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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12 19:06 수정 : 2016.08.12 20:00

[토요판] 뉴스분석 왜?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말하지 않은 진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모티브가 된 ‘엑스레이(X-Ray) 작전’은 인천 앞바다의 영흥도를 거점으로 한 달여 동안 벌어진 해군의 첩보전을 일컫는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시기 덕적도와 영흥도에서 해군 첩보대에 의해 최소 100여명의 민간인이 부역 혐의로 처형됐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누적관객 560만명을 넘기며 흥행하고 있다. 한쪽에선 공짜표 논란도 있지만 보수진영은 ‘전 국민이 봐야 할 애국영화’라며 ‘띄우기’에 열심이다. 영화는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던 당시 해군 정보국 첩보대의 ‘엑스레이(X-RAY) 작전’을 모티브로 삼았다. 해군을 비롯해 비정규 정보부대인 켈로(KLO)의 활약상만 담은 영화에는, 이 작전과 상륙작전 과정에서 최소 200여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군과 미군에 의해 무고하게 숨졌다는 사실은 나오지 않는다. 영화가 말하지 않은 인천상륙작전의 진실을 취재했다.

“인천상륙작전 시 미군 폭격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주민들 이야기는 영화 속에 나오지 않더군요. 자다가 졸지에 몰살된 주민이 수두룩한데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지난달 말 시사회에서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본 한인덕(73·여)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야속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성패를 가늠하는 핵심지역이던 월미도의 주민들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혹독한 피해를 입었지만 승전의 기억만 담은 영화에서 이들의 고통은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폭격으로 고향을 잃고 평생 가난에 시달린 한 위원장은 12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한탄했다.

“첩보원들의 활약과 희생만 담겼지 주민들의 참혹한 희생은 찾을 수 없었다. 국민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영화대로만 기억하게 될 텐데 그게 가장 걱정이다.”

영화에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의 월미도 폭격으로 민간인 100여명이 집단희생된 사실도 나오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맥아더는 한국의 승리를 위해 분투하지만, 실제 그는 중국군이 개입하자 26기의 원자폭탄 사용을 건의하는 등 한국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대상지의 하나로 여긴 인물이었다.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2008년 3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의 월미도 폭격으로 민간인 거주자 100여명이 집단희생된 사실을 규명했다. 미군의 무차별적 폭격은 정부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인천상륙작전>에는 월미도가 미군의 폭격으로 ‘앙상하게 변해버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보상은 없었다. 전쟁 뒤 월미도에 군사기지가 들어서면서 강제이주된 원주민들은 60년이 넘도록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말하지 않은 진실은 이뿐이 아니다.

만삭 임신부에게도 무차별 사격

영화는 북한군으로 위장한 해군 대위 장학수(이정재)와 그 대원들이 적성지역인 인천에서 벌이는 첩보전을 ‘엑스레이(X-Ray) 작전’이라고 명명한다. 영화와 달리 실제 엑스레이 작전은 인천 앞바다의 영흥도를 거점으로 한 달여 동안 벌어진 해군의 첩보전을 일컫는다. 영흥도와 인근 덕적도를 탈환하는 일명 ‘이(李)작전’과 함께 첩보전은 시작됐다. 해군이 덕적도와 영흥도를 탈환한 것은 이 두 섬이 인천 상륙이 예정된 길목에 위치한데다, 북한군 주둔지인 월미도 인근 지역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

월미도의 경우처럼 전쟁 시기 군사적 요충지가 되는 일은 주민들의 피해를 불러오는 저주에 가까웠다. 2010년 6월, 진실화해위는 엑스레이 작전 시기인 1950년 8월18일부터 9월 중순께까지 두 섬에서 최소 41여명에 이르는 비무장 민간인이 해군에 의해 집단희생된 사실을 확인했다. 이른바 ‘덕적·영흥도 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이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말하지 않은 두번째 진실이다.

1950년 8월18일 새벽 6시30분, 영국 순양함 케냐함과 캐나다 구축함 애서배스칸함의 함포 지원사격을 받으며 해군 육전대 1개 중대(중대장 장근섭 중위)가 인천 앞바다에 있는 덕적도 남쪽 진리 선착장에 상륙했다. 별다른 저항 없이 섬에 당도한 해군 육전대는 주민들을 앞세워 수색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비무장 민간인을 향해 경고 없이 무차별적인 총격이 이뤄져 최소 12명의 주민이 총상을 입거나 사살됐다.

진리 주민이던 한상열(당시 28살)씨는 산달을 앞두고 있었다. 이날 새벽부터 이어진 함포사격에 놀란 동네 주민들은 인근 야산으로 피했지만, 만삭의 몸인 그는 멀리 갈 수 없었다. 딸 김종해(당시 3살)와 함께 집 앞 ‘밭지름’ 해변에 모래 구덩이를 파 숨었다. 해변 쪽에서 인기척이 나자 마을 쪽으로 이동하던 해군 육전대는 확인도 없이 곧바로 총을 쏘았다. 한씨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딸 김씨는 팔에 관통상을 입었다. 상륙 해군의 길을 안내했던 마을 주민 송아무개(당시 18살)씨와 한상익씨도 밭지름 해변 쪽에서 울리던 한씨의 비명을 들었다. 동생(한상열)의 비명을 듣고 오빠 한상익이 달려가려 하자 상륙 지휘관인 문아무개 소위는 “전쟁이란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야. 어딜 가려 하냐?”며 못 가게 했다고 한다. 당시를 기억하는 마을 주민들은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덕적면 소재지로 넘어가는 고개 인근 나뭇더미에 숨어 있던 김현식, 홍노마, 고경기씨 등도 해군이 쏜 총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진술했다.

무차별 사격으로 부상자도 속출했다. 진리에서 구포초등학교(현 덕적초)로 넘어가는 야산 움막에 딸 김아무개(당시 7살)씨 등 세 자녀를 데리고 피신해 있던 주민 김주안(당시 34살·여)씨는 다리에 총을 맞았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딸 김아무개씨는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어머니와 함께 움막 안에 숨어 있는데 100여m 떨어진 곳에서 군인 5~6명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움막을 향해 총을 쏘았다. 당시 어머니 외에도 마을 주민 12명이 총상을 입었는데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모두 죽었다”고 진술했다.

당시 학도의용대장으로 마을 길을 안내하던 임아무개(당시 22살)씨는 함포사격을 피해 숨어 있던 주민들이 마구 사살되는 상황에서 군인들에게 30분만 시간을 주면 마을 사람들을 모이게 하겠다고 사정해 현 송정중학교로 주민들을 집결시켰다. 이윽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부역자 심사가 문 소위의 주도로 이뤄졌다. 9·28 수복 이후 서울을 비롯해 국군 점령지역 곳곳에서 법적 절차 없이 자행된 부역혐의 민간인에 대한 학살 사건의 빗장이 열린 것이다.

주민 손영창(당시 33살)씨는 시국대책위원인 문아무개씨 등의 고발로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면사무소에 구금된 뒤 같은 달 30일께 무인도인 먹염에서 사살됐다. 손영창의 아내와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했다는 장기천, 아들이 좌익이었다는 교사 배인섭씨 등 주민 9명도 부역 혐의를 이유로 비슷한 시기 먹염 등지에서 처형됐다. 국민보도연맹은 좌익활동을 한 이들을 계도하기 위해 1949년 정부가 만든 관변단체로 지역별 할당량이 부과돼 무관한 이들도 다수 가입이 이뤄졌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군경은 이들이 잠재적인 좌익동조자가 될 것으로 여겨 학살했고 그 희생자는 최대 30만명에 달할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해군과 미군 활약 그린 영화에는
상륙작전시 월미도 폭격 안 나와
2008년 진화위 “100여명 희생”
영흥도 거점으로 벌인 ‘X-Ray 작전’
영화의 모티브지만 사실과는 달라

영화 주인공인 해군 첩보대는
같은 시기 덕적도와 영흥도에서
주민 100여명 부역 혐의로 처형
유족들 “영화가 인천상륙작전의
전부라 여기지 않을까 가장 걱정”

“부역혐의자 처형도 주요 임무”

덕적도를 확보한 해군은 마을 청년들로 대한청년단을 조직한 뒤 문 소위 등 2명의 병력을 남겨놓은 채 19일 밤 9시 인근 영흥도로 이동했다. 이튿날인 20일 오전 702함을 떠나 영흥도에 상륙한 90여명의 병력과 합류한 본대는 별다른 교전 없이 이날 영흥도를 장악한 뒤 일부 경비병력만 남겨놓고 702함으로 귀함했다.

영흥도가 확보되자 섬에 상륙한 것은 손원일 제독의 지시를 받은 함명수 소령 예하의 해군 첩보대였다. 총 17명의 요원으로 이뤄진 첩보대는 24일 영흥도 남단 십리포 해안에 당도했다. 이들은 곧바로 인천지역 북한군의 배치 현황, 보급선 현황, 해로의 기뢰 매설 여부, 상륙지점 지형, 북한군의 방어진지 등 인천과 월미도를 중심으로 한 적정을 수집했다. 영화 주인공인 장학수 부대는 첩보대 내의 한 팀이던 임병래 중위 부대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병래 부대는 북한군과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해 인천 시내로 잠입하거나 월미도의 해안방어 태세를 확인하기 위해 작업 인부로 위장해 정보를 수집했다. 첩보대가 수집한 정보는 1950년 9월1일 영흥도에 은밀히 상륙한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국 소속 클라크 해군 대위가 이끄는 팀을 통해 극동군사령부로 송신됐다. 9월14일 퇴각 과정에서 북한군의 영흥도 기습작전을 알게 된 임 중위와 대원 6명은 마지막 전투를 치르다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국방부가 발간한 엑스레이 작전의 전모다. 그러나 첩보대의 역할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영흥도의 부역 혐의자 처형도 첩보대의 주요 임무였다.

인공시기 농민동맹 분회장으로 활동한 이화선(당시 54살)씨는 9월14일께 십리포 해안으로 끌려가 처형됐다. 주민인 박재봉과 그의 아내와 딸, 박준영, 김정섭 등 주민 12명도 비슷한 시기 영흥도 내리에 있는 버더니 고개 등지에서 사살됐다. 고향 영흥도에 남아 있던 남로당 최고간부 이승엽의 가족도 화를 피하진 못했다. 형인 이승화와 그 아내, 동생 이승태와 자식 등 가족 10명도 면사무소에 구금됐다가 9월10일께 십리포 해안으로 끌려가 처형됐다.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당시 해군의용대로 차출된 임아무개씨는 “해안 경비를 서던 중 최아무개 병조장이 주민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학도의용대로 차출된 임아무개, 김아무개씨 등도 해군 첩보대가 주민들을 십리포나 버더니 고개로 끌고 가는 것을 봤다고 진술했다.

한국전쟁 시기 인천·강화지역의 민간인 학살을 연구한 뒤 진실화해위에서 덕적·영흥도 사건을 직접 조사한 최태육씨는 10일 <한겨레>와 만나 “영흥도에서의 부역자 색출은 영화에서 정의롭고 용맹하게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나오는 해군 첩보대와 비정규 정보부대인 켈로(KLO)를 통해 이뤄졌다”며 “이들은 영흥도를 백색(안전)지역으로 만들겠다는 명분하에 다수의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처형했다”고 지적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참고인 진술과 자료를 바탕으로 인천상륙작전 당시 덕적·영흥도에서 희생된 민간인인이 100~15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지만 당시 진실규명된 희생자는 41명뿐이다. 보고서에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인천과 서울 지역에서 각각 400~1800명, 5000여명의 민간인이 부역 혐의자라는 이유로 군과 경찰에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군과 경찰의 일반적인 지휘·명령 체계를 고려할 때, 하급부대의 불법행위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의 책임은 단지 상급부대만이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국가에 귀속된다.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낸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전시 중이라도 작전 배후지역의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어떤 사전 경고나 대피 조치 또는 적법한 절차 없이 국민보도연맹원, 요시찰인, 부역혐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살해한 것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 생명권, 적법절차의 원칙, 재판을 받을 권리를 중대하게 침해한 것이고 명백한 권력 남용이며 불법적인 국가폭력”이라고 강조했다.

해군에 연행된 민간인들이 처형된 영흥도 십리포 해안은 미 해군 첩보대 클라크 대위 일행의 주둔지이기도 했다. 사진은 십리포 해안 모습. 최태육씨 제공
26기 원자폭탄 사용 건의한 맥아더

질문은 이어진다. 영화에서 장학수 부대가 탈취하려고 했던 북한의 기뢰부설 정보는 사실일까? 미국의 해군사 전공인 역사가 제임스 A. 필드는 자신의 저서 <미국 해군 작전의 역사: 한국전>(한국해양전략연구소)에서 “미국 극동해군사령관, 제7함대사령관 그리고 공격부대 사령관의 작전계획은 인천에 주둔한 적에게 기뢰부설 능력이 있다고 믿지만,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그 지역에 기뢰밭이 있다는 어떠한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고 언급했다”고 적고 있다. 기뢰 관련 정보는 영화적 허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맥아더는 영화에서처럼 진정 한국을 위해 전쟁 승리를 바랐을까?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그가 한국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맥아더는 중국군의 대공세에 대응해 1950년 12월 무려 26기의 원자탄 사용을 건의했다. 미 국방성과 의회는 원자탄 사용에 찬성했으나 미국의 보유량이 충분하지 않은 점과 3차 세계대전을 유발할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사실 맥아더는 중국군 개입 이전부터 원자탄 사용 계획을 천명했다.(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과 한미관계>) 핵폭탄으로 한반도가 초토화된 다음에 얻는 승리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맥아더에게 한국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대상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결국 반공주의를 떠나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역사적 진실과 거리가 멀다는 데 있는지 모른다. 씨제이(CJ)가 만든 <국제시장>과 이 영화가 ‘광복절 특사 상륙작전’에 성공한 씨제이 이재현 회장이 청와대에 보낸 ‘사전 선물’이라는 비난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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