, 문제제기이며, 취약한 자들의 변화를 향한 몸짓이자,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이다. 남성이 여성을 공격하기 쉽게 기획된 세계를 이제는 좀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는 결의에 찬 목소리다. 성 대결 구도는 ‘여성이 죽는다’는 말에 ‘남자도 죽는데?’라고 응답할 때에만 성립한다. ‘여성이 죽는다’는 호소에 “그래, 같이 이 문제를 풀어보자”고 응답할 때 이 문제는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른 세계와 만날 수 있겠다. 상상력은 바로 그곳에서 가동될 거다. ‘남녀 공용화장실이 문제’라는 식의 맥 빠지는 말은 걷어치웠으면 한다. 화장실은 죄가 없다. 김홍미리/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