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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06 15:20 수정 : 2016.08.07 19:47

[토요판] 뉴스분석 왜?
‘박원순 제압 문건’ 사실 확인되기까지

2013년 5월30일 시민사회단체들이 국가정보원의 ‘박원순 제압 공작’을 비판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 ‘박원순 시장 제압 문건이 국정원에서 작성된 것이 맞다고 복수의 전직 국정원 관계자들이 증언했다’고 시사주간지 <시사인>이 최근 보도했습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끝난 지 한 달도 안 된 2011년 11월24일 작성된 이 문건은 박 시장의 재건축 사업 보류부터 우면산 산사태 재조사, 무상급식 정책 등을 망라하며 대응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3년 전 이 문건과 국정원의 관계를 최초 보도한 <한겨레21> 정환봉 기자가 당시 보도 전후 과정과 못다 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박원순 시장 제압문건’ 작성 여부
사실 확인 중 만난 국정원 관계자
“하루면 확인할 수 있다”고 하더니
“내일” “일주일 정도” 계속 말바꿔
보도 뒤엔 “맞다 아니다 말 못해”

최근 <시사인> 보도 통해
전직 국정원 직원들 “맞다” 확인
당시 검찰은 채동욱 총장 쫓겨난 뒤
한 달도 안 돼 국정원에 면죄부
내년 대선에서 국정원에 역풍 가능성

2013년 5월 초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기자가 건넨 A4용지 총 6쪽 분량의 보고서를 유심히 살폈다. ‘서울시장의 좌편향 시정운영 실태 및 대응 방향’(박원순 문건·5쪽)과 ‘좌파의 등록금 주장 허구성 전파로 파상공세 차단’(반값 등록금 문건·1쪽)이란 제목의 문서였다. 두 문서의 생산 부서는 ‘2-1’로 표기되어 있었다. ‘2-1’은 국내 파트를 담당하는 국정원 2차장 산하 국익전략실을 의미했다. 그는 “국정원 문서라며 확인을 요청하는 곳이 많다. 대부분 양식도 전혀 틀린 가짜였다. 이 문건은 상당히 비슷하니 가져가서 따로 좀 확인해 봐야겠다”고 했다. “하루면 확인 가능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흔쾌히 문서 사본 두개를 모두 넘겼다.

그날 저녁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확인에 시간이 더 걸린다. 내일이면 확인이 가능할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음날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일주일 정도는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확인 시간이 끝도 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국정원이 사실 확인을 거부한 것으로 판단한 <한겨레>는 2013년 5월 국정원이 박원순 서울시장을 상대로 공작을 벌인 정황(15일)과 반값 등록금 운동 차단 계획을 세운 사실(19일)을 잇달아 보도했다. 보도 뒤 이뤄진 통화에서도 국정원 관계자는 문건의 진위를 밝히지 않았다.

“문서 자체가 여러 번 복사됐기 때문에 이 문건이 국정원 것이 맞거나 아니라고 정확히 말할 수 없다. 감정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데 나오더라도 가짜일 확률 몇 퍼센트, 진짜일 확률 몇 퍼센트라는 식으로 나온다.”

<한겨레> 보도 이후 국정원에서는 문건 유출 경위를 확인하기 위한 대대적인 감찰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허위 문건을 두고 감찰을 벌일 이유는 없다.

하루면 확인 가능하다더니

문건 내용은 정교했다. ‘박원순 문건’은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끝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던 2011년 11월24일 작성됐다. 하지만 박 시장의 재건축 사업 보류부터 우면산 산사태 재조사, 무상급식 정책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망라해 꼼꼼하게 다뤘다. 국정원이 제시한 대응 방안도 감사원 감사 촉구, 고소·고발,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 동원 등 다양했다. 당시 박원순 문건을 확인했던 서울시의 한 고위 관계자는 “검찰이나 경찰 정보 보고서도 본 적이 있는데 이 문건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보고서는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직원들에게 회람이라도 시켜주고 싶을 정도다”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만큼 치밀하게 작성된 문건이었다.

국정원이 ‘박원순 죽이기’에 나선 시기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촛불시위) 이후로 보인다. 국정원 안팎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명박 정부는 2008년 5월24일부터 시작된 촛불시위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10%대까지 떨어졌다. 새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위기에 빠져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식물정부가 된 셈이다. 이 전 대통령은 자신에게 커다란 좌절을 안겨준 촛불시위의 배후에 박 시장이 있다고 보고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의 인연이 간단치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은 서울시장이던 2002년부터 3년8개월 동안 ‘아름다운재단’이 환경미화원과 그 자녀들을 돕기 위해 만든 ‘등불기금’에 월급 전액을 기부했다. 2억원이 훌쩍 넘는 돈이었다. 당시 재단 상임이사를 맡고 있었던 박 시장이 이 전 대통령에게 직접 요청하면서 기부가 성사됐다. 이 전 대통령은 박 시장이 상임이사로 일했던 ‘아름다운가게’ 행사를 지원하며 이 단체의 명예고문을 맡기도 했다. 박 시장 역시 서울시 자문기구에서 활동하며 이 전 대통령에게 환경 정책 등을 조언했다.

박 시장을 여러 차례 도왔다는 이 전 대통령의 인식은 2011년 11월8일 국무회의에서 이뤄진 박 시장과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서울시장 당선 뒤 국무회의에 참석한 박 시장과 악수를 나눈 이 전 대통령은 “내가 시장 때 많이 협조했다”고 말했다. 박 시장도 “맞다. 그때는 자주 뵀다”고 답했다. 자신이 ‘많은 도움을 준’ 인물이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은 촛불시위의 배후였다는 생각이 이 전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혔던 원세훈 전 국정원장 역시 이런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국정원 관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원 전 원장은 촛불시위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한다. 대선 여론조작 활동을 벌인 국정원 심리전단이 원 전 원장 취임 후 강화된 것 역시 이런 흐름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원 전 원장은 취임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2009년 3월4일 심리전단을 독립 부서로 개편했다. 부서 수장도 2급에서 1급으로 격상시켰다. 애초 1개 팀이던 조직은 4개 팀으로 늘어났다. 촛불시위가 인터넷을 매개로 확대됐다고 보고 대응책을 내놓은 셈이다.

원 전 원장의 이 같은 의도는 국정원 실·국장 이상 간부와 지부장이 참석하는 부서장 회의 발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2011년 10월21일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인터넷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인터넷 자체가 종북좌파 세력들이 다 잡았는데, 점령하다시피 보이는데, 여기에 대한 대책을 우리가 제대로 안 세우고 있었다. 전 직원이 어쨌든 간에 인터넷 자체를 청소한다, 그런 자세로 해서 그런 세력들을 끌어내야 됩니다.”

국정원이 박원순 서울시장을 상대로 공작을 벌인 정황을 최초 보도한 2013년 5월15일치 <한겨레> 기사.

“박원순 문건은 국정원 작품”

촛불시위의 배후라고 여겨진 박 시장을 국정원이 지속적으로 공격한 것 역시 같은 흐름으로 보인다. 박 시장이 서울시장에 당선된 직후 열린 부서장 회의에서 원 전 원장은 “서울의 경우에는 비정당, 비한나라당 후보가 시장이 됐는데 그쪽에서 내놓은 게 문제”라며 “내놓은 것 중에서 두 번째 공약이 보니까 ‘국가보안법 철폐하겠다’는 거고, 세 번째가 ‘국정원 없애겠다’ 이런 쪽에 있는 사람이 시장이 됐는데 우리가 위기의식을 가져야 된다”고 말한다. 원장의 지시대로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은 박 시장을 비난하는 글을 끊임없이 인터넷 게시판과 트위터 등에 올렸다. 그들은 “행정경험 전혀 없이 협찬 인생으로 인생을 살아온 박원순” “종북 시장님” 등 원색적인 비난 글을 작성해 퍼뜨렸다.

국정원 3차장 산하의 심리전단이 대선 여론 조작을 벌인 사실이 드러나고 2차장 산하의 국익전략실이 정치 공작에 나선 의혹까지 불거지자 박근혜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박 대통령은 2013년 6월24일 대통령 주재 수석 비서관 회의에서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서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또 “대선 때 국정원이 어떤 도움을 주지도,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지도 않았다”고 덧붙였다. 선 긋기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선은 그어지지 않았다. 반값 등록금 문건 작성에 책임이 있다고 의심받는 인물은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 문건은 야권이 주장하는 반값 등록금 주장은 허구적이며 당시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과 민주당 정동영 의원이 자녀를 해외로 유학 보낸 점을 ‘이중 처신’이라고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반값 등록금 문건은 국정원 국익전략실 사회팀이 2011년 6월1일 작성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당시 사회팀 팀장은 추아무개씨였다. 그의 이름은 이 문건에 실명으로 등장한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 인수위원회(인수위)에 파견된 뒤 청와대에서 근무했다. 추씨는 애초 국정원이 인수위에 보낸 파견인원에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수위 쪽은 국정원이 추천한 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추씨를 사실상 발탁하는 방식으로 데려갔다.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추씨는 <한겨레>가 2013년 5월19일 반값 등록금 문건을 공개한 뒤 국정원으로 복귀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공작의 책임을 물어 ‘원대복귀’를 시켰을 것이라는 추측은 오해였다. 그는 2014년 국정원 인사에서 1급으로 승진해 2차장 산하 국내 정보 파트의 부서장을 맡았다. 정치공작을 한 것으로 의심받는 인물이 징계를 당하기는커녕 국내 정보를 총괄하는 자리로 올라선 것이다. 국정원 안팎에서는 추씨의 승진 배경에 청와대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벌어진 국정원의 정치공작은 여전히 단죄되지 않고 있다. 국정원 대선 여론조작 사건은 현재 서울고법에서 파기환송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박원순 문건과 반값 등록금 문건은 수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검찰은 2013년 10월7일 “문건의 형식이나 내용 모두 국정원 것으로 볼 수 없다”며 국정원에서도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고 말해온 두 문건을 너무도 손쉽게 허위라고 결론내렸다. 국정원 대선 여론조작 사건 수사를 의욕적으로 진두지휘했던 채동욱 검찰총장이 같은 해 9월13일 석연치 않은 ‘혼외자 의혹’으로 사퇴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검찰이 국정원에 면죄부를 쥐여준 것이다. 당시 검찰은 추씨를 비롯해 문건에 실명이 나온 국정원 직원이나 국익전략실 관계자들 상대로 소환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해당 문서의 진위를 밝히기 위한 압수수색도 없었다. 단지 국정원의 ‘다른 문서’와 형식이 같지 않다는 주장만 내세웠다. 그 ‘다른 문서’란 검찰이 압수수색한 것이 아닌 국정원이 검찰에 제출한 문서였다. 국정원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제작한 문서 형식일 수 있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았다.

얼기설기 덮어버린 사건은 국정원에 함정이 되어 돌아왔다. 최근 시사주간지 <시사인>은 ‘복수의 전직 국정원 관계자들이 (박원순 문건은) 국정원에서 작성된 문건이 맞다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

국정원의 얇은 방패

국정원은 박원순 문건과 반값 등록금 문건을 허위라고 결론내린 검찰 수사 결과를 방패로 삼고 있다. 하지만 방패는 얇고 견고하지 않다. 정권 말기에 들어서면서 권력 누수 현상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30% 수준으로 떨어졌고 이번 정권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해온 것으로 알려진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을 둘러싼 의혹이 우후죽순 불거지고 있다. 여소야대의 국회 상황도 만만치 않다. 더구나 박원순 시장은 내년으로 바싹 다가온 대통령 선거의 유력 후보다. 박 시장을 상대로 한 국정원의 정치공작 의혹이 파괴력 있는 이슈로 떠오를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의미다. 이미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1일 “국회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뤄 정보기관에 의한 정치공작이 이 땅에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2013년 대선 여론조작 사건, 2014년 서울시 간첩사건 증거 조작, 2015년 내국인 대상 해킹 프로그램 사용 의혹 등 해마다 논란을 일으킨 국정원이 올해도 이슈의 중심에 설 가능성이 커졌다.

“매년 문제가 생기다 보니 이제 국정원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아도 아니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어차피 아무도 안 믿을 것 같으니 말이다.” 한 국정원 직원의 말이다. 그의 말은 지금 국정원이 겪고 있는 곤궁한 처지를 잘 표현해준다.

정환봉 <한겨레21>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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