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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2.28 23:06 수정 : 2007.02.23 17:07

한남대교 북단에 서 있는 암사자 상. 서울을 향해 포효하고 있는데 누군가 맥주캔으로 입을 막아 놓았다.

홍은택의 ‘서울 자전거 여행’(16)

자전거 페달을 밞다 무아지경 이르지 말길
지나가는 곳에 대한 ‘관찰의 여행’으로 삼아보자
산과 강이 끊김없이 이어지는 한남대교 노선
역사적 사색 잠기기엔 안성맞춤 코스였다

자전거 타기는 명상이 아니다. 달리기와 다른 점이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너무 하다 보면) 자신을 통제하고 있는 에고가 무너져 내리면서 새로운 경지(또는 무아지경)에 오를 수 있다. 주선(走禪)이라는 말도, 내면으로 달린다는 말도 가능하다. 페달을 밟아도 지속적으로 가속하다 보면, 자전거와 한 몸을 이루며 터질 듯한 심장의 압박을 느낀다. 그 상태에서 조금 더 가면 에고가 가물가물 몸에서 떠나가면서 무아지경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을 것도 같다.

언젠가 탄천 자전거도로에서 라이더 세 명과 인라인 스케이터 1명으로 구성된 일행이 나를 가볍게 추월하길래 장난기가 발동했다. 한번 해보자 이거지. 가속 페달을 밟아 추월해버렸다. 바로 일행의 반격이 시작됐다. 좇아오는 기색이 느껴진다 싶더니 곧 나를 다시 따돌리고 여유 있게 앞으로 나아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주가 시작된 것이다. 입은 사이클복이나 자전거의 상표 그리고 앉은 자세를 볼 때 내공이 깊어 보인다. 괜히 자존심을 건드렸나 싶으면서도 앞 기어를 3단으로 놓은 채 뒤 기어를 4단에서 6단으로 올렸다. 그러면서 페달밟는 간격은 유지했다. 그걸 리듬이라고 하는데 리듬감있는 이상적인 페달질은 1분당 80회로 알고 있다. 한 명, 두 명, 세 명 거기에다 인라이너까지 차례로 제쳤다. “어, 어” 하는 탄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그리고는 다시는 추월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사타구니에서 비파소리가 나도록 페달을 돌렸다. 1분당 100회쯤 되지 않았을까.

인라인 추월하느라 무의식 진입

이제 뒤에서 좇아오는 기미가 없다. 그런데 한번 발동 걸린 몸은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 거친 호흡이 더욱 빨라지면서 점점 의식이 몸에서 빠져나간다. 무의식의 상태로 진입한다. 그렇게 수 킬로미터를 달렸나 보다. 눈은 뜨고 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다. 페달을 밟는다는 의식 없이 저절로 자전거가 간다. 스스로 무서워졌다. 서서히 감속했다. 호흡이 진정되고 의식이 돌아온다. 매우 위험한 일이다. 속도 때문이다. 달리기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어딜 처박거나 차가 와서 들이박는 일을 초래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전거는 그럴 수 있다.

자전거 타기는 그래서 의식을 비우는 명상의 경지까지 가면 안 되고 문명화된 약질의 몸에 야생성을 불어넣는 자극 정도로 끝나야 한다. 지나가는 곳에 대한 명징한 의식을 유지해야 하니까 관찰의 여행으로 삼아야 한다. 관찰도 여러 종류다. 극단적으로는 몇 십 킬로미터의 여정을 마치고 나서 기억나는 것은 노면의 상태뿐일 수도 있다. 길바닥만 쳐다보고 다녔기 때문이다. 기왕 관찰하는 김에 표면뿐만 아니라 길 그리고 길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의 내적 깊이에까지 관찰해보자.

한남대교 노선이 좋은 것은 그런 기회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서울은 크게 보아 한강의 수경이라는 x축과 북악산 남산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산경의 y축으로 이뤄진 사분면이다. x축과 y축이 만나는 산수의 중점에 한남대교가 있지 않나 싶다. 원래 서울 도심의 수경축은 청계천이었다가 강남으로 서울이 뻗어가면서 한강으로 대체됐다. 강남으로 인구와 부의 이전을 중계한 다리가 바로 한남대교라는 점을 감안하면 중점이 될 자격이 있기도 하다.


실제로 한남대교 노선은 서울의 산과 수를 거의 끊김없이 연결한다. 집에서 출발해 조금만 가면 양재천이 나오고 이어서 탄천을 휘돌아 가면 한강의 x축에 올라탈 수 있다. 한남대교에서부터 남산을 통과하는 y축이 시작되는데 처음엔 타이, 캄보디아, 라오스, 수단 대사관들이 몰려 있는 대사관길로 가다가 곧 한남로로 코스를 변경했다. 한남고가차도에서 자출하는 라이더를 만나 길을 안내 받았기 때문이다. 그 때가 자출 6개월 차였는데 이 라이더는 기막히게 나와 자출 연륜이나 노선이 같았다. 같은 동네에 있는 목련아파트에 살고 종로구청 근처의 직장까지 출퇴근한다고 했다. 시작한 지 6개월 된 것도 똑 같았다. 자출 동반자를 만나기는 처음이다.

다소 연배가 위인 것 같은 이 분은 한남로를 통해서 남산맨션이 있는 초입부터 소월길을 탈 수 있는 길을 알려줬다. 잘 빠진 자전거에다 레스포로 마스크를 쓰고 있다. 탄소 필터가 있는 그 마스크다. 영국의 체인지 리액션이라는 곳에 직접 주문해 5만원 주고 샀다고 한다. 녹차를 병에 담아왔고(아침에 그럴 정신이 있다는 게 존경스럽다) 사이클화와 페달이 밀착된 클립리스 페달에서 웬만해서는 발을 안 뽑는 걸 보아 상당한 수준의 라이더임에 틀림없다. 26인치 바퀴를 쓰고 있어 20인치를 쓰는 나보다 속도가 빨랐는데 출근에 55분 걸린다고 해서 다소 의외였다. 나도 이 노선으로 가면 한 시간쯤 걸리니까 큰 차이는 아니다. 그는 “운동량으로 이 거리가 딱 좋다”고 말했다. 그게 그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매일 같은 코스로 거의 같은 시간대에 가지만 페이스가 다르면 서로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일렬 주행해야 하니까 같이 간다고 해도 얘기를 충분히 나누기는 어렵다. 그러니 묵묵히 주위의 경치와 대화를 나눌 수밖에.

한남대교 노선에서 호기심을 끄는 것은 남, 북단에 있는 사자상이다. 남단의 수사자상이 경부고속도로 거리 표시의 기점이다. 난 그게 해태인 줄 알았다. 풍수지리학자들에 따르면 서울의 문제점은 주산인 북악산(342m)보다 관악산(629m)의 지세가 더 세고 중후해서 주산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 그래서 관악산에서 올라오는 남쪽의 화기를 막기 위해서 불을 삼키는 해태를 광화문을 비롯, 궁궐과 다리 곳곳에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한남대교에는 왜 해태가 아닌 사자상을 세웠을까. 서울보다는 작아도 한참 작은 존재인 다리의 보초역으로 신화적인 존재인 해태를 동원하기는 무리였나 보다. 한남대교 자체는 삼엄한 보호를 받을 만한 지물이다. 다리에도 사주팔자가 있다고 하면 한남대교는 아마 나중에 크게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괘가 나올 것 같다.

제3한강교라는 이름으로 공사가 시작될 1966년에는 강남북 아니 서울과 지방의 물류를 한몸에 실어나를 나라의 동량으로 전혀 기대받지 못했다. 당시에는 한강에 인도교와 제2한강교(후에 양화대교), 광진교밖에 없어서 북한군이 또 쳐들어오면 350만 명의 서울시민이 어떻게 피난가나 하는 소박한 걱정에서 만들기 시작한 피난용 다리였다. 그런데 67년 박정희 대통령이 선거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들고 나오면서 그리고 남산 1호 터널이 70년 8월 뚫리면서 일약 저기 부산 동래에서부터 서울 도심까지 연결하는 대동맥의 마디가 됐다. 지금은 한강 다리들 중 왕복 12차선의 가장 폭넓은 면적으로 20만5747대의 가장 많은 일일 교통량을 소화하고 있다.

미 대사관저와 덕수궁 사이의 돌담길은 서울에서 아마 가장 한적한 길일거다. 미 대사관저까지 다 덕수궁 경내였기 때문에 예전에는 없던 길이다. 하비브 하우스라고 불리는 대사관저를 전·의경들이 지키고 있다.
피난용 다리였던 한남대교는 지금은 최다교통량을 소화한다
덕수궁 돌담길 달리다보니 방사형 도로 원형 기원이 고종황제 시절임도 알게 됐다

대동여지도를 봐도 요지였던 곳

한남대교가 벼락출세한 것이라기보다는 이곳이 원래부터 쓰임새가 요긴한 지형이었던 것 같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동래에서부터 서울까지의 영남대로가 표시돼 있는데 영남대로의 끝 자락이 바로 한남대교를 지나간다. 상경하는 봇짐장수와 선비들이 양재역에서부터 강남대로를 타고 올라와 오늘날 한남대교 남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영남대로는 경부고속도로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졌지만 역사지리적 원형으로 남아서 한남대교를 받치고 있는 셈이다. 그 길은 나는 자전거 타고 건넌다.

한남대교 노선의 y축은 녹지로 이뤄진 띠다. 남산의 소월길에서 내려와 숭례문에서부터 시청 앞까지 잠시 녹도가 끊어졌다가 덕수궁 돌담길을 휘감아 돌면서 다시 푸른 길이 이어진다. 돌담길을 따라 가는 덕수궁과 미 대사관저의 사잇길은 도심에서 가장 한적한 길이다. 원래는 미 대사관저와 옛 경기여고, 덕수 초등학교 모두 덕수궁의 경내였던 만큼 없었던 길이다. 전·의경들이 지키고 있는 틈을 타서 대사관저의 정문 안을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안에서 된장찌개를 끓여먹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매우 전통적인 한옥이 있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가 된장찌개에 손도 안 댈지는 모르지만. 미 대사관저를 하비브 하우스라고 부르는데, 보이는 저 건물인지도 모른다.

지난 회에서 서울 방사형 도로의 기원이 총독부 시절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고 썼을 때 염두에 둔 것이 바로 덕수궁이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는 일본과 친일파를 피해 1896년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1년 뒤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이라고 불리던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이어 원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는데 염복규씨의 책 <서울은 어떻게 계획되었는가>에 따르면 시정(市井)에 가까운 덕수궁에서 절대 왕권을 상징하는 도로망을 계획하게 된다. 궁은 이제 도로의 기점이자 시선의 종점이 된다. 그게 바로 오늘날 덕수궁 앞과 면해 있는 시청 앞 광장이 방사형 도로망의 중심이 되고 있는 배경이다. 당시 덕수궁은 오늘날의 세종로의 일부까지 포함하고 있었으나 ‘불도저 시장’으로 불리던 김현옥 서울시장이 도로를 확장한다면서 담을 안쪽으로 밀어붙였다.

한번 방사형 도로망이 생기면 연쇄적으로 새끼를 치게 된다. 도로가 빗금으로 뻗어나가면서 다른 도로들과 예각으로 교차하기 때문에 원활한 방향전환을 위해 교차의 중심을 원형으로 만들어야 한다.

홍은택/〈아메리카 자전거 여행〉〈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그 흔적이 오늘날 정동 서울시립미술관과 정동 제일교회, 신아일보 등이 몰려 있는 다섯 길의 교차로다. 나는 이 교차로를 보면서 마치 워싱턴 DC 곳곳에 있는 원형 교차로들을 닮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염복규씨에 따르면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도로망 계획의 책임자였던 내부대신 박정양, 한성판윤 이채연 등이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워싱턴 DC의 도로망과 공간구성을 본뜬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썼다. 워싱턴 DC의 방사형 도로망은 파리 베르사이유 궁전의 도로망을 본 뜬 것이니 프랑스 절대왕정의 문화가 스며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덕수궁의 석조전도 워싱턴 DC에 있는 재무부 건물과 정면의 모습이 흡사한데 모두 유럽의 신고전주의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절대왕권을 강화하려 한 시기가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국력이 취약한 시기였다는 점이 반어적일 뿐이다.

여기까지 오면 남산을 넘어오면서 거칠어졌던 호흡이 가라앉고 출근후 할일을 생각하게 된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밖에 시선을 주느라 일과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울 수 있었다. 자전거 타기는 달리는 명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달리는 사색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지난 회에 숭례문을 지키는 병사에 대해 여쭤봤는데요. 김창영씨께서 조선시대에는 수문장으로 불렸다고 전해왔습니다. 수문장들의 교대의식은 교대안검 전례라고 부른다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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