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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19 19:21 수정 : 2016.08.20 10:40

[토요판] 뉴스분석 왜?
비정규직 특별잡지 <꿀잠>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소속 노동자들이 2014년 12월22일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기륭전자 농성장을 정리한 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요구하는 오체투지 행진을 벌이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 10개 언론사 20명, 기자들과 사진작가들이 뭉쳤다. 비정규직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100쪽이 넘는 분량, 한국 사회 비정규 노동의 현실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는 내용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잡지 이름은 <꿀잠>으로 정했고, 판매 수익금은 비정규 노동자를 위한 쉼터 건립기금으로 기부하기로 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비정규직 특별잡지 <꿀잠>의 첫 호는 9월5일 세상에 나온다.

지난봄, 한 언론사 노동담당 기자와 술자리를 가졌다. 노동 분야를 담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자였다. 용역, 하청, 도급, 파견과 같은 노동 현장의 용어를 이해하고, 1차 하청, 물량팀, 돌관팀과 같은 조선소의 고용 구조를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복수노조의 교섭권, 묵시적 근로계약 관계와 파견근로계약 관계, 근로자 지위 확인소송과 같은 헷갈리는 법률용어를 익히고, 복잡한 직업병과 산업재해 종류들이 익숙해지려면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곳이 노동 분야다. 그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의욕을 보였다. 두 달 정도 준비해 안전과 생명 분야의 외주·하청화 문제로 특집 시리즈 기사를 마련해보기로 했다. 기획안을 마련하고, 취재할 현장을 소개하고, 필요한 자료를 보냈다. 기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출입처가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허탈했다. 회사 사정이 있었겠지만 속상했다.

언론에 원망 깊은 비정규직 노동자

비정규직 사업을 하다 보면 언론에 서운할 때가 많다. 힘이 없는 비정규직 노조나 해고자들은 언론에 대한 기대가 크다. 좀 얘기가 되는 것 같다 싶으면 다른 곳으로 간다. <한겨레>를 빼면 대부분의 언론사 노동담당 기자는 한 명이다. 환경과 노동을 함께 다루기도 한다. 고용노동 전문 기자를 두고 노동기사를 써온 곳은 도리어 재벌과 가까운 신문사들이다. 줄기차게 노동을 ‘조진다.’ 수십 미터 고공에 올라 계절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 늘 그랬다는 듯 무심하고, 현대자동차 본사 앞에서 용역경비들과 경찰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해도, 이를 기록하는 펜과 카메라 하나 찾아보기 힘들다. 언론에 한 줄이라도 났으면 좋겠다며 한숨짓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날 때면 원망은 더 깊어진다.

지난 7월11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8층 전국언론노동조합 사무실에 현직 기자들이 모였다. 다들 기사를 마감하고 부리나케 달려온 표정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시작한 기획회의는 밤 11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한국 사회 불평등의 핵심인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펜 끝을 놓지 않았고, 출입처가 바뀌어도 애정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았던 전·현직 노동담당 기자들. “소풍 가는 날짜와 장소도 잡기 힘들다”는, 그것도 서로 다른 언론사 기자들이 모여 무슨 ‘작당’을 모의했을까?

<한국일보> 장재진 기자는 새해부터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삼성전자 스마트폰 갤럭시에 들어가는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에서 젊은 노동자들이 메탄올에 중독돼 4명이 실명하고 한 명이 뇌손상을 입었다. 모두 파견노동자였다. 조선소에서 잇따라 바다에 빠져 죽고, 그라인더에 다리가 갈려 죽었다. 하청노동자였다. 지하철에서 열아홉 청년이 안전문을 고치다 열차에 치여 숨지고, 삼성전자서비스 수리기사가 에어컨을 고치다 난간에서 떨어져 죽고….

우울한 뉴스들을 비집고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 건립 소식이 들려왔다. 농성하다 지칠 때 찾아와서 따뜻한 밥 먹고 편히 잘 수 있는, 서울 도심에 짓는 집이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문정현 신부가 비정규노동자의 집 건립운동에 보태라며 내놓은 붓글씨와 새김판(서각) 110점으로 <두 어른>전도 열었다. 모든 작품이 ‘완판’됐다. 목표 건립기금 10억원 중 절반 넘게 모였다. 장재진 기자는 집을 짓는 일에 작은 힘이라도 되고 싶었다.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었다. 기자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은 글쓰기. 그렇게 소식을 들은 기자들이 하나둘 모였다.

10개 언론사 기자 20명 재능기부
비정규직 특별잡지 9월5일 발행
수익금 비정규노동자 쉼터 기부
노조 등 사전주문·구매 잇따라

2014년말 쌍용차 고공농성 때
<굴뚝신문> 3호까지 냈던 경험
‘꿀잼’ 넘치는 잡지 만들 생각
“저널리즘 가치 보여주는 시도”

16일 오후 서울 강서구 한국공항공사 앞에서 김포공항 미화원 및 카트관리원이 조합원인 공공비정규직노조 강서지회 조합원들이 ‘비정규직 정부 지침 준수’ 등을 요구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굴뚝신문>이라는 아주 특별한 경험

이들 중에는 지난해 아주 특별한 경험을 가진 기자들이 있었다. 2014년 12월13일 새벽 쌍용자동차 해고자 김정욱·이창근이 70m 굴뚝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해고노동자들의 잇단 죽음을 안타까워하던 노동기자들이 모였다. 일하는 회사는 다르지만, 굴뚝 이야기를 널리 알리기 위해 신문을 만들기로 했다. 낮에는 자기 회사 기사를 쓰고, 밤과 휴일에는 <굴뚝신문> 취재를 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편집기자와 디자이너들도 아무 대가 없이 야근을 했다. 2015년 1월7일 대판 12면 신문 5만부가 세상에 나왔다. <굴뚝신문>은 3호까지 발행됐고, 408일이라는 세계 최장 고공농성 기록을 세운 스타케미칼 해고노동자 차광호가 무사히 땅을 밟은 뒤 발행이 중단됐다. 이후 들려온 이창근과 차광호의 복직 소식은 <굴뚝신문>에 함께했던 기자들에게 작은 보람이었다.

10개 언론사 20명, 기자들과 사진작가들이 뭉쳤다. 비정규직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비정규직 특별잡지. 두번의 편집회의와 온라인 회의를 통해 쓰고 싶었는데 쓰지 못했던 기사, 꼭 한번 취재해보고 싶었던 현장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일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도 필요한 노동과 일자리 이야기를 담아내자고 했다. 늘 펼쳐 보고, 선물하고 싶은 잡지를 만들자며 머리를 맞댔다. 100쪽이 넘는 분량, 한국 사회 비정규 노동의 현실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내용을 만들어 보자고 했다. 잡지 이름은 <꿀잠>으로 정했고, 판매 수익금은 비정규노동자의 집 건립기금으로 기부하기로 했다.

익명으로 잡지 발행에 참여하고 있는 한 일간지 기자는 “해고나 실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비정규직들이 잠시라도 쉴 수 있는 공간, 다시 힘을 내서 싸울 수 있는 집을 만드는 일에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초년 기자 시절 청소 노동자들이 벌인 따뜻한 밥 한 끼의 권리 캠페인을 취재했던 <경향신문> 김지환 기자는 “일터와 거처는 지방에 있지만 자신들의 삶에 대한 의사결정권은 서울 본사에 있어 거리에서 한뎃잠을 자며 싸움을 벌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평범한 일상은 ‘사치’였다”며 “이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먹고 마음 편하게 샤워할 수 있는 공간이 사치가 아닐 수 있도록 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었다”고 밝혔다.

“비정규직의 삶과 그들의 목소리가 보이지 않는다. 진부하다는 이유로 언론이 비정규직 이슈를 대중에게 알려내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반문하게 된다. 내가 이번 ‘꿀잠’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이유다. 조금이나마 책임을 방기한 것에 관한 면죄부를 받고 싶었나 보다.” 하청노동자로 취업해 조선소 현실을 알린 <프레시안> 허환주 기자의 말이다.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최진봉 교수는 “다른 언론사 기자들이 같은 뜻으로 모여 재능기부를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를 돕겠다고 한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라며 “저널리즘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의미있는 시도”라고 평가했다.

첫 호는 한 노동자의 20년 다뤄

비정규직 특별잡지 <꿀잠>이 역사를 통찰하고 시대를 관통하는 깊이 있는 매체가 될 수 있을까? <꿀잠>의 표지와 특집은 정규직으로 입사했다가 외환위기 이후 자회사로, 다시 2차 하청으로 전락한 어느 노동자의 20년 노동인생을 그려보고, 2016년을 살아가는 여성 비정규직의 오늘을 살펴본다. 각종 지표를 통해 20년 노동의 변화를 추적하고, 2016년 비정규직 노동을 업종별, 성별, 연령별로 분석한다. 비정규직 1천만 시대, 노동운동의 역할도 반추해 본다. 대량해고가 이어지고 있는 조선소 하청 인생과 좀비처럼 번져 일터를 장악하고 있는 파견노동의 생생한 경험도 담아낸다. 역사와 시대를 꿰뚫는 기사들이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잡지 <꿀잠>이 비판을 넘어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비정규직이 없어도 경쟁력이 있는 회사를 찾아가고, 국내외 전문가들의 깊이 있는 분석을 통해 대안을 모색해 보는 특집을 마련했다. 수면 아래서 비정규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담는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찢어진 상처를 꿰매고 덧난 마음을 위문하는 비정규노동자의 집도 소개한다. 무엇보다 굴종의 삶을 떨쳐 일어서 빼앗긴 권리를 찾아나간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꿀잠>이 어렵고 따분하고 재미없는 잡지가 아니라 ‘꿀잼’ 넘치는 잡지가 될 수 있을까? ‘초딩’도 이해할 수 있는 비정규직의 모든 것을 담아, 이 특집만 읽어도 알바하다 떼인 돈을 받을 수 있다. 퀴즈대잔치는 아주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쓴 비정규직 수필, 박재동 화백을 비롯한 시사만화가들의 만화, 사진작가의 카메라에 비친 노동,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이야기도 담았다. ‘꿀잼’까지는 아니어도 ‘아재 잡지’는 만들지 않겠다는 기획이다. <꿀잠> 편집책임자 전종휘 기자(한겨레)는 “이 잡지는 마흔 명이 마음의 숟가락을 모아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채워나간 결과물”이라며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비정규직 문제에 파열음을 내려는 변방의 시도”라고 말했다.

비정규직 특별잡지를 만든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반응이 뜨겁다. 김수억 기아차 비정규직 분회장은 잡지 1천부를 판매하겠다고 했다. 삼성전자서비스, 희망연대노조, 학교비정규직, 화물연대, 서경지부, 쌍용차지부에서 사전 집단구매를 하겠단다. 자신들의 일터이자 동시에 자녀들의 일자리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병·의원과 약국에 <꿀잠>을 배치해 환자들이 진료를 기다리면서 읽을 수 있게 하고, 회원들에게 나눠주겠다며, 한의사회, 약사회, 의사회, 천주교 노동사목위원회, 수도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에서 사전 구매를 신청했다. 고려대학교 교지편집위원회 <고대문화>는 학우들에게 비정규직 문제를 환기시키고자 홍보 및 판매에 참여하기로 했다. 대학 민주동문회의 사전 구매 신청도 이어지고 있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재능기부로 만들어진, 세상에 하나뿐인 잡지가 많은 이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문정현 신부가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 건립기금을 보태려고 붓글씨와 새김판(서각)을 내놓았다.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는 잡지

김영란법이 시행돼 기자들이 더 이상 공짜 밥, 공짜 술을 먹지 못하게 되면 ‘정경언 유착’은 사라질까?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칼럼에서 “기업과 기관들이 접대비용을 광고비로 돌릴 가능성이 높다”며 “겉보기엔 멀쩡한 일반 기사이지만 뒤에서는 돈을 받고 쓴 ‘눈속임 기사’가 늘어날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자들이 ‘광고 앵벌이’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한국기자협회 윤리강령 “우리는 소속 회사의 판매 및 광고문제와 관련, 기자로서의 품위를 손상하는 일체의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항은 먼 나라 이야기다. 광고의 위력은 점점 커지고, ‘진짜 기사’를 쓰는 일은 더욱 힘들어지는 시절. 그래서 세상을 보는 날카로운 눈과 글쓰기 재능으로, 억압과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는 잡지를 만들며 기자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람들이 소중하다. 지상에서 가장 따뜻한 매체를 만나는 날이 기다려진다.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

※비정규직 특별잡지 <꿀잠>은 9월5일 시사주간지 판형에 104쪽 분량으로 발행된다. 가격은 5천원이며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구입할 수 있다. 사전구매도 가능하다. <한겨레> 전종휘 기자가 편집책임을 맡았으며, 김지환(경향신문) 구은회·제정남(매일노동뉴스) 이하늬(미디어오늘) 오세진(서울신문) 선대식(오마이뉴스) 최하얀·허환주(프레시안) 김민경·박태우·정은주(한겨레) 장재진(한국일보) 기자가 취재를, 노순택·정택용(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가모임) 작가와 박승화(한겨레21) 기자가 사진을, 김선식·황예랑(한겨레21) 기자가 편집을, 장광석·손정란·박민서(디자인주)씨가 디자인을, 유홍상(한겨레) 부장이 사진리터치 작업을, 송경동·박점규·오진호(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가 기획·광고·판매를 담당했다. 전자우편(hopelabor@gmail.com)과 ‘비정규직 없는 세상’ 페이스북으로 문의·주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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