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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7.02 09:45 수정 : 2017.07.06 14:04

라우슈카이 홍콩중문대 명예교수

<건제(친중)파 라우슈카이 교수>
생활수준 높아지고 법치·인권 발전
홍콩의 번영·안정은 성공했다
우산시위는 중앙이 도전에 대응한 것
홍콩이 중국 전복하는 기지 돼선 곤란

<민주파 마응옥 교수>
우산시위 거치며 정치적 자각 흐름
권위주의 강화 방향으로 가고 있다
20년간 민주주의 실현 너무 늦다
홍콩에 대한 중국 압박 거세질 것

라우슈카이 홍콩중문대 명예교수
[토요판] 뉴스분석

홍콩의 두갈래 여론

▶ 꼭 20년 전 오늘,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옮겨졌다. 이를 두고 중국 정부는 ‘회귀’라 강조하지만, 이를 비판하는 쪽에선 영국의 식민지에서 중국의 식민지로 옮겨갔을 뿐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오늘의 홍콩을 바라보는 홍콩 내 두 갈래의 시각을 살펴봤다.

1997년 7월1일.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은 무엇으로 변했을까? 중국은 다른 제도의 존재를 용인하는 ‘특별행정구’가 됐다면서, 홍콩이 ‘회귀’된 것이라고 말한다. 홍콩의 영국 할양을 결정지었던 아편전쟁은, 서구 열강의 침탈로 피폐해졌던 중국이 두고두고 곱씹고 있는 이른바 ‘치욕의 100년’이 시작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결국 홍콩이 ‘드디어’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다.

하지만 비판하는 사람들은 홍콩이 단지 영국의 식민지에서 중국의 식민지로 겉포장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일국양제’가 약속한 대로 홍콩의 기존 정치·사회 체계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과거 영국이 전적으로 임명하던 총독이 이젠 형식적 선거를 거칠 뿐 실질적으로는 중국이 임명하는 행정장관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두 견해는 홍콩의 현실을 바라보는 홍콩 내 두 갈래 주류 여론의 배경이 된다. 전자는 홍콩이 중국의 일부로서 앞으로 발전하는 중국과 함께 더욱 번영할 것이라고 자신하지만, 후자는 홍콩에 새로운 민주주의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난 19일과 20일, 두 목소리를 대변하는 홍콩중문대 소속 교수 2명을 각각 만났다. 두 사람은 다른 쪽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끝내 양보할 수 없는 지점만 확인시켜줬다. 737만명의 도시 홍콩의 미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라우슈카이(70) 명예교수는 대표적인 ‘건제(친중)파’ 교수다. 그는 홍콩 행정장관 자문기구인 중앙정책조 수석고문을 2002년부터 10년 동안 역임했고, 현재는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정협 홍콩구 현직 위원이자 전국홍콩·마카오연구회 부회장이다.

-지난 20년간 홍콩의 변화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식민지에서 특별행정구가 되면서 새 정부는 ‘일국양제’를 50년 동안 약속받았다. 그러나 식민지 시절 겪어보지 못한 도전에 맞닥뜨렸다. 1997년과 2008년 두 차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었다. 조류인플루엔자와 급성호흡기증후군(SARS) 같은 전염병의 타격이 있었다. 식민지 정부에는 견제와 균형의 장치가 없었으나, 새 정부는 정당과 시민사회가 견제를 받으면서 ‘친중’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상당수 홍콩 사람들이 새 정부를 믿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비단 정치적 의심 때문만은 아닐 것 같다.

“빈부 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이 확대했다. 금융과 부동산에 의존하는 경제구조를 넘어서는 산업 다변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젊은이들의 교육 수준은 높아졌는데도, 향상과 발전의 기회를 제대로 얻을 수 없었다. 성공의 기회도 적었다. 젊은층의 불만이 높아졌다. 새 정부는 충분한 위신을 얻지 못했다.”

-‘일국양제’의 실패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일국양제는 그래도 성공을 했다. 홍콩을 유지했던 기존 기구는 변하지 않았다. 홍콩 사람들의 삶의 방식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치안도 양호했다.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법치·인권·자유 등은 발전을 이룩했다. 정부의 효율도 향상됐다. 새 정부는 청렴을 유지했다. 일국양제의 기본적인 목표였던 홍콩의 번영과 안정은 성공했다고 봐야 한다.”

-홍콩과 중국의 관계는 어떻게 보는가?

“중국의 굴기는 홍콩에 주어진 커다란 새로운 변화였다. 1997년 이전엔 이렇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중국 자본은 홍콩에도 들어와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홍콩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된 동시에 중국 기업과 인재들이 홍콩에 진출해 경쟁하는 현실도 생겨났다. 그러면서 ‘내지(중국) 동포’들과의 관계 설정도 변화가 생겼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교류가 많지 않았는데, 1997년 이후에는 중국의 영향이 점점 커졌고 교류도 늘면서 문화 차이와 이익 충돌 등에 따른 갈등이 생겨났다.”

-홍콩인들은 이런 갈등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정체성 혼란이 있다. 영국 식민지 시절엔 생각하지 않았던 중국공산당 및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1997년 이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있다. 중국에 충성할 의무가 있는지, 홍콩이 중국과 안보 이익을 공유하는지, 중국과 한집안 사람인지 등 여러 문제는 지금도 정의를 못하고 있다.”

-중국은 홍콩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중국은 홍콩인을 특별하게 대우하고 있다. 일국양제 이후 홍콩인의 권리는 중국 공민보다는 크고 의무는 작다. 이를테면 중국의 산아 제한 생육계획 적용을 받지 않고, 중국에 대한 납세 의무도 지지 않는다. 홍콩인은 중국에 가서 군인 및 공무원이 되거나 할 수는 없다. 외부인으로 다루기 때문에, 어쩌면 젊은층에는 좋은 신분일 수도 있다.”

-혜택을 주고 있다는 뜻인가?

“혜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홍콩의 미래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중국과 영국이 1997년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안정적이어야 인재가 떠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새로운 혜택을 준 것이 아니었지만, 일국양제 이후 홍콩에 위안 역외시장이 설치되고 대륙 여행객이 늘어난 것은 결과적으로는 혜택이기도 했다.”

-우산시위, 서점 관계자 실종, 입법회 선서 파동 등 최근 홍콩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은 어떤 의미로 봐야 하는가?

“일국양제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우려로 이해한다. 일국양제 아래서 중앙은 중앙의 권리고 있고, 홍콩은 홍콩의 권리가 있다. 최근 일련의 일들은 중앙에 대한 도전, 국가안전에 대한 위해 등에 대해 중앙이 스스로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일국양제 원칙을 확인하는 중에 생겨난 반대파와의 충돌이었다. 반대파가 제도를 바꾸려 들며 중앙에 대항하자 중앙이 대응하는 과정이다.”

-반대파는 중국이 태도를 바꿨다고 말한다.

“1997년 전까지 여러 의견을 수렴한 중국은 97년 이후엔 좀처럼 일국양제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반대파는 일국양제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마치 유일한 것인 양 홍보해왔다. 하지만 일국양제의 약속은 중국이 홍콩의 기존 제도와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번영과 안정을 유지하도록 존중한다는 것이고, 홍콩은 중국이 사회주의 체제와 국가 이익을 유지하도록 존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홍콩이 중국을 전복시키는 기지나 반공기지가 돼서는 안 된다. 중앙은 이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마응옥(52) 교수는 홍콩의 선거, 정부구조, 정당, 의회 등 정치 발전 및 민주화 과정을 연구해왔으며 ‘민주파’ 성향의 시사평론가로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중이다. 학생운동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동참으로도 유명하다.

-2014년 우산시위 이후 홍콩 분위기는 어떤가?

“우산시위는 홍콩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거였다. 그러나 당시 홍콩의 젊은이들은 폭력의 위협에 직면했다. 젊은이들이 폭력 혁명을 시도한 것도 아닌데, 베이징은 양보하지 않았다. 79일 점령은 성과가 없었고 무력감이 컸다. 지금은 전반적으로 약화되는 과정이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이들이 우산시위를 거치며 정치적 문제의 중요성을 자각했는데 성과가 없었다. 민주주의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은 이뤄졌으나, 그것을 어떻게 무엇으로 모아내야 할지는 민주파도 모르는 것 같다.”

-중국이 변화할 가능성은?

“중국의 전체 방향이 권위주의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홍콩에 대한 중국의 압박이 가벼워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미국 등 서구의 퇴조로, 중국은 국제 무대에서의 자신감도 높아졌다. 중국 모델은 민주주의와 자유는 필요없다는 것인데, 오히려 인기를 얻는다. 자유 침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어서 홍콩에는 큰 경고로 작용하는 부분이다.”

-중국 쪽에선 홍콩 주민의 참정권 수준이 영국 식민지 때보다는 높아졌다는 예를 들면서, 홍콩의 민주주의가 발전중이라는 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그 발전 속도가 너무 느린 것 아닌가? 영국 식민 입법회(의회)는 의석 3분의 1이 직접선거였고 나머지는 간접선거였다. 20년이 지났지만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건 아직 2분의 1밖에 안 된다. 총독을 식민정부가 임명하다가 지금은 간접선거로 뽑는데, 젊은이들은 민주, 자유, 개방을 외치며 직접선거를 호소한다. 직접선거와 1인1표가 기본적 권리라는 인식이 잘못된 게 아니지 않나. 그런데 이걸 개선한다면서 2014년 중국이 내놓은 8·31결정은 중앙의 추천을 거친 후보들 중에서 뽑으라는 수준이었다. 97년이었다면 몰라도, 지금은 이걸로 안 된다. 20년 동안 민주주의의 실현이 너무 늦어지고 있다.”

-홍콩의 미래를 비관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비관적 전망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해 입법회 선거 때는 투표율이 58%였다. 민주파가 많은 표를 얻은 선거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젊은층이 많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젊은층 사이에 홍콩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인가?

“독립의 방향이라기보다는 심리적으로 존재하는 흐름인 것 같다. 젊은층이 일국양제의 정당성을 부정하면서 심리적으로 중국을 배제하고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 형태다. 주권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대만 독립파와는 다르다.”

-홍콩에서 독립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어떻게 보는가?

“1997년 이전 홍콩의 중년 지식층은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공산당이 싫고 무서워도 자신은 중국인이고 홍콩은 중국 땅이라고 생각했다. 일부가 국민당과 대만을 지지할지언정 영국 식민 통치가 지속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홍콩 정체성이 생기고 있다. 다만 그 독립 목소리가 정치적 운동으로서 1~2년 안에 구체적 방향을 보일 것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중국은 이런 흐름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중국은 2003년 이후 경제 원조 차원에서 관광객을 보내는 등 나름의 성의를 보였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그 흐름마저 둔화했다. 게다가 홍콩 젊은층은 그런 조처의 수혜자도 아니었다. 일국양제라고는 하지만 중국은 인권, 부패, 인터넷 통제 등 문제로 홍콩 젊은층의 인정을 못 받는다. 이런 상태는 일정 시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중국 관광객들의 교양 없는 행태를 보는 비판적인 시선은, 이민자들을 환영하지 않는 유럽 사람들의 차별적인 시선과도 닮아 있다.”

-의원 선서에서 중국을 ‘지나’라고 비하했던 바지오렁, 야우와이칭 등 2명의 젊은이는 지난해 입법회 선거에서 당선됐지만 결국 당선 무효 소송중이다.

“선거 과정에서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반감을 공공연히 표현해놓고, 정작 선서라는 이유만으로 중국의 국호를 제대로 존중하기도 쉽진 않았을 것이다. 홍콩 젊은층 상당수는 중국을 그저 또다른 나라로 생각한다. 중국의 민주화에도 관심이 없다. 그냥 무시하고 있을 뿐이다.”

-20년 전 ‘반환’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미국에서 유학중이었는데 잠시 들어와 있었다. 불편함을 느꼈다. 모두가 예상은 하고 있었기에, 와야 할 것이 왔다는 느낌도 있었다. 1984년 중-영의 서명 이후 (1989년 천안문 사건 등) 중국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아왔으므로, 축하할 일은 아니었다.” 홍콩/김외현 특파원 oscar@hani.co.kr

마응옥 홍콩중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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