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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제3차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23일 오후(현지시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국제공항에 도착해 환영 나온 인사의 안내를 받고 있다. 암스테르담/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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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50
독일은 나치의 ‘반인륜’을 계속 기억·반성해서 성숙
한국선 기억이 삭제·왜곡돼 인권유린 찬양 세력 활개
민주화기념사업회마저 정권 장신구로 전락하면 전체주의 부활할 수도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갔다가 굳이 독일을 방문하는 이유를 국민들은 알고 있을 겁니다. 독일은 우리처럼 외세에 의해 분단됐지만, 우리와 달리 자력으로 통일을 이룬 국가입니다. 벌써 사반세기가 지났군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모습을 부러움과 아쉬움과 한편으론 원망 속에서 지켜보던 일이 말입니다. 독일을 방문하는 우리 지도자들이 그곳에서 꼭 특별한 행사를 한 것은 그런 까닭일 겁니다.
집권 2년차를 ‘통일론’으로 열어젖힌 당신에게도 이번 방독은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파친코와 잭팟을 연상시키는 충격적인 ‘통일대박론’으로 국민적 관심사와 논의를 주도했습니다. 때문에 독일 방문에선 통일 논의에서 무언가 분기점이 될 만한 천명이 나오리라 기대하는 건 당연합니다. 부탁 하나 하고 싶은 것은, 우리 국민을 파친코 앞에서 잭팟이나 기대하며 서성이는 그런 천박한 한탕주의자가 아니라, 화해와 평화를 꿈꾸고 추구하는 그런 멋쟁이로 세계인에게 부각시켜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이미 일정 중엔 한때 분단의 상징이었고 장벽 붕괴 후엔 통일의 상징이 된 브란덴부르크 문 방문이 있더군요. 통일 독일의 첫 외무장관인 한스디트리히 겐셔 전 서독 외무장관과 전 서독 내무장관인 볼프강 쇼이블레 재무장관 등 독일 통일의 주역들을 접견하기도 하구요. 그런 일정을 소화하기 전에 꼭 염두에 둘 게 있습니다. 통일을 꿈꾸건 평화를 희망하건 미래를 열어가는 열쇠는 바로 과거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는지에 따라 미래의 열쇠는 주어지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독일은 모범적인 곳이니, 이번 기회에 독일이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기억의 대상은 좋고 나쁘고, 부끄럽고 자랑스럽고, 기쁘고 슬픈 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물론 국가건 개인이건 좋은 건 기억하고, 부끄러운 건 웬만하면 지우려 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이야말로 미래의 문을 여는 열쇠꾸러미입니다. 성찰과 반성 속에서 시행착오를 줄이고, 바른 길을 찾아가는데 잘못의 교훈만큼 좋은 건 없습니다.
독일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알리는 기념물을 찾는 건 바보짓입니다. 오늘의 독일은 나치 독일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참회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독일엔 기억하고 싶지 않고,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을 담은 기념물이 넘쳐나는 건 그런 까닭일 겁니다. 이번에 이틀 머무는 베를린에도 숱합니다. 이 가운데 독일인이 가장 정성을 기울인 곳이 홀로코스트 기념비 공원입니다. 브란덴부르크 문도 좋지만, 베를린 중심가에 있다는 이 공원만큼은 꼭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적혀 있다는 다음 문장을 되새긴다면 더욱 의미있는 방문이 될 겁니다.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건 한 가지뿐이다. 인류가 아우슈비츠를 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을 나무라지만, 우리도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고 참회와 반성을 회피하는 데는 일본 못지않습니다. 일본에선 좀 모자란 우파 정치인과 시민들이 그런 성찰과 반성을 ‘자학 사관’이라고 매도하며 공격합니다. 그런데 그걸 우리나라의 잘났다는 정치인, 교수, 족벌언론, 재벌 등이 따라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합니다. 한반도 정복론자(정한론)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유린을 놓고, 나라 세우기와 선진화로 찬양하고 미화하는 데 열을 올리는 게 대표적입니다.
한때 당신은 그들과 동류로 여겨졌지만, 언젠가부터 이들과는 가는 길이 달라 보였습니다. 지난 대통령선거 운동이 한창이던 2012년 9월24일이었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했죠.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정치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음은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민주주의 가치다. 상처와 피해를 입은 분들과 가족들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2007년 7월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도 그랬죠. 한 청문회에선 “유신시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희생하셨던 분들과 고통받으신 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한 생각을 갖고 있다.” 2004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해서는 이렇게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시절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드린다.”
맞습니다. 당신이 거듭 사과하고 지킬 것을 다짐한 민주주의의 가치만큼 국가공동체에 중요한 건 없습니다. 그건 바로 민주공화국을 떠받치는 기둥입니다. 당신의 사과와 다짐에 진정성이 있다면, 그런 가치를 파괴했던 일을 기억하고, 그런 가치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했던 일을 기념하고, 나아가 그런 가치가 더 아름답게 꽃피도록 하는데 앞장서야 할 겁니다.
우리나라엔 그런 기관이나 기념물이 거의 없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유일하죠. 국가가 예산으로 지원을 하되, 민간인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기구 말입니다. ‘국립 4·19 민주묘지’와 ‘국립 5·18 민주묘지’도 국가가 전적으로 지원하고 운영하는 곳이긴 하지만, 가신 분들이 안장된 곳이지 기념사업을 하는 곳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거창한 기구도 아닙니다. 1년 예산이 60억원에 불과합니다.
그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지금 당신의 정부와 분쟁 속에서 사실상 폐점 상태입니다. 정부가 이사장 선임 절차를 무시하고 당신의 열성적인 선거운동원을 임명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임직원이나 민주화운동의 기억을 갖고 있는 이들이 들고 일어난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권력의 인권유린에 맞섰던 일을 기념하는 기구가 권력의 장신구로 전락할 위기인데 누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박상증 목사는 유신체제 아래서 기독교 사회운동을 했습니다. 당시 그는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고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역시 기억하고 기념하는 중요한 주체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난 대선 때 앞장서 당신의 선거운동에 나섰습니다. 함께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이들을 종북으로 내몰기도 했습니다. 불편부당한 입장에서 권력의 민주주의 가치 훼손을 억제해야 할 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분은 이미 민주화운동을 좌우, 진보 보수 혹은 이편 저편으로 분열시키는데 앞장섰으니, 다함께 이런 문제를 해나갈 자격도 없습니다.
게다가 정부의 임명 과정은 절차의 민주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했습니다. 지금까지 기념사업회는 ‘이사장 추천 위원회’에서 후보자를 복수로 추천했습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에서도 은근히 특정인을 밀기도 했지만, 이사장추천위원회는 이런 권력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부했습니다. 정치적 독립성과 중립성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의 말대로 민주주의 가치의 핵심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사 민주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목적에서라도 민주적 절차를 무시해선 안 됩니다. 그동안 누차에 걸쳐 반성하고 다짐한 장본인이 이명박 정부에서도 하지 않은 일을 그렇게 밀어붙이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독일에도 신나치주의라는 철부지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의 공적으로 지탄 받고 있습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이민족이라고 600만명의 유대인과 집시 등 소수민족을 학살하고,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파괴했던 자들을 민주사회가 어떻게 용인할 수 있겠습니까. 독일은 아예 나치의 휘장과 관행까지 법적으로 제재합니다. 독일 사회가 이렇게 성숙할 수 있었던 것은 나치의 반인륜 행위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들을 부단히 시행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기억의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독일도 지금의 일본과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해방 후 거의 40여년을 그런 전체주의 폭압 아래서 살아온 게 우리입니다. 독일만큼이나 기억할 게 많은 곳이 바로 우리입니다. 다행히 이웃을 침략하지는 않았지만, 전쟁과 길고 긴 독재체제는 자국민을 학살하고, 인권유린을 자행했고, 국민주권을 파괴했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 독재의 폭압과 인권 유린을 찬양하는 이들이 활개치는 건 바로 우리가 기억을 지우고 왜곡시켰기 때문입니다. 거의 유일한 민주화기념사업회마저 정권의 장신구로 전락시킨다면, 언제 또 다시 전체주의의 악령이 부활할 지 모를 일입니다.
박상증 목사의 임명이 당신의 뜻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게 당신의 의지라면 차라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폐쇄하십시오. 책정된 예산과 기존의 부동산 사무집기가 아깝다면 ‘박근혜 선양 사업회’라는 명판으로 바꿔 달기 바랍니다. 그러면 솔직하다는 말이나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이번 독일 방문의 교훈이 그런 일을 막아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벌써 편지가 쉰 통째입니다. 그리고 다시 봄입니다. 이런 구질구질한 청원과 핀잔 말고, 여성 대통령과 국민들이 연애하는 기분으로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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