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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1.18 19:35 수정 : 2016.11.21 11:49

[토요판] 뉴스분석 왜?
이승만 하야 뒤 ‘허정 과도정부’ 100일

허정은 4·19혁명 직후인 4월25일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외무장관으로 임명됐다가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과도정부를 이끌었다. 그는 3개월 만에 개헌과 총선을 치러 새로운 체제의 산파역을 했다. 사진은 허정 외무부 장관 임명 발령안. 대통령기록관 제공

▶허정 과도정부는 4·19혁명으로 대통령 이승만이 하야한 뒤 개헌과 재선거를 실시해 2공화국을 열었습니다. 대통령이 퇴진하지 않은 점만 뺀다면 100만명이 거리에서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있는 현 시국과 묘하게 닮았습니다. 하지만 허정 정부는 4·19 혁명에서 터져나온 함성을 반영하지 않아 결국 1년 뒤 군사독재를 불러왔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2016년 광장에 선 우리가 56년 전의 과도정부에 관심을 갖는 이유입니다. 허정 과도정부 100일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때로는 시 한 줄이 두꺼운 역사책보다 생생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김수영이 4·19혁명이 끝난 뒤 6개월이 지난 1960년 10월 쓴 ‘그 방을 생각하며’라는 시다. 김수영의 시처럼 그해 4월 광장을 달구던 뜨거운 함성은 왜 빈방 빛바랜 벽지 틈으로 사라졌을까?

해답의 실마리는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4·19혁명과 2공화국을 잇는 허정 과도정부(4월27일~8월8일) 100여일에서 찾을 수 있다. ‘과도정부’란 구체제가 무너진 뒤 새로운 체제가 수립되기 전까지 활동하는 정부를 말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과도정부는 △미 군정 △허정 과도정부 △5·16군정 △최규하 정부 등 모두 4차례 있었다. 군정을 제외한 사전적 의미의 과도정부는 허정, 최규하 정부 2차례뿐이다(1919년 상해임시정부를 과도정부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 헌정사에 4차례나 등장했던 과도정부가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이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과도정부가 정치사의 주변부에 불과한데다 결과적으로 모두 독재로 이어졌다는 공통점도 지닌다. 그나마 허정 과도정부는 헌법을 고쳐 총선거를 치른 뒤 민주정부에 정권을 이양했다는 점에서, 과도정부 역할을 유일하게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허정 과도정부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다. 국회도서관에 등록된 정치 관련 학위 논문은 단 2편(박사논문은 1편), 단행본은 1권에 불과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허정 과도정부에 다시금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헌정 파괴 행위로 국민들로부터 하야를 요구받고 있는 상황이 마치 4·19 때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거리로 몰려나온 점도 비슷하다. 사상 최대라는 100만명 시민들이 ‘대통령 즉각 퇴진’을 외치고 있지만, 박 대통령은 여전히 버티고 있다. 그가 물러난다고 해도 제2의 박근혜·최순실을 막을 수 있는 정치·사회 시스템 개조가 가능할지 기대와 우려가 함께 교차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1960년과 2016년 광장의 고민은 닮아 있다. 4·19를 ‘미완의 혁명’으로 만들었다는 비판과 2공화국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찬사를 받았던 허정 과도정부를 꼼꼼하게 들여다봐야 할 이유다.

허정과 이승만의 오래된 인연

허정과 이승만은 인연이 깊었다. 허정은 1911년 서울 보성중학에 다닐 때 영어교사 이승만을 처음 만났다. 직접 영어를 배우지는 않았지만 허정은 고문 탓에 얼굴 근육이 씰룩이는 이승만을 매우 인상적으로 기억했다. 허정은 1919년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 법과를 졸업하고 상해임시정부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1년 한인공동회를 조직해 귀국할 때까지 그는 미국에서 이승만을 도와 독립운동을 펼쳤다.

허정은 4·19 뒤 100일 동안 과도정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2공화국을 열였다는 평가와 혁명의 열기를 반영하지 못해 군사정권이 오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아왔다. 사진은 허정의 해방 직후 모습. 대통령기록관 제공
허정은 해방 뒤에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에 참여했고 이승만이 귀국하자 즉시 그를 만나 한민당 영수를 맡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1948년 제헌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뒤 이승만 정부에서 교통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그 뒤 사회부 장관, 서울시장, 국무총리 서리 등 이승만 정부에서 요직을 맡은 적이 있다.

이승만 하야 뒤 국정 수습 역할
개헌·총선 통해 2공화국 열어
“혁명적 목표 비혁명적 추진”
4·19 열망 담지 못한 건 한계

평화적 정권교체 이룬 건 성과
현재 촛불정국서 시사점 던져
전문가들 “박 대통령 퇴진뒤
국회 합의로 총리 뽑아야”

허정은 4·19혁명 직후인 4월25일 외무장관으로 임명된다. 이승만은 그날까지 퇴진할 생각이 없었다. 자유당을 탈당하고 방탄내각을 만들 생각이었다. 이미 자유당 의원들도 하야 만류 성명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계속해 ‘이승만 퇴진’을 외쳤고 25일에도 경찰에 의한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그렇게 버티던 이승만은 미국의 지속적인 하야 압력으로 4월26일 사퇴하고 다음날인 27일부터 허정이 과도정부를 이끌게 된다. 당시 이승만이 총리를 뽑지 않았기 때문에 외무장관이 법률에 따라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는 수석 국무위원이었다.

허정이 이승만에 의해 선택된 데는 그가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한데다, 정치권력에 욕심이 없던 인물이라는 평을 받은 게 주된 이유였다. 민주당 쪽도 그가 부패 정당인 자유당과 거리를 뒀던 점을 높게 샀다. 허정은 1952년 자유당과 결별을 선언한데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부산에 출마했다가 자유당의 방해로 출마를 포기하기도 했다.

이승만에 의해 발탁됐지만 자유당과 민주당, 당시 여야 모두 그를 거부하지 않고 내각 수반으로 인정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심지어 민주당은 7·29 총선 뒤 70% 이상의 압승을 거둔 뒤에도 윤보선과 장면이 각각 대통령과 총리로 선출되기 전까지 허정에게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길 정도였다. 이런 국회와의 교감은 과도정부가 개헌과 총선이라는 임무를 3개월 만에 끝내는 데 도움이 됐다.

이 와중에 민주당은 헛발질이 잦았다. 민주당은 4·19 이후 과도정부에서 좀체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 민주당 소속 부통령 장면이 임기가 남았는데도 4·19 직후인 4월23일 곧바로 사임한 것이 패착으로 지적됐다. 장면이 계속 현직에 있었다면 법에 따라 그가 이승만의 권한대행이 된다. 이럴 경우 민주당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 수 있었고, 역사의 가정은 없다지만 대한민국의 역사는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장면은 이승만의 하야를 압박하기 위해서 사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기사가 실린 <동아일보> 1960년 4월27일자 1면.
민주당은 또 이승만이 하야한 뒤 대통령과 진퇴를 같이하겠다며 외무장관을 사임하겠다는 허정에게 대통령 대행을 맡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민주당의 오판은 어차피 정권은 곧 민주당으로 올 것이라 낙관한 탓도 있다. 하지만 장면을 중심으로 한 신파와 윤보선 중심 구파의 분열 탓이 더 크다는 게 정치학자들의 분석이다.

민주당 신파와 구파는 4·19 이후 결속 대신 분열을 택했고 2공화국 출범 직후 내각 임면권이 있는 총리 자리를 놓고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내분은 계속됐고 그해 10월 구파가 신민당을 만들며 당이 쪼개져 정국 불안정이 이어졌다. 결국 민주당의 불안은 5·16 쿠데타의 한 원인이 됐다.

쿠데타 직후 박정희 정권은 장면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체포했다. 검찰은 그에게 사형을 구형하기도 했다. 장면이 남한 체제로 남북총선거를 실시한다는 보수적인 통일론을 갖고 있었음에도 박정희 정권은 그에게 용공의 딱지를 붙였다. 이후 용공 사건은 독재정권 통치의 핵심축이 됐다. 분열의 대가로 야당과 혁신세력은 1980년대 말까지 정치와 사상의 자유를 외치려면 ‘용공’으로 몰릴 각오를 해야 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혁명적 목표 비혁명적으로 수행할 것”

허정 과도정부의 특징은 “혁명적 목표를 비혁명적 방법으로 수행하겠다”는 권한대행 취임사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과도정부는 명확한 진단을 통한 병원의 응급실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3개월 안에 내각제로 개헌을 하고 총선을 치러 새로운 정부를 출범하겠다고 천명했다. 회고록에서 그는 “과도정부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시간만 놓고 본다면 허정 과도정부는 완벽했다. 어수선한 정국에서 정말 3개월 만에 개헌을 하고 재선거를 치러 새로운 공화국의 문을 열었다. 이는 과도정부의 핵심적인 임무를 하나도 이루지 못한 1980년의 최규하 정부와 대조를 이룬다.

허정 과도정부가 아슬아슬했던 정국을 잘 관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이승만과 국회의 요청으로 내각을 꾸려 안팎이 든든했던데다 허정이 외교와 행정 경험이 풍부했다는 점이다. 미국과의 관계를 잘 풀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6월19일 일정에도 없는 한국을 방문하게 한 것도 그의 공으로 꼽히기도 한다.

물론 아쉬운 대목도 많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다음날인 4월28일 허정은 내무 이호, 재무 윤호병, 문교 이병도 등 새 내각을 발표했다. 대부분 그와 개인적 친분이 있던 해당 분야의 전문가였다. 하지만 정치 경험이 없는데다 정무적 기반이 없어 4월 혁명의 열기로 뜨거운 시민사회 요구를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허정의 입각 요청을 거부했다.

그래서 과도정부는 4·19혁명에서 요구했던 반혁명 인사 처벌, 부정부패자 처리, 민족반역자 재산 몰수 등에 소극적이었다. 부정선거 관련된 자유당 간부와 경찰들에 대한 처벌도 대부분 다음 정부로 미뤄졌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허정 과도정부가 보수적이라고 비판해온 이유다. 실제로 1961년 5·16 이후 3공화국에는 자유당 출신 16명이 공화당 의원으로 탈바꿈했다.

개헌 과정도 문제다. 부정선거로 국회 과반수가 당선된 자유당 의원들을 그대로 인정한 채 개헌 작업이 진행됐다. 당시 자유당 의석수는 138명이나 됐지만 야당 의원은 민주당 79명, 무소속 10명에 그쳤다. 숫자만 놓고 본다면 청산돼야 할 이들에게 외려 개혁의 주도권을 맡긴 셈이다.

게다가 국회는 시민사회 참여 없이 개헌 논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논의된 지 열흘 만인 6월15일 개헌안이 공표됐다. 시민사회는 물론 민주당 의원들조차 국회 즉각 해산과 비상입법회의를 지속적으로 주장했지만 소귀에 경 읽기였다. 의회중심제를 포함해 국가긴급조치권 제한, 헌법재판소 신설 등 개혁적인 요소가 있었지만 혁명으로 등장한 헌법으로는 부족했다는 평가다.

이런 점에서 허정 과도정부가 2공화국의 실패 원인을 제공했다는 지적도 있다. 과도정부를 연구한 정주신 한국정치사회연구소장은 “이승만계인 허정이 부패 인사를 척결하고 혁명 정신을 이어가라는 국민의 열망을 대변하긴 어려웠다”며 “과도정부 목표 가운데 헌법 개정만 했을 뿐 책임자 처단이나 적폐일소 등의 주요한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 소장은 “허정 과도정부의 유일한 성과인 개헌 역시 정부 구성 방법만 바꾸었을 뿐 부정축재자 재산 환수와 새로운 경제 발전에 대한 비전 등 시민사회에서 봤을 때 정말 중요한 문제는 반영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물론 허정 정부가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과도정부의 임무에 충실했다는 분석도 있다. 허정 과도정부가 개헌과 총선이라는 응급조치를 충실히 했고 과거청산 부패척결 같은 대수술은 새 헌법으로 들어선 장면 정부의 책임이라는 지적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허정은 이승만이 임명했지만 국회 요청에 의해 과도정부를 이끌었고 이후 국회와 협의해 개헌과 총선거로 의회중심제라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이끌어냈다”며 “5·16 군사쿠데타는 2공화국의 1당이던 민주당의 분열 탓이지 과도정부의 책임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광장 에너지 국회가 주도해야

전문가들은 허정 과도정부가 공과 과가 엇갈리는 만큼 혁신에 대한 열망이 큰 현시점에서는 좋은 선례가 된다 말했다. 정주신 소장은 “허정 과도정부의 실패는 이승만 정권의 구악 척결을 안 했고 개헌을 하면서 혁명의 열망을 담지 않아 비롯됐다”며 “현시점에서 4·19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박근혜 대통령이 빨리 퇴진하고 국회 중심으로 국민이 원하는 정치·경제·행정 혁신을 논의해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생긴다”고 말했다.

최장집 명예교수는 “이승만이 임명한 허정이 4·19 뒤 정국을 나름 수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국회와의 합의 덕분”이라며 “지금도 광장에서 분출되는 분노와 요구를 국민이 선출한 권력인 국회가 주도해서 이끌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헌법에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대통령이 2선후퇴한 뒤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총리를 임명해 정국을 수습할 수 있다. 이는 헌법 정신과 어긋나지 않고 외국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 퇴진 후 60일 안에 개헌과 대선을 치러야 하는 촉박한 일정에 대해서도 “국회에서 논의한다면 60일을 더 늘릴 수 있고 헌법 개정을 하면서 시민사회의 요구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다”며 국회 역할을 강조했다.

권은중 기자 details@hani.co.kr

참고: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정주신, ‘한국에서 과도정부의 정권이양에 관한 연구’
이의명, ‘허정 과도정부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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