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뉴스분석 왜?
연극 <김정욱들> ‘원작자’ 이재훈 기자의 관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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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김정욱들>의 한 장면. 극단 차이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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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욱들>은 극단 차이무에서 만든 연극이다. 지난 23일 개막해 10월23일까지 한 달 동안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에서 공연한다. 연극은 <한겨레> 토요판에 실린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정욱 사무국장 인터뷰를 원작으로 연출됐다. 인터뷰를 연극으로 만든 희귀한 시도였다. 개막을 앞둔 토요일이던 지난 17일 김정욱과 함께 연습을 지켜봤다. 배우들은 ‘원작자’로 기록된 김정욱과 나의 이야기를 궁금해했다. ‘김정욱들’이 왜 ‘김정욱들’이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원작자의 한 명으로써 관람기를 쓰는 까닭이다.
#1.
답은 명확하면서도 명확하지 않다. 7년째 싸우고 있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더 이상 아픔에 시달리지 않게 하는 방법은? 어떤 이들에게 그 답은 명확하다. 모든 시민이 사회로부터 밀려난 그들의 처지에 자신을 대입해보고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낀 뒤 그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대체로 진보진영 내부에서 노동운동의 사회적 맥락과 가치를 꾸준히 지켜봐온 이들이 명확하게 이 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모두에게 답이 명확한 건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쌍용차 노동자들의 싸움을 어렴풋이 접하는 많은 이들 중에 그 싸움에 관심을 두는 이들은 사실 많지 않다. 사회로부터 밀려난 이들이 소수이던 시절엔 소수의 사연이 가진 비정상성 때문에 되레 주목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로부터 밀려나거나 밀려날 위기에 불안해하고 있는 이들이 다수인 시대가 됐다.
좀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관심이 많지 않기보다는 부정적인 반응이 외려 더 크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지금은 사회 밖으로 내몰린 존재가 됐지만, 대공장 노동자였던 과거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대공장에 다니며 결혼을 하고, 자녀를 2~3명 낳아 키우면서 방이 2~3개 딸린 아파트에 살며, 아이들을 태워도 부족함이 없이 큰 차를 몰고 다니는 정규직 아버지를 매개한 정상가족은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다. 되레 돈이 없어 결혼은커녕 연애도 생각하기 어렵고, 기본적인 권리도 보전해주지 않은 이 사회에서 자녀를 낳아 기르는 사회적 재생산을 의무로 받아들일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며, 월세를 전전하고 있는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이 하나의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런 청년들에게 대공장 노동자로 돌아가 그들만의 정상성을 되찾으려는 것으로 보이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질감이 클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노동조합과 파업 투쟁을 “빨갱이들의 선동”이라고 명명하고 비정상의 영역으로 배제해온 기성세대의 어떤 기조와는 분명 차이가 있는 흐름이다. 나는 2009년 8월 쌍용차 옥쇄파업 진압 현장에서부터 7년 동안 쌍용차 노동자들의 싸움을 때론 곁에서 때론 멀리서 지켜봤다. 누구보다 이들이 사회와 연대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며 행동했고, 대공장 노동자의 지위에 안주했던 과거를 성찰하는 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나는 이질감을 느끼는 그들에 대한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은 2008년 촛불집회에서 드러난 깃발과 조직에 대한 거부감이 과연 어디에서 기인했는가, 묻는 물음과도 맥락이 이어져 있었다.
#2.
“아무도 답을 모르는 거야. 거기서 나는 너를 다 이해한다는 식으로 말하면 안 돼. 이게 답이 맞나, 정말 그런가, 머뭇머뭇해야 하는 거야. 너는 너무 빨리 모든 걸 알아낸 것처럼 연기하고 있어.”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2가 한 건물 지하. 연극 <김정욱들> 연습에서 연출자 민복기는 말했다. 굴뚝에 남는 김정욱이 굴뚝에서 내려갈 결심을 한 또 다른 김정욱과 대화하는 장면에서다. 굴뚝에 남는 김정욱 역을 맡은 송재룡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연극 연습실 무대 건너 테이블 위에는 배우가 함께 먹자고 직접 싸온 김밥이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다. 연극 개막은 엿새 앞으로 다가왔다.
이 장면에서 송재룡은 “너는 그저 특별한 일을 겪은 보통 사람일 뿐이야. 너는 그저 우리 밖으로 내던져진 우리일 뿐이야. 너, 정말 너, 너 정말, 이 정도도 대단한 거야. 너 진짜 잘했어”라고 거듭 말한다. 그렇지만 굴뚝에서 내려가는 또 다른 김정욱 역을 맡은 류성훈은 그 말을 듣고도 “그 긴 시간 내가 싸워온 거 정말 뭔가 의미는 있었던 거지? 우리 그 긴 시간, 정의를 찾는, 뭔가 의미 있는 시간이었던 거, 맞겠지?”라고 거듭 묻는다. 그 질문은 굴뚝에 남는 김정욱을 향해 있기도 하고, 그 역을 연기하는 송재룡에게 묻고 싶은 것이기도 하며, 굴뚝에서 내려가는 김정욱과 그 김정욱을 연기하는 류성훈 자신에게 하는 자문이기도 하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김정욱'을 연기하는 또 다른 배우 다섯 명이 안고 가야 하는 의문이기도 하고, 궁극적으로는 이 연극을 보는 관객에게 다가가야 할 고갱이이기도 하다. 송재룡은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명확한 것처럼 얘기했고, 민복기는 그런 명확함이 반갑지 않았다. 민복기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저 질문에 호응하는 답은 누구에게도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조금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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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김정욱들>의 한 장면. 극단 차이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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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김정욱들>의 한 장면. 극단 차이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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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욱들>은 내가 지난해 6월 <한겨레> 토요판에 쓴 김정욱과의 인터뷰 기사(
▶바로 가기 : “나는 굴뚝 위에서 망가졌다…비참하게 내려왔다”)를 원작으로 두고 연출한 연극이다. 두 차례 만나 모두 여덟 시간 동안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고통스럽게 썼던 인터뷰였다. 인터뷰의 1차 독자였던 고경태 당시 토요판 에디터(현 신문부문장)는 인터뷰에서 ‘주저흔'이 읽힌다고 표현했다. “문장과 행간 구석구석엔 말하기를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흔적이 고여 있다. 김정욱씨는 남을 탓하고 비난하기 전에 자신의 모자람과 허물을 먼저 들춰냈다. 쉼 없이 ‘미안하다’고 했다. 조심스러웠고 또 조심스러웠다. 한 이야기보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더 많아 보였다. 인터뷰어인 이재훈 기자도 그랬다.”
이 주저흔이란 표현에 많은 과정이 함축되어 있다. 6년 동안의 쌍용차 투쟁과 한겨울 칼바람 속에서 70m 위 굴뚝 농성을 89일 동안 버텨냈던 김정욱은 투쟁의 당위를 위해선 그 무감한 폭력 속에 한 번도 꺾이지 않은 ‘강철 같은 전사’라는 정체성을 외부에 보여야 했다. 하지만 인터뷰는 그 강철 정체성을 한 번 더 보여주려고 진행한 것이 아니었다. ‘강철 같아야 하는’ 당위 뒤에 감춰져 있던, 상처받고 불안해하며 우울증까지 겪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막상, 그 모습을 전면에 드러내는 것이 과연 옳은가, 주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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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김정욱들>의 한 장면. 극단 차이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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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김정욱들>의 한 장면. 극단 차이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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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한 이야기는 다섯 시간 지나서야
인터뷰를 하면서도 주저했다. 여덟 시간 동안 인터뷰하면서, 굴뚝 농성에서 있었던 사람 간의 갈등을 묘사해야 하는 민감한 이야기는 다섯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물을 수 있었다. 김정욱이, 또 이창근이 입은 상처를 글을 쓴답시고 다시 헤집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기사를 쓰면서도 주저했다. 이 인터뷰가 자칫 그들의 싸움이 그렇게도 소중하게 지켜온 당위를 무화시키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그 주저함은 여전히 명확성과 불명확성의 간극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나의 평소 모습을 담고 있기도 했다.
토요판 김정욱 인터뷰 기사가 뼈대
주저하며 나눴던 8시간의 대화
‘강철 노동자’ 김정욱을
개인으로 끌어내리고 싶었다
연극은 그 장르만의 전선 갖고 있어
연출자는 기사에서 한발 더 나아가
김정욱을 ‘김정욱들’로 분화시켜
약자들의 연대 호소하는 몸짓
이 주저함은 그러니까 이 글의 도입부에서 얘기한 그 생각들과 닿아 있다. 투쟁의 아이콘이 되었던 김정욱이 굴뚝에서 고통스럽게 내려왔던 것처럼, ‘강철 노동자’ 김정욱을 보편적 고뇌 속에 살아가는 개인으로 끌어내리고 싶었다. 그것이 이 인터뷰에 담고 싶었던 나의 당위였다. 그래야 좀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는 더 많은 시민들이, 대공장 노동자들에게 이질감을 느끼는 청년들까지, 김정욱과 쌍용차 노동자들의 처지에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일말의 여지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여지를 글에서 명확하게 드러내고 강요하고 싶진 않았다. 그것은 외삽 되어선 안 될 어떤 것이었다. 그러니 이 지점에서 고백하건대, 나는 인터뷰를 통해 김정욱을 또 다른 정치적 격전장으로 끌어들였다. 김정욱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연극으로 돌아가, 나는 인터뷰 기사가 원작이라고 해도, 연극이 인터뷰가 가진 의도를 똑같이 풀어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터뷰라는 글쓰기가 글쓰기만의 고유한 전선을 가지고 있듯, 연극이라는 행위예술은 그 장르만의 또 다른 전선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연출자 민복기는 한발 더 나아가 저널리즘 글쓰기에서 표현할 수 없는 영역까지 연극에 담아놨다. 그것은 김정욱을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김정욱들’로 분화시켜서 배우와 관객들에게 김정욱의 처지에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여지를 확장해놓은 캐릭터 설정이다.
이 연극에는 앞서 얘기했듯 모두 일곱 명의 김정욱이 등장한다. 89일 동안 굴뚝 농성을 했던 김정욱, 함께 굴뚝 농성을 하다 김정욱을 먼저 내려보낸 김정욱, 아버지의 임종을 함께하는 김정욱, 아픈 아이 입원비가 필요하다고 울부짖는 김정욱, 갓 입사한 스물셋의 김정욱, 공장 작업복을 자랑처럼 입고 다니는 김정욱, 투쟁의 고통을 호소하는 김정욱, 투쟁의 당위에 의문을 품는 김정욱 등의 다양한 정체성을 일곱 명의 배우가 돌아가면서 맡는다. 이들은 굴뚝 위 두 명과 인터뷰하는 김정욱으로 함께 등장하기도 하고, 기자 이재훈과 인터뷰이 김정욱의 인터뷰 장면에서 개별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성별과 나이를 막론한 김정욱들은 김정욱 자신을 묘사하고 있기도 하고, 김정욱과 함께 굴뚝 농성을 한 이창근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굴뚝 농성을 바라본 사람들을 담고 있기도 하고, 이들의 세계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니 김정욱들은 비단 김정욱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자신을 대입할지는 오롯이 관객의 몫으로 남아 있다. 민복기는 이를 두고 “특정인이 ‘김정욱’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연히 어떤 식으로든 내가 ‘김정욱’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회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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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김정욱들>의 한 장면. 극단 차이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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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김정욱들>의 한 장면. 극단 차이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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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내밀며 “함께 살자”는 김정욱.
주저함 속에 고통스럽게 쓴 인터뷰인 만큼 연극으로 만들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또다시 망설임을 겪었다. 그런데 막상 극이 되어 나온 결과물을 보니, 정말 김정욱이 하려는 이야기는 어쩌면 이 연극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과 사회가 끝없이 외면하고, 때로는 상처를 안겼지만, 여전히 손을 내밀며 “함께 살자”고 말하고 있는 김정욱. 김정욱은 그렇게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김정욱들’이 되어 한 개의 손이 아니라 여러 개의 손을 우리에게 내밀고 있다.
그리고 그 여러 개의 손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살리려고 투쟁을 시작했는데 사람이 망가지고 있었다.”
인터뷰에 담겼던 이 말은 연극에서 좀더 명확하게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김정욱이 살리려던 사람이 혹은 망가지고 있던 김정욱이 어쩌면 내가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라는 물음 말이다. 그 물음이 정말 단순히 투쟁하는 노동자들만의 것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그것만큼 약자들의 연대를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는 몸짓이 있을까. 나는 연극 <김정욱들>을 그렇게 봤다.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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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김정욱들>의 한 장면. 극단 차이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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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김정욱들>의 한 장면. 극단 차이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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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김정욱들>의 한 장면. 극단 차이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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