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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27 10:20 수정 : 2019.03.28 17:52

미 로체스터대 애덤 프랭크 박사는 이스터섬의 사례를 토대로 문명 - 행성 시스템의 진화 모델을 만들었다. 로체스터대 제공(일러스트 Michael Osadciw)

[곽노필의 미래창]

미 로체스터대 애덤 프랭크 박사는 이스터섬의 사례를 토대로 문명 - 행성 시스템의 진화 모델을 만들었다. 로체스터대 제공(일러스트 Michael Osadciw)

세상에서 가장 외딴 곳에 있는 섬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의 남동쪽에 있는 이스터섬은 세계에서 가장 외딴 곳에 있는 섬 가운데 하나다. 칠레 본토에서 무려 3500km를 가야 닿을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섬조차 2000km나 떨어져 있다. 주민들은 섬을 `라파누이'(Rapa Nui=커다란 땅)라고 부르지만, 유럽 탐험가가 처음으로 도착한 날이 부활절(4월5일)이라 해서 이스터섬이란 이름으로 지칭된다.

절해고도의 거대한 석상을 구경하려는 관광객들이 먼 거리를 마다 않고 줄지어 찾아오고 있지만, 사실 이 석상엔 이스터섬의 어두운 과거사가 담겨 있다. 이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서기 400~700년께로 추정된다. 고립된 곳에 있던 탓에 사람의 접근이 쉽지 않았다. 초기 주민은 기껏해야 15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온난다습한 기후가 만들어낸 풍부한 자연자원 덕분에 문화가 번성하면서 1200~1500년엔 인구가 1만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 사이 이곳 주민들은 `모아이'로 불리는 그 유명한 거석문화를 일궜다. 높이가 최대 20m나 되는 거대한 사람 모양의 거석상 1천여개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1722년 네덜란드 탐험가 야코프 로헤벤(Jacob Roggeveen) 선장이 이곳에 도착한 때의 인구는 2000~3000명 선으로 급감한 상태였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이스터섬의 모습은 괴상스럽기 짝이 없었다. 해안가에는 거대한 석상들이 죽 늘어서 있었고, 벌판은 황량했다.

"그곳에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기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나무 한 그루조차 없는 황량한 벌판에 수백 개의 거대한 석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던 것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동굴이나 오두막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를 벌이며 서로를 향한 적개심에 불타 있었다. 심지어 계속된 전쟁으로 식량이 부족하자 인육을 먹기도 하였다."( 이스터 섬에는 아무도 없었다 (살아있는 지리 교과서, 2011. 8. 29., 전국지리교사연합회, 네이버 지식백과서 인용)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세계에서 가장 외딴 곳에 있는 이스터섬(빨간 점). 오른쪽 아래는 위성에서 본 이스터섬. 구글 어스.

몰락의 도화선이 된 거석 문명

섬의 몰락 원인에 대해선 자원 고갈, 노예 약탈 등 여러 가설이 있다. 최근엔 백인들에게 묻어온 전염병과 학살이 주원인이라는 주장도 나왔지만, 전통적인 유력 가설 가운데 하나는 자원 고갈론이다. 자원 소비량이 늘어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주민 갈등과 대립이 심해지면서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인구가 늘면서 소비가 자연의 수용력을 넘어선 것이다. 특히 거석 문화가 몰락의 도화선이 된 것으로 과학자들은 추정한다. 거대한 모아이 석상을 해안가로 옮기기 위해 커다란 나무를 마구 잘라내면서 자연 생태계가 크게 망가졌다. 이 나무들은 석상을 옮기는 지렛대와 굴림대로 쓰였다. 번영을 위해 만든 문명이 도리어 번영의 기반을 뒤흔드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셈이다.

이스터섬의 인구 변화는 환경이 지탱할 수 있는 개체수에 한계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외계문명의 존재 가능성을 연구하고 있는 미 로체스터대 천체물리학부 애덤 프랭크 교수는 이스터섬의 사례에서 문명과 환경의 상호관계를 일반화할 수 있는 모델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그는 문명과 환경 사이의 작용-반작용 규칙을 알아낼 수 있다면 인류문명의 지속가능성도 예측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데 착안했다. 시야를 우주로 넓혀 보면 이는 외계 문명이 과거에 존재했거나 현재에 존재할 가능성과도 연결된다. 그는 <애틀랜틱>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100억조개 이상의 행성이 우주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걸 고려할 때, 자연이 특별히 우리와 같은 문명에 편향적이지 않는 한 우리가 첫 문명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외계 문명도 우리와 같은 역사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따라서 지구에 존재했던 대부분의 종이 현재 사라진 것처럼, 그동안 번성했던 대부분의 문명도 오래 전 종말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이스터섬의 해안을 따라 늘어서 있는 모아이 석상들. 위키미디어 코먼스

문명과 행성의 공진화 관계

프랭크 교수는 인구생물학이 천착해온 포식자와 피식자 간의 먹이사슬 관계를 원용해 문명의 진화 모델을 만들었다. 문명과 행성은 에너지를 매개로 연결돼 있다. 문명과 행성을 구성하는 변수들의 관계는 이렇다. 행성은 생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공급원이다. 생물 종은 행성의 자원을 끌어다 문명을 구축한다. 생물 개체 수가 늘면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 더 많은 자원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수확하면 더 많은 개체수를 먹여살릴 수 있다. 그러나 자원 소비는 행성의 상태에 변화를 초래한다. 따라서 문명과 행성은 상호의존적 공진화(co-evolve) 관계에 있다. 문명의 운명은 행성의 자원을 어떻게 얼마나 쓰느냐에 달려 있다.

눈을 지구로 돌려보자. 지구에는 인간 문명이 있다. 인간 문명은 화석 연료를 기반으로 한다. 문명은 인구를 늘린다. 덩달아 화석연료 소비량도 늘어난다. 그러나 공짜점심은 없다. 화석연료 소비는 지구의 반작용을 부른다. 반작용의 실체는 기후변화다. 기후변화는 식량 생산량을 줄인다. 지구가 지탱할 수 있는 인구 수가 줄어드는 것이다. 이는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압박한다.

그러나 기후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문명의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연구진은 이를 위해 지구가 두 종류의 에너지 자원을 갖고 있다고 가정했다. 하나는 기후와 환경 영향력이 큰 화석연료, 다른 하나는 영향력이 낮은 태양 에너지다. 연구진은 상황이 나빠지면 한 에너지에서 다른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몇가지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행성과 문명의 공진화 시나리오.

자연사멸-연착륙-붕괴 3가지 경로

시니리오 분석 결과 문명은 크게 3가지 경로를 밟아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자연 사멸(die-off)이었다. 이 경로에선 에너지 사용량에 비례해 인구가 급증한다. 그러나 자원 이용은 행성의 상태를 크게 변화시킨다. 예컨대 기후변화로 지구 온도가 빠르게 올라간다. 그러다 기온 상승으로 생존 조건이 악화되면서 인구는 정점을 찍는다. 인구가 행성의 수용력(carrying capacity)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후 인구는 급감하기 시작한다. 어느 지점에서 행성과 문명은 안정 상태에 이른다. 연구진은 "많은 모델에서 안정 상태에 이르기 전에 인구의 70%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값비싼 대가를 치른 끝에 지속가능한 지구 문명은 달성된다. 그러나 비용이 너무 크다. 이스터섬의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연구진은 가장 일반적이고 가능성 높은 경로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둘째 경로는 연착륙이었다. 현실적인 최선의 길이다. 인구가 늘면서 행성도 변화해 가지만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된다. 앞선 사례와 같은 대규모 자연 격감은 없다. 인구와 기온이 상승하지만 큰 재앙없이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인구 수가 지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걸 인정하고, 자원을 석유 같은 고영향 자원에서 태양 같은 저영향 자원으로 전환할 때만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뒤늦은 방향 전환은 붕괴를 막지 못해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마지막 경로 `붕괴'였다. 자연사멸 경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인구는 급증한다. 그러나 행성은 문명의 충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급속히 악화하고 문명은 소멸해간다. 고영향 에너지원에서 저영향 에너지원으로 전환하면 사정이 다시 좋아질까? 그러나 큰 변수는 되지 못했다. 저영향 에너지원으로 전환해도 시기만 약간 늦춰졌을 뿐 붕괴에는 변함이 없었다. 대응이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프랭크는 "방향을 잘 찾아 적절한 대응을 했더라도 붕괴에 직면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마지막 시나리오가 가장 놀라웠다"고 말했다. 이는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면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말해준다. 프랭크 박사는 그런 사례로 금성을 들었다. 금성은 크기 지구와 거의 비슷한 지구의 자매 행성이다. 대기층도 매우 두터워 안정적이다. 그러나 대기의 주된 성분이 온실가스로 불리는 이산화탄소다. 온실 효과로 표면온도가 섭씨 400도를 웃돌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자정 2분 전을 가리키고 있는 운명의날 시계. 미 핵과학자회 웹사이트.

최근 미 핵과학자회는 `운명의 날' 시계가 종말을 뜻하는 자정을 불과 2분 남겨둔 23시58분을 가리키고 있다고 발표했다. `자정 2분 전'은 1947년 과학자들이 `운명의 날' 시계를 처음 발표한 이후 종말에 가장 가까이 간 분침이다.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등장 이후 무려 1분이 앞당겨졌다. 1953년 미국과 소련이 수소폭탄 실험을 강행하며 일촉즉발의 위기를 조성하던 1950년대와 같은 상황이 돼버렸다. 과학자들은 시계 분침이 자정에 최근접한 이유로 핵에 대한 무모한 접근과 기후변화에 대한 무시를 꼽았다.

달 궤도를 돌던 아폴로 8호에서 찍은 지구. 나사 제공

자연을 벼린 칼로 제 목을 겨눈 꼴

물론 이런 단순한 모델로 인류 문명의 미래를 예측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우주 전체를 놓고 보면, 지구가 이스터섬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망망대해 한 가운데의 이스터섬처럼, 지구 역시 우주의 고립무원 신세다. 우주에서 지구와 같은 문명을 가진 행성은 현재로선 없다. 이는 지구 환경이 나빠져도 인류가 달리 갈 곳이 없다는 뜻이다. 행성과 문명, 즉 지구와 인류는 운명 공동체다. 우주의 시각에서 본 기후 변화는 우리 인류에게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가야 할지에 대해 새로운 눈을 갖게 해준다. 1만2천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이후, 기후가 안정을 찾으면서 인류 문명은 급속히 발전해 왔다. 그런데 문명의 뒷배인 그 기후를 문명이 뒤흔드는 상황이 됐다. 자연을 벼린 문명의 칼 끝이 제 목을 겨눈 셈이다. 거석 문명을 추구하다 몰락한 이스터섬의 사례는 지구 문명의 미래를 경고하는 묵시록은 아닐까?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곽노필의 미래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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