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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20 19:49 수정 : 2016.05.21 18:20

시장 재임 중이던 1991년 ‘히로시마 평화선언’에서 일본의 식민지배 문제를 처음 언급한 히라오카 다카시 전 히로시마 시장은 19일 <한겨레>와 만나 “오바마 대통령이 사죄해야 한다”면서도 “과거를 잊으면 미래도 없다”는 명확한 역사인식을 드러냈다. 히라오카 전 시장은 기자로 일하던 시절 최초로 한국인·조선인 피폭자 문제를 기사로 쓰기도 했다. 사진 길윤형 특파원

[토요판] 뉴스분석 왜?
히라오카 다카시 전 히로시마 시장 인터뷰

▶ 27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앞두고, 그가 히로시마 평화공원 안에 있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에까지 발길을 옮길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히로시마 시가 매년 8월6일(원폭 투하일)에 발표하는 ‘히로시마 평화선언’에 일본의 식민지배 문제를 언급한 히라오카 다카시 전 시장에게 오바마 대통령의 이번 방문을 둘러싼 히로시마의 분위기와 한국인·조선인 문제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히라오카 시장은 어린 시절 조선에 살았던 체험 등이 계기가 돼 일본에서 처음 한국인·조선인 피폭자 문제를 기사로 쓴 인물이기도 하다.

27일로 예정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어떻게 바라볼지를 두고 한국 여론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핵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이상엔 공감하면서도, 이번 방문이 일본의 가해 책임을 덜어내는 쪽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역대 히로시마 시장 가운데 유일하게 ‘히로시마 평화선언’에 식민지배 책임을 언급한 히라오카 다카시(89·사진) 전 시장은 “오바마 대통령이 사죄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면서도 “과거를 잊으면 미래도 없다”는 명확한 역사인식을 보여줬다. 오바마의 방문을 일주일쯤 앞둔 19일 히로시마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어린 시절 한반도와의 인연이 깊은 것으로 안다.

“부모님은 히로시마 사람이다. 오사카에서 결혼해 1927년 나를 낳았다. 아버지는 소학교 4학년 때 조선으로 건너갔다. 어머니 쪽 할아버지가 조선 웅기(현재 북한 지역인 함경북도)에서 목재 관련 일을 해 성공했다. 아버지를 불러 석탄 관련 일을 맡긴 것이다. 웅기, 온성 쪽에 탄광(유명한 아오지 탄광이 주변에 있다)이 있었다. 그 탄광을 경영해 석탄을 나진항을 통해 일본으로 나르는 일을 했다. 처음 웅기에 갔을 때 스즈란(은방울꽃)이 군집해 피어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털게가 많아 쪄서 산처럼 쌓아놓고 먹었다. 아버지도 젊고 회사의 사장 비슷한 일이어서 지금 생각하면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식민지배 등 역사 문제에 대한 인식은 전혀 없었다.”

1965년 한국인·조선인 피폭자 첫 보도

-당시 조선에 대한 기억은 어땠나?

“서울의 경성중학교(일본인 학교)에 시험을 쳐 들어갔다.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내가 좀 건방졌는지 교사들에게 엄청 두들겨 맞았다. 그래서 학교가 싫었다.(웃음) 교육엔 일종의 조선인 멸시 같은 게 있었다. ‘우린 일본인이니까 조선인들에게 비웃음을 사면 안 된다’는 것을 늘 가르쳤다. 1학년 때 양식 풀코스를 어떻게 먹는지 배웠다. 조선인에게 바보 취급을 당하면 안 되니 유럽의 매너를 배워 몸에 배게 하라는 것이었다. 전쟁 중이어서 (음식은 안 나오고) 종이에 인쇄한 그릇과 나이프를 놓고 공부를 했다.

난 학교가 싫어서 중학교 4학년 때(당시 중학교는 5년제였다. 4학년부터 상급학교 진학이 가능했다) 육군사관학교나 해군병학교(해군사관학교)에 가려 했다. 그런데 키가 작아서 1944년 경성제대 예과 의학부에 시험을 쳐서 붙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니 전쟁에 끌려가 죽지 않으려면 군의관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1945년 4월이 되자 일본의 모든 중학교 이상의 학생들을 동원해 공장 등에 가서 일을 하게 했다. 전쟁으로 노동력이 부족하니 아이들마저 일을 시킨 것이다. 나는 흥남의 일본질소 공장에서 일을 하다 패전을 맞았다. 이후 8월20일쯤에 경성의 집에 돌아오니 부모님이 안 계시고 이웃에 살던 (한국) 사람이 있었다. 그가 ‘이 집은 내가 접수했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간난초(지금의 한남동)에 있는 별장으로 향했다. 거기 부모님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역사인식이 전혀 없었다. 전쟁에서 진 뒤에도 ‘우리는 거류민으로 남는 게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는 이들도 있었다. 안이한 생각이었다. 조선이 독립을 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태어나 자란 이들도 있어서 (조선도) 당연히 우리 땅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일본에 돌아와 1952년 히로시마에 거점을 둔 <주고쿠신문>에 입사한다.

“예전에 경성제대 예과 2년이었으니, 일본에선 구제 고등학교 2학년이 된다. 히로시마 고등학교에 들어가 와세다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했다. 집안이 망해서 의학 공부는 계속할 수 없었다. 당시는 일본에도 취직처가 없었다. 아버지가 ‘다시 히로시마로 돌아오라’고 해 주고쿠신문에 입사했다. 당시 좋은 기자들이 전쟁으로 죽거나 전후 레드퍼지(공산주의자 추방 정책)로 회사에서 쫓겨나 있었다. 위에 선배들이 없어서 엄청 빨리 출세할 수 있었다.(웃음)”

-1965년에 처음 한국인·조선인 피폭자 문제를 보도하는데.

“1965년에 일-한 국교정상화가 이뤄졌다. 한국은 예전에 인연도 있고, 국교 정상화를 했으니 기사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기획서를 냈지만 통과되지 않았다. 당시 해외에 특파원을 두고 있는 것은 <교도통신>이나 <아사히신문>과 같은 큰 회사뿐이었고, 해외 출장을 가 기사를 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전해에 한국인·조선인 피폭자 문제에 대한 편지를 받은 적도 있어서 꼭 뭔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회사에 휴가를 달라고 해서 한국에 취재를 갔다. 기사에 사진 하나를 넣어 회사로부터 5000엔 원고료를 받고 12월에 10회 기사를 썼다. 그 돈으로 왕복 항공료를 메웠다(웃음).

그때 처음 한국인 피폭자를 만나 기사를 썼다. 친구 중에 이와나미서점 사장을 지낸 야스에 료스케(1935~1998)가 있었다. <주고쿠신문>에 기사를 쓰면 히로시마에서만 볼 수 있으니 <세카이>(일본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잡지. 한국의 <창작과 비평>에 해당)에도 쓰라고 해 이듬해인 1966년 2월호에 실었다. 그러니 한국의 영사관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한국은 박정희 군사정권 시기여서 <세카이>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한국에 비자 신청을 하면 쉽게 나오지만, 내 경우엔 시모노세키에 있는 영사관에서 불렀다. 영사관에서 ‘히라오카상 한-일 우호를 위해 좋은 기사를 써달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시장 재임 중이던 1991년
‘식민지지배 죄송’ 내용 담은
히로시마 평화선언 발표
우익들 몰려와 항의하기도
‘죄송’ 아닌 ‘잘못했다’ 했어야

피폭자에겐 38도선도 없어
민단·총련 통일비 건립은 좌절
핵무기 용인하려는 아베의 야심
“오바마 대통령, 일본인 말고
다른 피해자 있다는 거 알아야”

평화선언 참여 뒤 우익들 거센 저항

-기사에 대한 반향은 있었나?

“별로 없었다. 일본의 피폭자 운동이 한국인·조선인 피폭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1975년부터였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상대를 안 해주고 관심도 없었다. 나는 한국 생활을 해봤고 역사 공부를 해서 ‘일본에 책임이 있다. 이를 모른척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일본인은 피해자, 피해자’라고만 했다. 그러나 일본은 가해자이기도 하다. 이런 것을 자각하지 않으면 말하는 평화는 ‘인치키’(가짜)라는 게 내 일관된 주장이다. 일본 전체가 아시아를 계속 멸시해왔다. 그래서 평화를 호소하는 히로시마는 아시아가 아니라 대부분 유럽·미국으로 갔다. 특히 유럽은 냉전기였기 때문에 모두가 핵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히로시마의 평화는 아시아의 이해를 얻는 평화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인 피폭자 얘길 해도 반응이 없고, 혁신계 단체들도 거부반응을 보였다. 한국은 군사정권이고, 미국의 괴뢰정권이라는 얘기였다. 나는 ‘그래도 사람이, 피폭자가 살고 있는 게 아니냐 그러면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얘기지만, 당시 일본에선 그런 분위기가 쭉 이어져 왔다.”

-1991년 시장 재임기에 히로시마 평화선언에서 처음 식민지배 문제를 언급하는데.

“내가 시장이 될 때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개최가 정해져 있었다. 난 아시안게임을 하면서 아시아에 사과하지 않고 대회만 치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시아와 상호 이해를 넓히는 계기로 삼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은 예전 식민지지배와 전쟁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사람들에게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겼다. 우리는 이런 일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한다(申し訳なく思う)’는 내용을 넣었다. 그때 전국에서 엄청나게 우익들이 몰려와 시청을 둘러싸고 집에까지 와 시끄럽게 굴었다. 나중에 안사람이 이웃집을 돌며 사과를 했다.

우익들의 저항이 엄청났다. 이들은 ‘죽은 영령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침략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실은 죄송하다가 아니라 ‘잘못했다’고 말을 했어야 했다. 그러자 ‘이 선언이 히라오카 개인의 생각이냐, 히로시마 시민의 생각이냐. 히로시마 시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래서 ‘난 선거에서 뽑힌 시민의 대표’라고 말하고 밀어붙였다. 그 전해에 나가사키 시장인 모토시마 히토시(1922~2014)가 (일왕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는 발언으로 우익에게) 총을 맞은 적이 있어, 나도 위해를 당하지 않을까 다소 위협을 느꼈다.”

-일본 사회가 한국인·조선인 피폭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역시 손진두 재판(한국인 피폭자 손진두가 피폭 치료를 위해 1970년 일본에 밀항한 사건. 이와 관련해 6년간의 긴 재판이 이어진다)이었나?

“뭔가 계기가 필요했는데, 우연히 손진두의 밀항이 있었다. 손진두와 관련해선 (밀항자라는) 좀 좋지 않은 말도 있었다. 나는 ‘피폭자는 좋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피폭을 당한다’고 말했다. 손진두의 사진을 가지고 (그가 예전에 살았다고 주장하는 히로시마 시내의) 미나미간온 지역에 갔다. 후지이, 마쓰우라라는 두 사람이 ‘이것은 미쓰야마(손진두의 창씨명)’라고 증언을 해줬다. 피폭자임이 증명이 됐으니 지원을 시작했다. 나는 (신문사 직함이 있어) 전면에 못 나서고 주로 재판을 위한 자금을 모으는 일을 했다.”

-1999년 시장 말기에 히로시마 평화공원 밖에 있던 한국인 원폭피해자 위령비를 공원 안으로 옮긴다.

“처음 비 건설 과정에 여러 내부 사정이 있었다(꼭 차별 때문에 비가 밖에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의미). 그러나 히로시마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차별이라 보고 있고 아이들마저 왜 차별을 하냐는 얘기를 했다. 하나하나 변명을 못하는 상황이 됐다. 옮기는 데 민단이 나서면 총련이 반발하기 때문에 비를 만든 이에게 개인 자격으로 시장에게 진정을 넣으라 했다. 이를 근거로 안으로 옮겼다. 피폭자에겐 38도선이 없다. 민단과 총련을 아우르는 통일비를 세우자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게 히로시마 철학

-27일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한다.

“나는 그가 히로시마에서 사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입장도 있으니 사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왜 오는가라는 질문이 나온다. 미국 대통령으로 오는 이상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사죄, 아니면 원폭 투하가 옳았는지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프라하 연설 이후 핵무기 철폐와 관련해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연설 이후 7~8년 동안 뭘 했는가. 결국 정치가로서 자신의 명예심을 위해 오는 게 아니냐고 생각한다. 게다가 시간문제로 피폭자들과 만나지도 않는다고 한다. 일본 정부도 처음부터 사죄를 요구하지 않고, 히로시마현 지사, 시장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화가 난다.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의 명예를 위해 꽃길을 깔기 위해 오는 것이라면 히로시마에 좀 무례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퇴임 이후 개인 자격으로 다시 히로시마에 와 원폭 피해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한다면 그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이번 방문에 아베 신조 총리가 따라온다. 아베 총리는 자신의 지지율을 높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사상은 완전히 다르다. 아베 총리는 핵무기를 용인하고, 이를 갖고 싶어 한다. 또 (지난해 9월 안보법제 제·개정으로)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었다. 히로시마의 철학은 ‘전쟁을 하지 않는다. 핵 억지력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한국인 위령비 방문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아마 갈 틈이 없다며 안 갈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오바마 대통령이 일본인 말고 다른 피폭 희생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원폭은 국적 없이 모든 인간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이 비를 보고 그런 점을 느껴야 한다. 일본의 정치가는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모두 잊고 미래지향만을 말한다. 미국도 일본도 현재 (원폭 투하 문제와 관련해) 미래지향을 내세우고 있지만, 과거를 잊으면 미래가 없다.”

히로시마/글·사진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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