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수 듀오인 ‘다름아름’의 멤버 황현(왼쪽), 박은영씨가 2016년 겨울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신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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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운명에 무릎 안 꿇어”…김호철-윤민석의 슬픈 연대
민중가수 듀오인 ‘다름아름’의 멤버 황현(왼쪽), 박은영씨가 2016년 겨울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신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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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그네를! 감옥으로! 박그네를 감옥으로 MB도 검찰도 깜빵으로_________
재벌과 쌈싸미 권력 새누리 공범 모두 다 깜빵으로
노동자 총파업 투쟁으로 민중의 짱돌과 곡괭이로
무당 정권 도둑 권력 박그네 체포 (후략)♬♬” “♬♬하야 하야 하야 하야 하야 하야
이게 나라냐? 이게 나라냐?
근혜 순실 명박 도둑 간신의 소굴
범죄자 천국 서민은 지옥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다!
(후렴)
하야 하야 하야 하야하여라!
박근혜는 당장 하야하여라!
하옥 하옥 하옥 하옥시켜라!
박근혜를 하옥시켜라!(후략)♬♬”
‘박그네를 감옥으로’ 부른 황현 2016년 겨울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때 전국의 광장에 울려퍼졌던 노래 두 곡이다. 앞의 노래는 김호철(58·본명 김수호·이하 호칭 생략) 민중음악 작곡가가 만든 ‘박그네를 감옥으로’이며, 뒤의 노래는 윤민석(54·본명 윤정환)의 ‘이게 나라냐 ㅅㅂ’이다. ‘이게 나라냐’가 2016년 11월 8일에 먼저 나오고, ‘박그네를 감옥으로’는 이틀 뒤인 11월 10일에 배포됐다. 두 곡 모두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퇴진을 넘어 구속을 요구했다. 당시는 정치권조차 대통령 탄핵을 추진할지 말지를 결정하지 못할 정도로 어수선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되돌아보면 노래가 가장 먼저 현직 대통령의 처벌이라는 근본적 요구를 내걸었고, 결국 관철시켰던 셈이다. 유달리 추웠던 그해 겨울 광장을 뜨겁게 만들었던 민중음악의 거목인 두 사람은 요즈음 가슴이 타들어가고 있다. 오랜 음악동지이자 김호철의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인 황현(47)이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가수이자 김호철의 아내인 황현은 지난 4월 몸 속에 커다란 희귀암이 자라 있는 것이 발견돼 급하게 수술받았지만, 다른 장기와 뼈로 전이된 상태다. 아내의 투병을 바라보는 김호철은 “자책감과 무력감에 심신이 무너져”(윤민석) 있다. 이런 그에게 윤민석은 “형 힘내, 나를 봐. 모델이 바로 옆에 있으니 포기하지 마”라는 내용의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매일 보낸다. 황현은 1990년대초부터 각종 시위와 투쟁 현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초기에 부른 노래 중 하나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다. ‘박그네를 감옥으로’ 음원에는 그와 박은영, 박준의 목소리가 담겼다. 박근혜 탄핵집회 때는 ‘다름아름’(박은영과 함께 만든 듀오)의 이름으로 광화문 광장에 마련된 무대에도 여러번 섰다. 음악공부 경험없는 두 민중음악가
80년대말부터 노래운동에 앞장
‘파업가’ ‘전대협 진군가’로 유명
각각 만든 박근혜 탄핵가도 인기 민중가수와 결혼 닮은꼴 행보
동지인 아내 투병 같은 운명
김호철-황현 돕기’ 윤민석 앞장
“호철 형, 내가 모델이니 힘 내” 황현이 노래운동을 시작한 것은 1990년 숙명여대(행정학과)에 입학한 뒤 교내 노래패인 ‘한가람’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 항상 밝고 씩씩했던 그는 누구보다 노래패 활동에 열심이었다. 서울지역대학노래패연합(서대노련)과 1992년 백기완 후보 선대본부의 문선대에서도 활발하게 노래했다. 서대노련에서 당시 민중음악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던 김호철을 강사로 초빙했고, 이 때 김호철과 황현은 처음 만났다. 운동과 음악에 대한 열정이 강한 두 사람은 1994년 동지적 부부가 됐다. 황현은 수술 후 힘든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는 지난 주에 박은영 등과 함께 음악 공동체 ‘일과 노래’가 만드는 음원 녹음작업을 했다. “조금이라도 힘이 남았을 때 녹음을 마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힘들지만 노래를 하겠다고 현이가 먼저 얘기했다.”(박은영) 황현의 발병 소식을 들은 윤민석은 한동안 문을 닫고 있었던 페이스북을 다시 열었다. “언제나 낮은 곳에서 싸우는 이들과 함께 해온 두 분(김호철, 황현)이기에, 참으로 속상하지만 당연하게도 보험 같은거 들어둘 여력이 없었던 탓에 지금 차마 말을 못해서 그렇지 아마도 호철이 형은 병원 근처 흡연구역에 가서 혼자 줄담배 피우며 아내의 수술이 잘 끝나길 기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치료비와 온갖 걱정에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며 눈물을 훔치고 계실 겁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ㅠㅠ 저 또한 여러분들의 많은 도움으로 아내를 살렸던 처지에 페북을 다시 열어 이런 청을 올리는 것이 외람되고 송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께 엎드려 간절히 도움을 청합니다”(4월10일 윤민석 페이스북) _________
윤민석과 김호철 계좌를 오간 1천만원 윤민석은 자신의 텅빈 지갑부터 털었다. 한 단체가 창작공간 지원금으로 준 6개월치 월세(390만원)와 ‘김호철·윤민석 후원 600인 프로젝트’(대표 정연탁)가 지난 3개월 동안 보낸 후원금 200여만원을 내놓았다. 윤민석이 앞장선 모금활동으로 황현은 1차 수술은 무사히 마쳤다. 윤민석도 민중가수인 아내 양윤경의 암투병으로 벼랑 끝에 선 적이 있다. 결혼 전에 유방암을 앓았던 양윤경은 2011년 암이 재발했다. 치료할 돈이 없어 죽어가는 아내를 바라봐야만 했던 윤민석은 2012년 8월 트위터에 “누가 1억만 빌려주세요. 아내 좀 살려보게요. 아내가 낫는 대로 집 팔아서 갚을게요”라는 글을 올렸고, 그의 노래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1억5천만원의 돈을 모았다. 또, 김호철 등 음악 동료들은 윤민석을 위한 후원 음악회를 열었다. 덕분에 양윤경은 무사히 수술을 마쳤고, ‘뼈까지 전이돼 회복할 희망이 없다’는 진단을 극복했다. 김호철과 윤민석은 1980년대 후반부터 늘 싸움이 있는 삶의 현장을 몸으로, 또 노래로 지켜온 투사다. 스스로를 ‘노동해방의 나팔수’라고 말하는 김호철은 주로 노동 현장에서 불리는 노래를 만들었다. 1988년에 만든 불후의 노동가인 ‘파업가’를 비롯해 ‘전노협 진군가’ ‘단결투쟁가’ ‘진짜 노동자’ ‘노동조합가’ ‘잘린 손가락’ 등이 대표곡이다. 그의 노래는 고상하거나 고급스럽지 않고, 트로트나 군가풍으로 쉽고 간명하다.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파업가’ 등 숱한 노동가요를 만든 민중음악작곡가 김호철씨. 김씨는 탄핵 촛불집회 때 인기를 끈 ‘박그네를 감옥으로’를 만들기도 했다. 신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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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전대협진군가’를 시작으로 많은 민중음악을 만들어온 윤민석씨가 지난해 11월 9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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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손 잡아줄 때” 다음달 후원주점 1984년 한양대(무역학과)에 입학한 윤민석도 처음에는 학생운동과 거리가 멀었다. 학교 앞 음악다방과 이태원 나이트클럽에서 기타 반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던 평범한 대학생이 변한 것은 2학년 때 광주항쟁 사진을 통해 우리 사회 진실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학생운동에 뛰어든 그는 한양대 노래패(소리개벽)에 참여했다. 1989년 그가 만든 ‘전대협 진군가’는 1990년대까지 학생들의 투쟁 현장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 중 하나다.
김호철씨가 1994년 환경노래 전문그룹인 여성 3인조 '초록지대'를 만들어 활동할 때의 모습. 왼쪽부터 황현, 김호철, 박란희, 박은영씨.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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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은행 749-124301-02-001 황현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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