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뉴스분석 왜?
도마에 오른 필리버스터
카이사르의 농지개혁법안
원로원의 의사진행 방해에도
민중 지지로 민회에서 통과
프랑스 의회도 여론 악화되자
필리버스터 겨냥 수정안 철회
미·영 등은 법과 관행 준수
“한국당 199개 법안 필리버스터는
제도 취지 남용하는 것” 비판
자유한국당은 공직선거법과 공수처법을 저지하기 위해 지난달 29일 본회의에 올라가 있던 199개 법안 전체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아예 본회의에 불참함으로써 자유한국당의 필리버스터를 원천 봉쇄했다. 이에 나경원 원내대표(중앙 통로 앞의 회색 양복 입은 이) 등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이날 국회 본회의장에서 ‘필리버스터 보장하라’ 등의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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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동의안 막은 김대중의 연설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장장 5시간19분 동안 진행됐던 김대중의 발언은 우리 국회 최초의 필리버스터였다. 야당 동료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 동의안을 막기 위한 의사진행 방해였다. 김준연이 국회에서 한일협정 비밀회담 때 일본한테 정치자금으로 1억3천만달러를 받았다고 주장하자,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누르기 위해 본보기로 김준연 의원 구속 동의안을 제출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당시 야당은 법무부 장관을 불러 구속 동의안 청구 경위 등을 먼저 따져봐야 한다며 의사일정 변경을 요구한 뒤 김대중에게 제안 설명에 나서게 했다. 발언 시간에 제한이 없는 점을 이용해 밤새 시간을 끌어달라는 게 야당 지도부의 주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주제에서 벗어나면 의장이 발언을 제지할 수 있었다. 김대중은 원고도 없이 단상에 올랐지만, 한번도 횡설수설하지 않았다. 여러차례 발언 종료를 종용하던 이효상 국회의장은 결국 마이크를 끔으로써 김대중의 발언을 강제로 중단시켰다. 김대중은 경위권을 발동해 끌어내리겠다는 이효상의 압박에도 단상에서 끝까지 버텼다. 결국, 본회의는 이날 구속 동의안을 상정조차 못 한 채 산회하고 말았다. 박정희 정권은 국회 회기가 끝난 며칠 뒤에야 동의안 없이 김준연 의원을 구속했으나, 야당과 국민의 반발에 얼마 뒤 석방해야 했다. 유신독재 체제가 본격화하기 전까지는 이처럼 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가 가능했다. 필리버스터 제도가 명시적으로 법에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의원들의 발언 시간에 제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국회법에는 “의원의 질의, 토론, 기타 발언에 대하여는 국회의 결의가 있는 때 외에는 시간을 제한할 수 없다”(제46조)고 돼 있었다. 4·19혁명 직후인 1960년 9월 개정된 국회법에서 “발언 시간은 의원의 의결로 제한할 수 있다”(제98조)로 바뀌었지만, 구체적 절차가 마련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1969년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3선 개헌’(대통령은 1차 연임만 할 수 있다는 헌법 규정을 폐지하기 위한 개헌)을 밀어붙일 때도 야당에 의한 필리버스터가 있었다. 이번에는 본회의장이 아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장이었다. 개헌 절차법인 국민투표법안을 막기 위해서였다. 대표 주자는 박한상 의원이었다. 8월29일 밤 11시15분에 발언대에 선 박한상은 이튿날 오전 9시30분까지 장장 10시간15분 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발언을 이어갔다. 여당 지도부가 야당의 의견을 수용해서 대체 법안을 만들기로 노력한다는 등의 약속을 한 뒤에야 회의가 끝났으나, 공화당은 이날 저녁 8시 야당 몰래 단독으로 법사위 회의를 열어 국민투표법을 강행 통과시켰다. 이러한 필리버스터를 성가시게 여겼던 박정희 정권은 유신독재 체제를 구축한 직후인 1973년 2월 “의원의 발언 시간은 30분을 초과할 수 없다. 다만, 의장은 15분을 초과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1회에 한하여 연장을 허가할 수 있다”(제97조)고 국회법을 뜯어고쳐, 의사진행 방해 행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이후 오랫동안 우리 국회에서 필리버스터는 자취를 감췄다. 대신, 안건을 강행 처리하려는 여당과 이를 저지하려는 야당이 물리적으로 부딪치는 ‘동물국회’의 모습이 자주 나타났다. 해적선이나 노략질을 뜻하는 말에서 나온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정치 용어로 자리 잡은 것은 1854년 미국에서다. 당시 미 상원에서 노예제 허용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했던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을 의결할 때 반대파 의원들이 장기간 토론 등으로 의사진행 방해를 한 것을 필리버스터라고 불렀다. 필리버스터는 장시간 발언뿐 아니라 느리게 기표소로 걸어가는 행위 등 모든 방법의 의사진행 방해 행위를 포괄하는 용어다.
자유한국당의 무더기 필리버스터 신청에 맞서 본회의에 불참한 이해찬 대표(앞줄 오른쪽 네번째)와 이인영 원내대표(오른쪽 다섯째) 등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29일 국회 중앙홀 앞 계단에서 ‘자유한국당 규탄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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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선 종종 우보전술 필리버스터의 뿌리는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59년 카이사르는 귀족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토지를 퇴역 군인인 평민들에게 나눠주는 농지개혁법을 내놓았다. 귀족들을 대표하는 카토(소 카토)가 원로원에서 법안을 저지하려 했다. 해질녘까지 회의를 끝내야 하는 규정을 활용해, 카토는 이전에도 종일토록 연설하는 방법으로 주요 법안을 무산시키곤 했다. 카토의 의도를 알아차린 카이사르는 처음에는 그를 감옥에 가둬서 필리버스터를 봉쇄하려고 했다. 그러나 귀족들이 반발하자 카토를 풀어준 뒤 카이사르는 아예 법안을 민회로 옮겼다. 법안을 지지하는 민중의 힘으로 결국 법은 통과됐다. 현대 의회에서 필리버스터는 각 나라의 역사와 전통에 따라 조금씩 양상이 다르다. 영국 하원은 필리버스터를 하더라도 안건과 관련된 내용으로 발언이 한정돼 있다. 의제와 무관한 발언을 하면 의장이 발언 정지를 명령할 수 있다. 이 때문인지 영국 의회의 필리버스터 기록은 상대적으로 짧다. 21세기 영국의 최장 시간 필리버스터는 2005년 노동당 의원 앤드루 디스모어가 세운 3시간17분이다. 이와 달리 미국 상원은 발언 주제나 시간에 제한이 없다. 미 상원의 의사규칙에 따르면, 의장은 상원의원의 요청이 있을 경우 무조건 발언권을 주어야 하며, 발언권을 얻은 의원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은 채 본인이 원하는 한 발언을 계속할 수 있다. 1957년 8월29일 공화당의 스트롬 서먼드 상원의원은 민권법안(흑인 차별을 규제하는 법안)을 저지하기 위해서 24시간18분 동안 발언했다. 그는 발언 도중 성경책을 읽기도 했다. 미 상원은 필리버스터로 의회가 마비되는 것을 막기 위해 1917년 토론 종결 제도인 ‘클로처’(cloture)를 도입했다. 재적의원 5분의 3(60명) 이상의 동의가 있으면 토론을 종결해야 한다. 2015년 미 상원에서는 무려 76번의 토론 종결이 성립됐다. 그만큼 필리버스터가 흔하다. 반면 미 하원에는 필리버스터 제도가 없다. 1842년 토론 시간 등을 제한하는 룰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원에서 가끔씩 나오는 장시간 연설은 필리버스터라기보다 중요 사안에 대한 의회 지도자들의 연설이다. 하원 의장이나 양당 원내대표 등에게 관례적으로 주어지는 무제한 발언권인 ‘매직 미닛’(magic minute)을 활용한 것이다. 지난해 2월 낸시 펠로시 민주당 원내대표가 하원 회의장에서 ‘불법 이민 청소년 추방 유예’(DACA) 제도를 옹호하기 위해 무려 8시간7분 동안 연설한 것이 대표적이다. 2006년 프랑스 의회에서는 법안에 대한 수정안을 내는 방식으로 필리버스터가 이뤄졌다. 국영기업 ‘가즈 드 프랑스’를 민영화하는 법안에 대해 당시 좌파 야당은 수정안 13만7449건을 제출해서 법안 통과를 저지하려고 했다.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이 수정안을 하나하나 표결 처리하는 데는 10년이 필요할 것으로 계산됐다. 그러나 민영화 반대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낮자, 야당은 의회 토론이 시작됐을 때 수정안을 모두 철회했다. 이웃 나라 일본도 필리버스터 전통이 강하다. 일본 의회는 장시간 발언뿐 아니라 우보(소걸음) 전술로도 의사진행을 방해한다. 즉, 본회의 표결 시 출석 의원 5분의 1 이상의 찬성으로 기명 표결을 요청한 뒤 기표소까지 천천히 걸어가는 방식으로 시간을 끈다. 1992년 유엔평화유지군활동협력(PKO)법안 표결 때 사회당 등 야당은 ‘1미터 가는 데 1시간’이라는 지침을 정했다. 이 때문에 중의원에서 표결이 끝나는 데 나흘이나 걸렸다.
2016년 3월2일 오전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 마지막 토론자로 나서 발언하고 있다. 이 의원은 이날 국내 최장 시간인 12시간31분 동안 발언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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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방지법 그렇게 반대하더니… 우리나라도 여야 합의로 19대 국회(2012년)부터 필리버스터 제도를 부활시켰다.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본회의에 올라간 특정 안건에 대해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요구하면 의장은 이를 실시해야 한다. 단, 토론은 각 의원이 한번씩만 할 수 있으며, 재적의원 5분의 3의 요구로 토론을 종결할 수 있다. 2016년 2월23일 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국민의당 등은 테러방지법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진행했다. 모두 38명의 의원이 참여한 이 필리버스터는 192시간25분 동안 이어졌으며, 마지막 발언자인 민주당 원내대표 이종걸 의원은 12시간31분으로 국내 최장 기록을 경신했다. 이러한 각종 기록에도 테러방지법은 최종적으로 표결에 들어가 여당 안대로 통과됐다. 20대 국회에서 민주당 등 진보적인 정치세력이 다수파가 됐는데도 필리버스터 당시 통과된 테러방지법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지난달 29일 자유한국당의 필리버스터 시도는 현대 정치사에서 또 다른 기록이 됐다. 자유한국당은 그때까지 본회의에 올라온 법안 199개 모두에 대해 필리버스터 신청을 했다. 여기에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대표발의한 법안 27건도 포함됐다. 여당과 다른 4개 정당이 합의한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을 저지하기 위해 정기국회 폐회(12월10일)까지 시간을 벌겠다는 셈법이었다. 이에 대해 여당인 민주당은 본회의에 불참하는 전술로 자유한국당의 필리버스터 실행을 무산시켰다. 이 때문에 몸싸움은 없지만, 국회는 아예 작동하지 않고 멈췄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한국당의 이번 필리버스터는 형식상으로는 국회법에 따른 합법적인 의사진행이지만, 법과 제도의 취지를 무시한 행위다. 자기들이 반대하는 일부 법안을 막기 위해 여야 간에 합의가 됐거나 별 논란이 없는 법안들까지 모두 투쟁 수단으로 삼아 제때 통과를 막는 것은 필리버스터 제도를 남용하는 것이다. 다수의 일방적인 횡포를 막기 위한 필리버스터 제도를 유지하더라도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좀 더 정교하게 손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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