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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횡단여행 중 사귄 친구들인 카를로스(왼쪽)와 고르고 스페인 형제. 나는 일상에 복귀했지만 이들은 페달을 밟아 멕시코와 코스타리카를 거쳐 쭉쭉 니카라과로 갔다. 이들이 사진을 보내올 때마다 나는 머리가 멍해진다. 세계로 뛰쳐나가고 싶은 격정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올해 1월 보내온 사진은 니카라과 호수에 떠 있는 오메테페 섬의 콘셉시온 화산이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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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와 한판 붙자고 할 수 없는 약자의 한계
평화를 얻으려면 강자를 포용해야 할 처지
운전자 째려보기·주먹다짐 모두 나만 손해다
그래서 손을 흔들어 준다. 약자의 반어법으로
홍은택의 ‘서울 자전거 여행’ ⑬
나는 라이더들이 운전자와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강자인 자동차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데 우리만 배워서 무슨 소용 있느냐는 볼멘 소리가 나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자동차와 사고가 나면 모두 우리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말했을 때 운전자의 눈치를 너무 많이 보는 것 아니냐는 눈총을 받기도 했다.
내 말은 약자의 비애를 반영한 반어법이다. 사고가 나면 죽거나 다치는 쪽은 항상 라이더이기 때문에 사고를 절대 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고나면 내 책임이라는 태도를 지닐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실제 사고가 나면 책임 유무는 철저히 가리더라도 말이다.
공존할 생각도 안 하는 자동차와 같이 사는 길 역시 약자인 우리가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자동차와 한판 붙자고 할 수 없는 자전거의 육체적 한계는 약자가 오히려 강자를 포용해야 하는 신 평화주의를 만들어낸다. 그건 라이더들이 본래부터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는 윤리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자전거일지의 초반 몇 개월치를 읽어보면 언제 어디서 운전자와 무슨 일이 있었다는 내용이 많다.
“5월9일
7시49분 출발, 8시45분 도착. 다른 자전거 뒤를 좇아가면서 바람을 피해. 약수 고가차도 밑에서 경적 울리는 택시 앞에서 잠시 주먹을 쥐어보이며 시위.”
“5월25일
오전 8시2분 출발, 오전 8시59분25초 도착. 집 앞 사거리에서 첫 신호를 받고 일원터널을 잽싸게 건너 다시 파란 불을 받으려다 빨간 불에 걸려. 처음으로 약수 고가도로를 타고 장충동 진입. 고가도로 중간에 공사중이어서 차량들이 서행한 틈을 헤집고 들어가. 자꾸 지나가는 버스를 보고 소리를 지르게 됨.”
처음 차도로 내려섰을 때는 내가 끼어든 것 같아서 불필요하게 빵빵대도 참았다가 차츰 같은 길로 오가면서 나도 길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자 텃세성 경적에 예민해졌다. 운전자를 노려도 보고 욕도 하고 마치 내가 따라갈 수 있는 것처럼 세게 페달을 밟아 좇아가는 흉내도 냈다. 하지만 보복도 제대로 못하고 나만 속을 끓일 뿐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는데 손을 들어서 흔들어주는 것이었다. 나라마다 욕설하는 법이 다르다. 우리 어렸을 때 하듯 엄지손가락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넣고 주먹을 쥐어 보이면 미국에서는 “귀엽네” 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 동작을 한국에서 하면 안 되는 것 알죠?) 반면 미국에서 하듯 다른 손가락들은 꺾고 중지만 올려보이면 한국에서는 “뭔데” 하고 묻게 된다. 지금은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봐서 많이들 그 뜻을 알겠지만.
내가 손을 흔드는 건 어릴 때 장난으로 하던 그 손동작과 똑 같은 의미지만 운전자들은 금방 태도가 누그러진다. “짜아식, 그렇게 꼬리를 내릴 놈이” 하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입에 담지 못할 욕을 손으로 했는데 저쪽의 태도가 물러지니 뭐, 내가 이긴 거라고 치자.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떼잔차질을 주동하는 크리티컬 매서들은 “나를 좋아한다면 제발 경적 좀 울려줘”라는 피켓을 들고 다닌다. 약자의 반어법이다.
경적으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운전자들도 답답한 노릇일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강약과 장단으로 다양한 의사를 표현하려고 한다.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메시지다. “너보고 깜짝 놀랐잖아”는 보통 한번 짧고 세게 누른다. 감정의 여운에 따라서는 길 수도 있다. “이리로 오지마”는 두세 번 짧고 굵게 경적이 울릴 경우. “저리 비켜”는 좀 더 공격적이기 때문에 두세 번 길게 울린다. “신호는 빨간 불로 바뀌고 있지만 지금 속도를 줄일 수 없거든. 그러니 모두들 피해”는 경적이 가장 길다. 누구를 치기보다는 자신이 당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긴급한 메시지를 보내려고 한다. 또는 “까불래?”도 있고 “안녕”도 있는데 이 경우들은 강약과 장단이 다양하게 조합될 수 있기 때문에 일반화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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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 고르고는 혼자 어느 새 중국 간쑤(甘肅)성으로 갔다. 중국을 한번 횡단한 바 있는 그는 이번에는 다른 루트로 여행중이다. 환경미화원인 그는 가진 게 없어 자유롭다. 그가 영화 아멜리에에 나오는 난장이 인형처럼 일상에 묶인 나를 대신해서 세계를 돌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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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진하는 차 경적소리 가장 길어
한번은 동대문 운동장에서 청계천로로 좌회전하기 위해 중앙차선에 멈춰 있는데 가벼운 빵빵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손을 흔들어주고 있다. 아니 ‘나보고 그렇게 심한 욕을?’ 이윽고 차창이 열리고 “홍은택씨죠? TV에서 봤어요” 라는 젊은 여성의 한마디.
나로서는 지금 내 등 뒤에서 들리는 경적의 메시지를 곱씹어볼 필요가 없다. 어느 경우든 손을 들어 흔들어주기 때문이다. 나한테 감정이 안 좋은 운전자들은 내가 사과하는 것으로, 내게 우호적인 운전자들은 내가 화답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내가 항상 그런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7월6일 더운 여름 아침, 운전자와 처음으로 입씨름을 벌이는 일이 일어났다. 한강 둔치에서 동호대교로 진입하는 길은 인도밖에 없는 단점이 있다. 인도로 다리를 건너 옥수터널로 진입하려면 좁은 고갯길을 올라가야 한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골목길. 짧지만 가파른 길이어서 자전거를 밀고 가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이날은 자전거에서 내리고 싶지 않아 핸들을 요리조리 틀면서 겨우 균형을 잡아 올라가고 있는데 바로 뒤에서 끽 서는 소리와 함께 심한 경적이 울렸다. “너 때문에 깜짝 놀랐잖아”다.
나는 자전거를 세워 뒤돌아 운전자를 노려봤다. 운전석 유리창이 내려지더니 운전자의 얼굴이 나왔다. 건장한 30대 남성. 한판 붙으려면 힘 좀 써야 되는 상황. 내가 선공했다.
“뭘 보세요. 자동차랑 자전거 같이 갈 수 있게 돼 있는 거 몰라요? 뒤에서 오셨잖아요. 왜 경적을 울리세요?”
“갑자기 핸들을 트니까 그렇죠.”
“그렇다고 제가 찻길 중앙으로 갔나요?”
잠시 침묵.
“자전거 빼 주세요.”
뒤로 차들이 밀려 있어 자전거를 길 가로 일단 뺐다.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기는 싫다. 그 승용차는 천천히 언덕 위로 올라가더니 멈췄다. 정말 한판 붙자는 건가. 걱정도 되고 각오도 하면서 자전거를 밀고 올라갔더니 그 차는 오른 쪽으로 꺾어지려는데 다른 차 때문에 막혀 있었던 데 불과했다. 나는 왼편으로 가면 되기 때문에 그냥 가려고 하다가 차에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운전자가 오히려, 걸려들었구나 하는 상기된 표정으로 차창을 내렸다. 사실 덥수룩한 수염에 시커먼 내 얼굴이야말로 한 인상 한다.
“아침 출근길에 맘을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 운전자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되면서 말 대꾸를 하지 못했다. 잘잘못을 떠나서 나는 그의 아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내 아침도 다시 밝아지기를 바랐다.
서있는 차, 자전거 운진폭 좁혀
나는 자전거 출퇴근하면서 똑 같은 악몽을 몇 번이나 꾼 적이 있다. 교차로에서 직진신호를 기다리면서 옆길의 신호등을 쳐다본다. 이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면 진행방향의 신호등은 파란 불로 바뀔 것이다. 나는 준비를 하고 있다가 옆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는 것을 보고 출발한다. 그러나 이쪽 신호등은 여전히 빨간 불이었고 가로지르는 차들이 나를 덮친다.
이 악몽이 반복되는 걸 보면 사고의 공포가 생각보다 깊숙이 무의식에 숨어 있는 모양이다. 사실 사고 근처까지 간 적도 있다. 도로에는 온갖 위험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서울에서 차도 주행하는 게 안전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나는 서울에 위험 요인이 많지만 안전하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위험 요인들을 미리 숙지하고 있으면 안전도를 크게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와 공존하는 법은 위험 요인의 분석에서 시작된다. 내가 생각하는 첫 번째는 달리는 차가 아니라 서 있는 차다.
먼저 길가에 서 있는 차들. 길가로 가게 돼 있는 자전거의 운신의 폭을 좁힌다. 비단 한 차선을 잡아 먹어서가 아니다. 자전거의 주행 흐름을 들쑥날쑥 왜곡함으로써 직진하는 자동차들과의 충돌 가능성을 높인다. 자전거는 차가 서 있을 경우 차를 피해 도로 안쪽으로 주로를 틀었다가 다시 길가로 돌아가는 ㄷ자 주행을 해야 한다. 뒤에서 달려오는 운전자들은 자전거가 핸들을 꺾어 들어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서 있는 차 옆으로 바싹 붙어서 주행하다가는 갑자기 열리는 차문에 들이박을 수 있다. 요즘 차들은 차창을 검게 칠하고 다니기 때문에 차 안에 운전자가 있는지 알기 어렵다. 운전자들은 후사경을 통해 차가 오는지만 살피고 자전거를 대개 간과한다. 특히 내가 다녔던 청계천로의 경우 가게에 물건을 부리려고 많은 차들이 길가에 정차해 있어서 차문에 받힐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차가 길가에 세워져 있을 경우에는 최소한 1.2 미터의 옆 공간을 그 차에 속한 영역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른바 ‘문 구역(door zone)’이라는 개념이다. 권투를 할 때 저쪽에서 펀치를 날릴 수 있는 범위라고 생각하면 된다. 도어 존을 존중하려면 차도 안쪽으로 더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차문에 들이박을래 아니면 뒤에서 오는 차에 받힐래의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도시 주행 전문가들은 그래도 도어 존을 존중하는 게 사고위험을 낮춘다고 본다. 어쨌든 사고의 위험이 크게 줄어드는 것은 아니니 나랏님들, 불법 주정차한 차들 단속 좀 세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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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아메리카 자전거 여행〉〈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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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차들이 위험한 또 다른 이유는 보통 급출발한다는 점. 뒤에서 자동차가 오지 않는 짧은 틈을 타 진행 차선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서두르기 마련이고 자전거를 보통 보지 못한다. 청계천에서는 거의 사고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 정차해 있던 승용차가 갑자기 내 주행차선으로 들어왔다. 그와 내가 그리는 두 직선이 한 점에서 수렴되는 순간, 나는 차 앞 덮개를 짚고 멈췄고 운전자도 방향을 완전히 내 쪽으로 틀지 않아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운전자를 째려보다가 운전자가 차창을 열려고 해서 그냥 손을 흔들어 주고 갔다.
무엇보다 갑자기 서는 차들이 위험하다. 종종 택시들은 손님을 뒤늦게 발견하고 예상에 없던 차선 변경을 하면서 자전거 앞에 차를 세운다. 나도 장충동에서 방향을 바꿔 급정차하는 택시를 보고 브레이크를 급히 잡다가 뒷바퀴가 돌아버린 적이 있었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움직이는 차의 위험요인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더 따져보기로 한다. 나는 자전거 출퇴근 경력 11개월째지만 아직 사고를 내거나 당한 적은 없다. 그것은 이 전에 여러 유형의 자전거 사고를 다양하게 경험하면서 터득한 게 있기 때문이다.
홍은택/〈아메리카 자전거 여행〉〈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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