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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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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분산을 위한 개헌 못지않게 시급한 것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살리고, 민중권력을 강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국민발의권과 국민소환제 등을 도입하고, 비례대표제 확대를 위한 선거제도의 혁신이 긴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지 않는 한, 대다수 국민이 정치로부터 소외되는 과두지배체제는 계속될 것이다.
10월 초 삼척에서 원전 유치 문제를 둘러싸고 실시된 주민투표는 이 나라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 사건으로 기록되기에 충분하다. 이 주민투표는 삼척 지역(결국은 우리나라 전체)의 오랜 현안을 가장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자 동시에 지금 급속히 쇠퇴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회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언론매체들은 이 중요한 사건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주류 언론들은 그렇다 치고, 비주류 ‘진보’ 언론들도 이 문제의 정치적·역사적 중요성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늘날 우리들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의 대부분이 본질적으로 집권세력에 의한 민주주의의 훼손이라는 문제와 직결돼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비주류 언론들의 이러한 ‘무심함’은 심히 유감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가장 개탄스러운(혹은 우스꽝스러운) 것은 정부의 태도이다. 원자력 확대 정책을 그만둘 생각이 없는 정부가 삼척 주민투표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맘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국가적 위신을 생각한다면 공명정대한 자세를 취하는 게 순리이다. 그런데 정부는 원전 건설 문제는 ‘국가사무’이기 때문에 주민투표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워 삼척시의회가 만장일치로 결의한 주민투표를 거부했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힘으로 어렵게 실현된 주민투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완고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원전 확대 정책을 계속 밀고 가려는 정부 시책이 과연 옳은 것인지 먼저 따져야 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따져봐야 할 것은 주민투표를 대하는 정부 혹은 집권세력의 기본자세이다. 지역의회가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지역 주민들이 온갖 비용을 자담하여 이뤄낸 주민투표를 매우 형식적인 법절차를 내세워 불법시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강변하는 것은 과연 이 정부가 헌법을 존중하는 정부인지 근본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대한민국은 어디까지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천명하고 있는 헌법에 기초한 나라이다. 그렇다면 국가 혹은 지역의 중대사에 관한 최종적인 의사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는지 자명한 것 아닌가?
원전 건설 문제는 ‘국가사무’라고 정부는 말한다. 그런데 그런 ‘국가사무’가 지역민들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게 분명할진대 어째서 지역민들의 의견은 무시해도 좋다는 것인가? 이번 일에 관련해서 또 하나 꼭 짚어야 할 것은, 선거관리위원회의 직무유기적 자세이다. 선거관리위원회란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존재하는 국가기관이다. 그런데 삼척선관위는 자신의 권한 사항인데도, 시의회가 결의한 주민투표 실시가 합법적인 것인지를 중앙정부의 판단에 맡기는 매우 무책임하고 졸렬한 행태를 보여주었다. 그럼으로써 선관위라는 것도 결국 집권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매우 보잘것없는 어용 기관임을 스스로 고백한 꼴이 되고 말았다.
삼척 주민투표에 대한 정부와 국가기관의 반응을 보면, 대한민국이 과연 민주공화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인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서글픈 생각을 억제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처럼 국가권력 자신은 헌법과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면서 무슨 염치로 법치국가 운운하면서 국민들더러 법을 지키라고 하는가?
아마도 그것은 자신들이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합법적 권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란 한시적으로 국가운영의 책임을 국민들의 대표자(들)에게 맡겨놓은 정치시스템이다. 그러므로 선출된 대표들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거친 이상 자신들의 권력 행사는 ‘민주적 정당성’에 입각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과연 오늘날 선거라는 것이 정말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라고 할 수 있는가? 불행하게도, 우리는 지금 선거라는 것이 사실상 기득권 세력의 영구집권을 가능케 하는 한낱 형식적인 메커니즘일 뿐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대체로 선거란 관련 정보를 충분히 숙지한 유권자의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한 투표로 이뤄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정치는 한마디로 ‘극장정치’이다. 즉, 유권자들의 판단은 대부분 미디어를 통해 자주 접한 얼굴들과 그들의 이미지에 의해 좌우되기 쉽다. 따라서 이미지 조작에 능한 자들, 즉 기성의 권력기구와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은 -명백한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도- 선거판을 얼마든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리 농담이라 해도 지나친 농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기는 선거의 근본적인 한계, 혹은 선거의 ‘공허함’은 이미 여러 선각자들에 의해 빈번히 지적돼 왔다. 예를 들어,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은 일찍이 “선거로 진정한 사회변화가 가능하다면, 선거는 벌써 불법화되었을 것이다”라고 통렬히 야유했지만, 이것은 실은 오늘날 세계의 지성들에 의해 널리 공유되고 있는 생각이다.
문제는 결국 선거라는 게 이처럼 ‘민주적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서는 심히 박약하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보면, 삼척 주민투표는 일반적인 선거에 비교할 때 매우 견실한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한 투표였다. 왜냐하면 원전 건설 문제는 수십년간 지역민들 사이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왔고, 따라서 주민들은 문제를 충분히 숙지한 상태에서 투표에 임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통상적인 선거판과는 달리 이것은 보다 성숙하고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실천 형태, 즉 ‘숙의(熟議)민주주의’의 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단순히 투표율과 투표 결과를 가지고 보더라도 삼척 주민투표는 민주적 정당성이라는 측면에서 통상의 선거 결과를 압도하고 있다. 즉, 이번 삼척 주민투표율은 70%에 육박했고, 투표 결과 확인된 원전 유치 반대표는 거의 85%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를 들어 투표율 60%, 지지율 50% 정도로 당선된 대통령이 누릴 수 있는 수준보다 월등한 민주적 권위를 인정받아 마땅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삼척시민들은 불리한 여건에서도 주민투표를 결행함으로써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천명했다. 갈수록 인권과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유린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만들어낸 빛나는 업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업적은 궁극적으로 나라와 사회를 견실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이것을 무시하고 짓밟는다면, 국가권력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국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이른바 정계와 언론에서는 개헌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여론도 개헌을 지지하는 쪽이 우세한 듯하다. 아마도 우리들 대부분이 민주적 리더가 아니라 파쇼적 지배자로 군림하기 쉬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절감한 탓일 것이다. 그러나 권력분산을 위한 개헌 못지않게 시급한 것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살리고, 민중권력을 강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령 국민발의권과 국민소환제 등을 도입하고, 비례대표제 확대를 위한 선거제도의 혁신이 긴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지 않는 한, 권력구조 개편에 관계없이 대다수 국민이 정치로부터 소외되는 과두지배체제는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것은 새롭고도 해묵은 숙제, 즉 자유시민으로 살 것인가, 노예로 살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개헌이야말로 시민사회가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삼척시민들이 보여준 시민적 능동성을 우리는 본받을 필요가 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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