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국 정치에서는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민주공화체제의 유지에 필수적인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거의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사실상 금권정치가 돼버렸다. 지금은 정의와 양심의 정치가 절실한 때지만, 선거민주주의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냉정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세계는 벼랑 끝에 서 있다. 과학기술의 경이적인 발전에 따른 생산력과 소비수준은 엄청나게 높아졌으나 인간성의 전면적 붕괴를 우려해야 할 정도로 삶의 내적 상황은 황폐화하고, 세계 경제는 총체적 위기에 빠지고,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갈등은 나날이 심화되고 있다. 게다가 정치는 절망적인 무능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임박한 생태적 파국이다. 인간 생존의 자연적 토대가 전면적으로 붕괴한다면 모든 게 끝이기 때문이다. 지금 급속히 진행되는 생물종의 소멸 현상은 사실 너무나 두려운 현상이다. 굳이 선례를 찾자면, 이것은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함으로써 공룡들이 사라진 6500만년 전의 상황에 비견할 수 있다. 오늘날 인간은 자기 자신의 소멸을 자초하고 있는 소행성인지도 모른다.
이 상황을 고려하면, 최근 들어 유엔기관들이 부쩍 자주 지구환경 위기, 그중에서도 기후변화에 대한 심각한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최근 ‘정부간 기후변화 패널’(IPCC)은 다음 세대에게 ‘참을 수 없는 위험’을 안겨주지 않으려면 ‘현재의 알려진 잔존 화석연료 자원의 대부분’은 땅속에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재천명했다. 유엔기관이 이토록 다급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국지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서 세계 전체 상황을 조망할 수 있는 그들의 위치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주요 에너지회사들은 기존 유전을 남김없이 채굴하고, 새로운 유전을 끊임없이 탐사하기 위한 막대한 투자계획을 공공연히 발표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주가는 계속 오르고 있다. 임박한 파국이야 어떻든 그저 눈앞의 이익에만 골몰하는 이 상황을 묘사하여 미국의 농부작가 웬들 베리는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어리석고 파괴적인 시대가 없었다”고 갈파한 바가 있다. 그러나 만약 외계인이 보고 있다면, 이토록 자기 파괴에 몰두해 있는 인간 사회의 모습은 어리석다기보다도 너무나 희극적인 광경이 아닐까?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최근의 어떤 글에서 히말라야 고원의 접경지대, 즉 카슈미르에서 수십년째 계속되고 있는 인도, 파키스탄 간의 군사적 충돌을 언급하며 기막힌 사실을 지적한다. 즉, 영토분쟁이 격렬한 이 현장에서는 지금 기후변화 때문에 빙하가 급속히 녹아내리고 있다. 이렇게 해서 결국 빙하가 사라진다면, 인도와 파키스탄은 물론이고 히말라야 빙하를 수원(水源)으로 삼아 농사와 삶을 지탱해온 동남아시아 전역은 조만간 초토화될지도 모른다. 상황이 이런데도 인도와 파키스탄은 그 땅이 내 것이냐 네 것이냐를 두고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이 ‘희극적’ 상황은 물론 카슈미르만의 얘기가 아니다. 이것은 오늘날 국가간 군사적·정치적 대립뿐만 아니라 국익, 성장, 개발 따위에 함몰돼 있는 국가 정책과 운영방식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허망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날카로운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남으려면 지금 절실한 것은 장기적인 비전과 공생의 윤리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의 정치가 이것을 원천적으로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오늘날 지배적인 정치시스템은 어디서나 단기적·착취적 이익추구의 논리에 매달려 있다.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다음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근시안적 전략과 정책에 갇혀 있다. 이것은 현재의 선거제도, 대의제 정당정치의 틀로서는 불가피한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어떻든 장기적인 시야를 가진 정치를 가능케 하는 시스템의 구축보다 더 절박한 시대적 과제는 없다. 지금 우리들 중에는 인권, 노동, 일자리, 환경, 에너지, 복지, 건강과 생명, 육아와 교육, 협동조합 등등, 온갖 부문에서 상황을 개선하거나 개혁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헌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 모든 부문별 활동과 노력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는 정치시스템이 개선되고, 정치적 의사결정이 민주적·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모든 것은 무위에 그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지난 20여년간 ‘녹색운동’과 직접·간접으로 인연을 맺어왔지만, 아마도 유일한 성과는 국가권력에 맞설 수 있는 시민사회의 힘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통감한 것이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없이 치열하고 집요한 시민적 저항운동에도 불구하고 새만금과 천성산과 4대강이 파괴되고 만 것은 국가의 논리가 정당해서가 아니었다. 탈핵운동도 마찬가지다. 후쿠시마라는 세기적인 참극이 일어났음에도 여전히 압도적인 것은 근시안적 국익논리이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폐색상황도 그 원인은 결국 현재의 정치시스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털끝만 한 양심이라도 있다면 집권세력이 설혹 자신의 허물이 드러날 우려가 있더라도 성역 없는 조사에 기꺼이 협력해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그들이 협력을 거부할 때는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강제할 방법이 없다. 더욱이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는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민주공화체제의 유지에 필수적인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거의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이 상황에서는 나라의 중대사들이 모두 현직 대통령 개인의 자질과 능력과 성품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지금도 광화문에서는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모여 대통령의 선처와 결단을 목마르게 간구하고 있는 기괴한, 고통스러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이 터무니없는 상황을 타개하고 건강한 정치와 합리적인 국가운영이 가능한 틀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건강한 정치, 합리적인 국가운영이란 별난 게 아니다. 그것은 특정 집단의 사익이 아니라 나라 전체와 세계 전체의 공통이익을 우선시하는 공공의 정신에 입각한 정치와 국가운영을 말한다. 그러나 물론,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오늘날 공공의 정신이 정치에서 사라져버린 것은 정치가들이 그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기득권층과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뿌리 깊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통계를 보면 오늘날 미국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려면 대략 50만달러, 상원의원은 수백만달러 이상이 필요하고, 대통령이 되려면 수십억달러를 모아야 한다. 그러니까 대의제 민주주의는 사실상 금권정치가 돼버린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미국 민주주의보다 건전하게 돌아간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가?
하지만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한 금권정치를 보완·수정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금권정치를 초래하는 근본 메커니즘이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일이다. 이 문제를 천착해온 사람들은 대개 일치하여 현재와 같은 단순 다수표로써 승자를 결정하는 현행의 대통령중심제와 소선거구제도가 큰 문제라고 보고 있지만, 나는 선거제도 그 자체가 핵심 문제라는 의견에 더 공감한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와 르네상스기 자치 도시국가 사람들은 선거라는 것이 실은 특권층·기득권층의 영구적 집권을 위한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사무에 종사할 사람들을 투표가 아니라 추첨으로 선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천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유인’의 삶을 향수할 수 있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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