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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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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가 끝날 무렵 어머니께서 88년 동안 살아온 옛날 생각이 나셨던지 이제껏 내게도 해준 적이 없던 얘기를 하시는데 나는 들으면서 속으로 많이 울었다. 그것은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해방 전후와 6·25 동란 중에 겪었던 고난의 삶을 생생히 전하는 한편의 다큐멘터리였다.
지난 9월27일, 음력 9월4일은 우리 어머니의 88세 생신날이어서 우리 6남매 직계 가족과 외가댁 식구들, 그리고 어머니 친구 세분과 내 친구 8명 등 모두 40명이 함께 식사하는 조촐한 미수연을 가졌다. 88세를 미수라고 하는 것은 한자의 쌀 미(米) 자가 팔(八), 십(十), 팔(八)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잔치가 끝날 무렵 어머니께 한 말씀 하시라고 했더니 생전 나서는 일이 없으시던 어머니께서 88년 동안 살아온 옛날 생각이 나셨던지 이제껏 내게도 해준 적이 없던 얘기를 하시는데 나는 들으면서 속으로 많이 울었다. 그것은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해방 전후와 6·25 동란 중에 겪었던 고난의 삶을 생생히 전하는 한편의 다큐멘터리였다.
우리 어머니는 1927년생, 돌아가신 아버지는 1923년생이다. 경기도 포천 깊은 산골 금동리에서 살던 농사꾼의 딸인 우리 어머니는 17살 때인 1944년 2월, 서울 종로구 창성동 유씨 집으로 급하게 시집오셨다.
그때 갑자기 혼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정신대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징용에 끌려가지만 않는 자라면 불구자라도 좋다며 사방에 중매를 부탁해 두었는데 서울에 사는 먼 친척이 나선 것이었다.
그 친척은 이웃에 사는 창성동 유씨 집이 7남매 대가족인데 살림할 여자가 부족하여 21살 된 셋째 아들인 우리 아버지를 빨리 장가보내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이 총각은 비행기 관련된 공장에 다니기 때문에 징용을 안 간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머니 쪽에서는 정신대를 피하기 위해, 아버지 쪽에서는 일할 며느리를 얻기 위해 한겨울에 급히 혼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어머니는 신혼생활이 아니라 대가족 시집살이를 시작하였는데 그때 얼마나 고되었던지 친정집에 한번 가서 사나흘 잠만 자다 오는 것이 소망이라고 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친정집엔 가보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대동아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항공사 직원도 징용 대상이 되어 아버지에게 영장이 나왔다. 이에 우리 아버지는 집을 나가 도망갔다. 매일 순사가 와서 데려오라고 독촉하였단다. 당시 징용 도피자가 있으면 그 가족들이 닦달당하는 것은 말도 못하게 심했다고 한다. 가족 중 한 명이 경찰서로 끌려가 문초를 받을 때면 우리 어머니는 죄인의 처지가 되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집안 식구들이 이런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종 무소식이었단다. 그러다 서너달 뒤 대구에 있다는 편지가 와서 큰형님인 백부께서 빨리 돌아오라고 간곡한 편지를 썼지만 답장도 없었단다.
그리고 또 몇달이 지났는데 이번엔 평안북도 어디라며 편지가 왔다는 것이다. 이에 백부께서는 “이 녀석 때문에 집안 식구 다 죽겠다”며 멀쩡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망전보를 보내니 사흘 만에 집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전보를 받자마자 평안북도서 떠났는데 사흘 걸린 것이었다.
이에 경찰서로 가서 신고하고 이제 일본으로 징용 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닷새 뒤, 감격스런 8·15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우리 어머니는 신접살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낳은 첫아이인 우리 누나가 46년생이고 첫아들인 나는 49년생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처음 들은 해방 전후 우리 어머니의 삶이다.
그리고 내가 갓 돌을 지났을 때 6·25 동란이 일어났다. 우리 집은 경기도 안성 고모댁으로 피난갔다. 그때 고생한 얘기는 줄이고 53년 휴전협정이 되면서 아버지는 일자리를 알아본다며 서울로 떠나더니 몇달이 지나 돌아와서는 총무처 직원이 되었다고 좋아하시며 서울엔 전쟁 통에 죽은 사람이 많아 빈집이 있으니 일단 거기서 살면 된다면서 식솔을 이끌고 상경해서 궁정동의 빈 초가집에서 살았단다.
그리고 1955년 4월, 내가 서울 청운국민학교에 입학하기 한두해 전에 우리는 창성동 130번지 일본식 2층집으로 이사했다. 적산가옥으로 20년 상환 조건이어서 얼른 구했다고 한다. 대지 23평에 마당은 손바닥만 하고 1층은 미닫이문으로 나뉜 방 2칸, 2층은 다다미 8조에 ‘도코노마’라는 장식공간이 있는 전형적인 일본집이었다.
내가 일본 답사기를 쓰면서 스기야풍 건축의 구조를 마치 살아본 사람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진짜 그런 집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2층 방은 누나, 동생, 나 셋이서 썼다. 나는 이 집에서 대학 4학년 때까지 살았다.
대학 시절 우리 집은 친구들의 사랑방 내지 꿀방이었고 데모꾼의 아지트였다. 그때 문리대 친구들이 몰려다닐 때면 유인태 집 아니면 우리 집으로 모였다. 우리 집 2층 방에서는 열명도 자곤 했다. 그렇게 되면 누나와 동생은 건넌방으로 내려가 잤다. 인태 집으로 우르르 몰려가면 동생 인완이와 인택이는 다락으로 올라갔다.
인태 집이나 우리 집에 친구들이 많이 온 것은 무엇보다 어머니의 마음이 좋아서였다. 열명이 와서 자고 가도 싫은 기색은커녕 꼭 아침을 해서 먹여 보냈다. 어머니는 우리 친구들을 정말로 아들처럼 생각하셨다. 우리 아버지도 내 친구들을 잘 알고 계셔서 임종 며칠 전 웃으시며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죽으면 네 친구들이 죄다 문상을 올 텐데 그걸 볼 수 없는 게 서운하구나.” 그렇게 떼를 지어 몰려다니더니 우리들은 삼선개헌 반대, 삼과폐합 반대, 교련 반대 데모로 군대에 끌려갔고, 제대해 나와서는 긴급조치 4호, 9호로 감옥으로 갔다.
내가 1974년 2월 군 복무를 마치고 두달도 채 안 된 4월에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가 결국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구치소에 있을 때 우리 어머니는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목요기도회에 꼬박 참석하여 아들 석방을 기도했다. 시위가 있으면 한번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어머니는 그때 사회생활도 해본 것 같고 여학교도 다녀본 것 같다고 하셨다.
그 목요기도회가 나중엔 구속자가족협의회(구가협),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로 발전하였다. 목요기도회는 지금도 이어져 오는 10월16일 탑골공원에서 “민가협 1000회 목요집회”를 갖는다.
87년 6월항쟁 이후 내 친구 어머니들과 박형규 목사 등 ‘어르신’ 사모님 10여명은 ‘한결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달마다 만나 친목회를 했고 함께 해외여행도 다녀오셨다. 그분들이 우리 어머니 친구분들이다.
세월이 흘러 그 옛날 구속 학생이던 나는 정년퇴임 하는 나이가 되었고 내 친구 어머니들은 다 세상을 떠나고 우리 어머니만 남았다. 미수연에 오신 분은 고 리영희 선생, 고 유인호 교수, 이해동 목사의 사모님 세분뿐이었다.
미수연에 내 친구로는 우리 어머니 밥을 많이 먹은 녀석들을 불렀다. 유인태, 유영표, 이광호, 안양노, 심지연, 서상섭, 그리고 감방동무 장영달, 미학과 후배 곽병찬 등 8명이 왔다. 우리 어머니는 친구들 자리로 가서는 한명씩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하시더니 안병욱과 서중석이 안 보인다고 하셨다. 둘 다 지방에 강연회가 있어 못 온다고 했는데 그 얼굴을 기억하고 우정 이름을 불러보신 것이었다.
내 친구와 어머니 친구분들은 한결같이 지금 세상에도 이런 어머니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우리 어머니를 칭송하셨다. 이때 영표가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 “너, 일본 답사기에 오늘 어머니가 하신 얘기를 꼭 써 넣어라. 옛날 어머니들이 어떻게 사셨는지 우리 아이들도 알게 하고, 일본어판도 나온다니 일본 사람들이 읽어 보게.”
그래서 ‘우리 어머니의 이력서’를 이렇게 써서 부끄럼 빛내며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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