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뉴스분석 왜?
‘박원순 제압 문건’ 사실 확인되기까지
2013년 5월30일 시민사회단체들이 국가정보원의 ‘박원순 제압 공작’을 비판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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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확인 중 만난 국정원 관계자
“하루면 확인할 수 있다”고 하더니
“내일” “일주일 정도” 계속 말바꿔
보도 뒤엔 “맞다 아니다 말 못해” 최근 <시사인> 보도 통해
전직 국정원 직원들 “맞다” 확인
당시 검찰은 채동욱 총장 쫓겨난 뒤
한 달도 안 돼 국정원에 면죄부
내년 대선에서 국정원에 역풍 가능성 2013년 5월 초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기자가 건넨 A4용지 총 6쪽 분량의 보고서를 유심히 살폈다. ‘서울시장의 좌편향 시정운영 실태 및 대응 방향’(박원순 문건·5쪽)과 ‘좌파의 등록금 주장 허구성 전파로 파상공세 차단’(반값 등록금 문건·1쪽)이란 제목의 문서였다. 두 문서의 생산 부서는 ‘2-1’로 표기되어 있었다. ‘2-1’은 국내 파트를 담당하는 국정원 2차장 산하 국익전략실을 의미했다. 그는 “국정원 문서라며 확인을 요청하는 곳이 많다. 대부분 양식도 전혀 틀린 가짜였다. 이 문건은 상당히 비슷하니 가져가서 따로 좀 확인해 봐야겠다”고 했다. “하루면 확인 가능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흔쾌히 문서 사본 두개를 모두 넘겼다. 그날 저녁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확인에 시간이 더 걸린다. 내일이면 확인이 가능할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음날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일주일 정도는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확인 시간이 끝도 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국정원이 사실 확인을 거부한 것으로 판단한 <한겨레>는 2013년 5월 국정원이 박원순 서울시장을 상대로 공작을 벌인 정황(15일)과 반값 등록금 운동 차단 계획을 세운 사실(19일)을 잇달아 보도했다. 보도 뒤 이뤄진 통화에서도 국정원 관계자는 문건의 진위를 밝히지 않았다. “문서 자체가 여러 번 복사됐기 때문에 이 문건이 국정원 것이 맞거나 아니라고 정확히 말할 수 없다. 감정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데 나오더라도 가짜일 확률 몇 퍼센트, 진짜일 확률 몇 퍼센트라는 식으로 나온다.” <한겨레> 보도 이후 국정원에서는 문건 유출 경위를 확인하기 위한 대대적인 감찰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허위 문건을 두고 감찰을 벌일 이유는 없다. 하루면 확인 가능하다더니 문건 내용은 정교했다. ‘박원순 문건’은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끝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던 2011년 11월24일 작성됐다. 하지만 박 시장의 재건축 사업 보류부터 우면산 산사태 재조사, 무상급식 정책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망라해 꼼꼼하게 다뤘다. 국정원이 제시한 대응 방안도 감사원 감사 촉구, 고소·고발,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 동원 등 다양했다. 당시 박원순 문건을 확인했던 서울시의 한 고위 관계자는 “검찰이나 경찰 정보 보고서도 본 적이 있는데 이 문건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보고서는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직원들에게 회람이라도 시켜주고 싶을 정도다”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만큼 치밀하게 작성된 문건이었다. 국정원이 ‘박원순 죽이기’에 나선 시기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촛불시위) 이후로 보인다. 국정원 안팎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명박 정부는 2008년 5월24일부터 시작된 촛불시위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10%대까지 떨어졌다. 새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위기에 빠져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식물정부가 된 셈이다. 이 전 대통령은 자신에게 커다란 좌절을 안겨준 촛불시위의 배후에 박 시장이 있다고 보고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의 인연이 간단치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은 서울시장이던 2002년부터 3년8개월 동안 ‘아름다운재단’이 환경미화원과 그 자녀들을 돕기 위해 만든 ‘등불기금’에 월급 전액을 기부했다. 2억원이 훌쩍 넘는 돈이었다. 당시 재단 상임이사를 맡고 있었던 박 시장이 이 전 대통령에게 직접 요청하면서 기부가 성사됐다. 이 전 대통령은 박 시장이 상임이사로 일했던 ‘아름다운가게’ 행사를 지원하며 이 단체의 명예고문을 맡기도 했다. 박 시장 역시 서울시 자문기구에서 활동하며 이 전 대통령에게 환경 정책 등을 조언했다. 박 시장을 여러 차례 도왔다는 이 전 대통령의 인식은 2011년 11월8일 국무회의에서 이뤄진 박 시장과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서울시장 당선 뒤 국무회의에 참석한 박 시장과 악수를 나눈 이 전 대통령은 “내가 시장 때 많이 협조했다”고 말했다. 박 시장도 “맞다. 그때는 자주 뵀다”고 답했다. 자신이 ‘많은 도움을 준’ 인물이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은 촛불시위의 배후였다는 생각이 이 전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혔던 원세훈 전 국정원장 역시 이런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국정원 관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원 전 원장은 촛불시위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한다. 대선 여론조작 활동을 벌인 국정원 심리전단이 원 전 원장 취임 후 강화된 것 역시 이런 흐름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원 전 원장은 취임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2009년 3월4일 심리전단을 독립 부서로 개편했다. 부서 수장도 2급에서 1급으로 격상시켰다. 애초 1개 팀이던 조직은 4개 팀으로 늘어났다. 촛불시위가 인터넷을 매개로 확대됐다고 보고 대응책을 내놓은 셈이다. 원 전 원장의 이 같은 의도는 국정원 실·국장 이상 간부와 지부장이 참석하는 부서장 회의 발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2011년 10월21일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인터넷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인터넷 자체가 종북좌파 세력들이 다 잡았는데, 점령하다시피 보이는데, 여기에 대한 대책을 우리가 제대로 안 세우고 있었다. 전 직원이 어쨌든 간에 인터넷 자체를 청소한다, 그런 자세로 해서 그런 세력들을 끌어내야 됩니다.”
국정원이 박원순 서울시장을 상대로 공작을 벌인 정황을 최초 보도한 2013년 5월15일치 <한겨레>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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