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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24 20:03 수정 : 2013.06.24 20:03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한겨레>와 <중앙일보>가 함께 구성한 지면으로 두 언론사의 사설을 통해 중3~고2 학생 독자들의 사고력 확장에 도움이 되도록 비교분석하였습니다. 다음주 7월 2일에는 ‘육사 성폭행’에 대한 논제가 실립니다.

[한겨레 사설] 고용률 70%, 사회적 합의 수준 높여야 가능

정홍원 국무총리가 어제 ‘고용률 70% 달성 로드맵’을 발표했다. 회견장에는 10명이나 되는 장관들이 자리를 함께했고, 정부 모든 부처들이 고용률을 높이기 위해 짜낸 아이디어들이 로드맵에 망라됐다. 박근혜 정부가 고용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고용의 양과 질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대책이 주로 공공부문 일자리 늘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내년부터 시간제 일반직 공무원을 본격 채용하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민간 대 공공부문의 일자리 수는 대략 20배 차이가 난다. 공공 일자리를 늘려봐야 5%밖에 안 늘어나는 셈이다. 민간 일자리를 늘리기 위한 ‘마중물’의 역할을 얼마나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특히 양극화된 우리 노동시장의 현실에서 공공부문만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 경우,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더 굳어지지 않을지 걱정이 된다. 민간기업의 동참을 유도하기 위한 방안으로 세제 및 사회보험료를 지원하는 등의 유인책도 발표됐지만 노동시장의 경직도가 큰 우리 현실에서 효과가 크리라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결정적으로는 노사 사이에 이해가 상충하는 대책들이 많이 있는데, 문제를 풀어갈 동력을 로드맵에서는 찾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연간 근로시간을 200시간 줄인다고 하는데 임금이 줄어드는 만큼 갈등 요소는 커진다.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를 통해 연장·야간·휴일근로를 임금 대신 휴가로 대체하겠다는데, 이는 노사 사이에 이해가 충돌할 만한 사안이다.

고용 문제는 한 사회의 경제 구조와 역사적인 경험 등이 모두 반영된 복잡한 문제라, 정부의 의지만으로는 풀 수가 없다. 노동자와 사용자, 더 나아가 일반 시민들의 공감과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안이다. 그런데도 노사정 대화의 틀에 조직노동의 33% 이상을 대표하고 있는 민주노총이 빠진 것은 원인이야 어떻든 정부의 노력 부족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한국노총은 포섭하고 민주노총은 배제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민주노총의 주장을 불식하기 위해서라도 정부는 민주노총을 대화상대로 인정해야 한다.

더 나아가 정부는 양대 노총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관심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도 주력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양대 노총이 대변하지 못하는 중소기업, 비정규직, 여성 등의 취약 계층이 너무나 많다.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통로도 마련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뿐만이 아니라 시민단체 중심으로도 다양한 토론회를 만들어내 사회적 관심을 끌어올려야 할 것이다.

[중앙일보 사설] 고통 분담 없는 시간제 일자리는 없다

한국노총과 경총, 고용노동부가 그제 시간제 일자리 확대에 합의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주축인 민노총이 빠진 게 아쉽지만,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를 만들자는 데 노·사·정이 최종 합의한 것은 의미가 깊다. 물론 합의안을 들여다보면 실망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다. 세부적인 목표나 구체적인 계획, 합의안을 관철하기 위한 강제 규정은 찾기 어렵다. 오로지 ‘노력하겠다’ ‘협력하겠다’는 추상적인 표현만 넘쳐난다. ‘고용률 70%’라는 청와대의 압박에 노·사·정이 설익은 합의로 서둘러 봉합한 게 아닌지 의문이다.

박근혜정부가 고용률 70%를 달성하려면 5년간 25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힘겨운 목표다. 거듭 강조하지만, 경제가 성장하지 않으면 일자리는 늘지 않는다. ‘고용 없는 성장’이란 문제에 앞서 ‘성장 없는 고용’은 아예 불가능하다. 최근 수출 대기업들의 고용 흡수력은 바닥을 보이고 있다. 설비투자를 하더라도 해외에 공장을 짓거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자동화 설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생존 기반이 흔들리는 중견·중소기업들은 현재의 고용 수준을 유지하기도 벅차다. 창조경제의 주인공인 벤처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새로운 대안으로 여겨지는 서비스업은 규제 완화가 지지부진해 게걸음을 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세운 ‘시간제 일자리 확대’는 뚜렷한 한계를 안고 있다. ‘시간제 일자리=좋은 일자리’라는 표현부터 모순이다. 김대중정부 이후 수없이 시간제 근무 실험을 했지만 대부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실업률 수치를 분식하기 위한 땜질식 처방일 뿐이었다. 이번에도 시간제 일자리가 늘어나면 출산·육아로 경력 단절이 생긴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입에는 숨통을 틔워줄지 모른다. 하지만 양질의 일자리를 확보하고 고용률을 끌어올리는 근본 처방이 아니다. 2003년 독일의 ‘어젠다 2010 구조개혁’이나, 1982년 노·사·정 고통 분담을 전제로 한 네덜란드의 ‘바세나르협약’과 한참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시간제 일자리 확대가 유일한 차선책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연간 노동 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300시간이 긴 2100시간이다. 노동 시간을 줄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시간제 근로를 확대해 일자리를 나누는 수밖에 없다. 정부가 시간제 근로자의 고용 안정성을 정규직과 차별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향이다. 하지만 시간제 일자리 실험이 성공하려면 그제와 같은 ‘껍데기 협약’으로는 어렵다. 공공 분야의 경우 정부가 1만 명의 시간제 공무원을 뽑겠다고 했다. 문제는 이런 흐름이 민간 기업까지 파급될 수 있느냐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근로 시간 단축에 따른 임금 삭감에 반발할 게 분명하다. 독일·네덜란드처럼 이들을 설득해 양보를 얻어내지 못하면 결국 비정규직만 양산하게 된다. 이런 비극을 막으려면 민노총을 포함한 새로운 노·사·정 합의가 필요하다. 정부는 고용률 70%의 목표보다 대기업 정규직의 마음을 얻는 게 중요하다. 고통 분담 없이는 경제 위기를 넘기기 어렵다.


OECD 주요국 주당 평균 근로시간

[논리 대 논리]
사회적 합의 앞세운 한겨레, 가진자 양보 강조한 중앙

단계 1 공통 주제의 의미

‘고용률 70%’ 달성은 박근혜 정부의 핵심 공약 사항이다. 일자리가 많아지면 소득과 소비가 늘어나면서 시장이 살아난다. 나아가, 경제가 성장하며 또다시 일자리가 창출된다. 이렇듯 일자리 확대는 바닥을 기는 우리 경제가 살아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문제는 고용률 70%를 이루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앞으로 5년간 238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매년 48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일이다.

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수출과 제조업 중심인 우리의 자본집약적 산업의 특성상, 쏟아붓는 돈은 자동화 등을 위한 설비 투자에 들어간다. 따라서 실제 고용은 크게 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용을 늘릴 방안은 근로 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나누는 것밖에 없다. 박 대통령의 ‘시간제 일자리도 좋은 일자리’라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단계 2 문제 접근의 시각차

정부의 일자리 창출 정책에 대해, 한겨레와 중앙은 일단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지하는 근거는 완전히 다르다. 일반적으로 진보는 ‘평등’과 ‘분배’에, 보수는 ‘자유’와 ‘성장’에 방점을 두곤 한다. 한겨레와 중앙의 논조도 다르지 않다. 한겨레는 일자리 창출을 ‘부의 재분배’라는 차원에서, 중앙은 ‘경제 성장’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듯 보인다.

중앙의 사설은 ‘성장 없는 고용은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한다. 하지만 성장을 하더라도 고용이 늘지 않는 우리 경제의 현실상, ‘유일한 차선책’으로 시간제 일자리 확대를 받아들일 뿐이다. 반면, 한겨레는 경제 성장을 언급하지 않는다. 일자리 창출에는 ‘노동자와 사용자, 더 나아가 일반 시민들의 공감과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그러나 두 입장은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 우리 경제는 성장해야 하고, 소득 불균형도 시급히 해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용률 70% 달성 로드맵’은 1930년대 미국 켈로그 공장에서부터 불거진 ‘6시간 대 8시간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근로시간을 6시간으로 줄이면 더 많은 사람들과 일자리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 각각의 수입은 줄어든다. 8시간 근무에, 연장근무까지 하겠다고 나설 때는 취업자의 수입은 많아진다. 반면, 직장이 없는 이들의 처지는 더 어렵게 된다.

‘6시간 대 8시간’ 논쟁은 ‘8시간’의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노동은 ‘남성, 전일제 중심의 장시간 근로’로 굳어졌다. 빈부격차는 더 벌어졌고 실업 문제도 심각해졌다. 다행히도,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6시간’의 손을 들어주는 쪽이다. 네덜란드 바세나르협약은 근로시간을 줄이며 고용안정을 보장하는 시간제 일자리를 늘리는 정책을 골자로 한다. 독일도 ‘어젠다 2010’을 통해 유연근무제를 확대하고 있다.

단계 3 시각차가 나온 배경

일자리 나누기는 이제 거부하기 힘든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 이 점은 중앙도, 한겨레도 받아들인다. 하지만 구체적인 해법은 역시 엇갈린다. 중앙은 ‘고용률 70%의 목표보다 대기업 정규직의 마음을 얻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진 자의 솔선수범과 양보를 앞세우는 보수주의의 색채가 느껴진다.

반면, 한겨레는 ‘양대 노총이 대변하지 못하는 중소기업, 비정규직, 여성 등의 취약 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통로도 마련하라’고 충고한다. 정책은 가장 소외된 이도 혜택을 누리는 쪽으로 고안되어야 한다는 사민주의의 색깔이 드러난다.

나아가, 양 사설은 모두 민주노총이 일자리 창출을 위한 노사정 합의에 함께해야 함을 강조한다. 민주노총에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많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일자리 나눔에 있어 ‘설득과 양보’를 이루어내야 할 상대이다. ‘고통 분담 없이는 경제 위기를 넘기기 어렵다’는 중앙의 문구, ‘노사정 대화의 틀에서 조직노동의 33% 이상을 대표하고 있는 민주노총이 빠진 것은 원인이야 어떻든 정부의 노력 부족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는 한겨레의 표현에서는, 이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성장이 우선인가, 분배가 먼저인가 하는 논란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하는 논쟁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성장과 분배는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다. 성장이 분배를 이끌고, 분배가 성장을 이끄는 사회는 건강하다. 이 점에서 한겨레와 중앙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키워드로 보는 사설]
고용률 70% 로드맵과 시간제 일자리 확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만달러가 넘는 국가의 평균 고용률은 72%라고 한다. 고용률이 70%는 넘어야 경제 성장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일자리가 다시 경제 성장을 이끄는 경제의 선순환이 일어난다. 또한 고령화로 인해 급격하게 늘어나는 복지 재정 부담을 줄이려면 취업자를 늘려야 한다.

그러나 고용률을 높이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우리 경제의 성장률이 하락하고 있을뿐더러, 성장하더라도 일자리가 예전만큼 늘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수출, 제조업 중심으로 경제를 키워왔다. 이런 산업은 내수, 서비스업보다 취업 유발 효과가 낮다. 그뿐만 아니라, 남성 외벌이 위주인 근로 현실은 여성, 청년 등의 취업을 어렵게 한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일자리 나눔을 골자로 하는 ‘고용률 70% 달성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시간제 일자리 확충’, ‘유연 근무’, 초과근무에 대한 수당 대신 휴가를 늘리는 ‘근로시간 저축 계좌제’의 실시를 뼈대로 한다.

문제는 우리에게는 ‘좋은 시간제 일자리’라는 개념이 낯설다는 점이다. 독일의 ‘어젠다 2010’ 개혁은 시간제 일자리 등으로 노동 유연성을 살려 경제의 돌파구를 연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월급 50만원짜리 일자리 170만개를 늘렸을 뿐’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긴 노동시간, 남성 위주의 전일제 노동’으로 대표되는 우리의 노동 현실에 변화가 절실하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고용률 70% 달성 로드맵’에 대해, ‘노동의 질과 양을 획기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라는 의견과 ‘임시직 근로자를 양산하는 땜질식 처방’이라는 비판이 엇갈리는 이유다.


[추천 도서]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 지음, 주경철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2007년

8시간 VS 6시간: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1930~1985
벤저민 클라인 허니컷 지음, 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 2011년

돈을 더 많이 버는 게 좋을까, 벌이를 줄이고 여가를 더 많이 누리는 것이 좋을까?

살림살이가 먹고살 만한 정도에 이르면, 이 문제에서 비켜서기 어렵다.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그리는 나라에는 사치가 없다. 사람들은 하루에 6시간만 일해도 부족함이 없다. 노는 사람 없이 모두가 일을 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런 유토피아의 모습이 답답하기도 하다. 남들보다 더 많이 누릴 수도, 앞설 수도 없는 사회가 과연 행복할까?

<8시간 VS 6시간: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1930~1985>도 많은 생각을 안긴다. 신자유주의는 경쟁과 효율을 최고의 미덕으로 앞세운다. 하지만 인생에는 함께 잘사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경쟁력과 상생, 우리 사회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제3의 대안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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