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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2.31 18:39 수정 : 2016.01.04 15:42

뒤돌아보면 우리 민족에게도 “축제”와 같은 순간은 있었다.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순간, 군사정권이 타도된 민주화 실현의 순간…. 새해 첫날을 맞아 나는 이런 순간의 환희와 그 순간을 위해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을 다시금 기억하고자 한다.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 2015년이 지나가고 있다. 가는 해의 뒷모습은 예년보다 더 암울해 보인다.

11월13일 파리에서 ‘동시다발 테러’가 일어났다. 130명의 시민들이 죽고 300여명이 다쳤다고 한다. 파리 사건에 비해 그다지 주목받진 못했으나, 10월28일에 터키 앙카라에서 폭탄테러로 108명이 숨졌다. 11월12일에는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테러로 40명이 사망했다. 황폐해진 시리아 땅에서는 연일 사람들 머리 위로 폭탄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 파리의 희생자들을 애도하면서, 동시에 잘 보이지도 않고 제대로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수한 죽음을 나는 마음 깊이 애도한다.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유엔 주최 ‘인종주의, 인종차별, 배외주의, 그리고 그와 관련된 불관용에 반대하는 국제회의’는 구미 제국이 자행해온 노예무역, 노예제도, 식민지배에 ‘인도에 반하는 죄’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 공개적으로 논의한 장소였다. 아파르트헤이트(흑백분리) 체제에서 해방을 쟁취한 남아공에서 열린 이 회의 개최 자체가 인종차별과 식민주의를 넘어 전진해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회의는 ‘법적 책임’을 부정하는 선진 제국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쳐 난항을 겪었고, 미국과 이스라엘 대표가 퇴장해버려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났다. 이 회의가 열리고 사흘 뒤 저 ‘9·11’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마치 더반회의를 보고 식민지배의 책임과 보상 문제를 평화적인 대화를 통해 해결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막힌 데에 절망한 자들이 저지른, 구미 제국에 대한 응답과도 같은 것으로 비친 사건이었다.”(‘화해라는 이름의 폭력’, 졸저 <언어의 감옥에서>수록)

더반회의와 ‘9·11’ 이후 약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계는 미국·영국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을 시작으로 ‘테러와의 전쟁’ 시대에 돌입했지만 출구는 아직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출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악마화해서 무제한의 대항폭력을 휘두를 것이 아니라, 항상 사태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사고하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일찍이 에드워드 사이드가 ‘9·11’ 직후 ‘테러와의 전쟁’으로 달려가는 대다수 미국인들 속에서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호소했던 것처럼 나도 호소하고 싶다.

사태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사고하려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식민지배’다. 세계는 아직도 구미와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한 ‘부(負)의 유산’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해주는 미술전이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다.(‘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 3월27일까지)

나는 2000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처음 윌리엄 켄트리지 작품을 만났다. 기묘할 정도로 향수 어린 세계. 게다가 가슴을 죄어오는 애수를 머금고 있었다.

켄트리지는 195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났다. ‘백인’이다. ‘켄트리지’라는 성은 그의 증조부가 1908년에 리투아니아에서 이민 갈 때 원래 성인 칸트로비치를 그렇게 바꾼 데서 유래한다. 북으로 발트3국에서 남으로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유혈지역’으로 불리는 이 지역은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전쟁터가 됐고, 나치즘과 스탈리니즘의 협공을 받아 20세기 중반까지 민간인만 약 1400만명이나 살해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티머시 스나이더의 <블러드랜즈>, Bloodlands: Europe Between Hitler and Stalin)

현재 남아공에는 유대인이 10만명 남짓 살고 있다고 한다. 그들 대부분은 19세기 말부터 1930년까지 리투아니아에서 이주해 간 유대인 자손이다. 1930년 무렵 아프리카너(네덜란드계 백인)들 사이에서는 반유대주의가 급속하게 퍼졌다. 홀로코스트와 스탈리니즘의 위협을 피해 유럽 대륙 오지에서 아프리카 대륙 남단까지 흘러간 그들은 그곳에서 한때나마 안전과 (행운을 잡은 사람일 경우) 경제적 성공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 땅은 동시에 나치류의 인종주의가 국가정책으로 시행되는 곳이었다.

켄트리지 일가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맞서 싸운 진보파였던 듯하다.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후기에 샤프빌 학살사건과 스티븐 비코의 죽음에 대한 조사, 그리고 넬슨 만델라 재판 등 주요 재판과 조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망명중인 펠릭스’.
켄트리지의 <망명중인 펠릭스>(Felix in Exile·1994)는 특히 애절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관능적이면서도 위엄을 갖춘 아프리카인 여성 ‘난디’가 등장한다. 망명지의 고독한 방에서 펠릭스는 고향 생각에 잠긴다. 거울을 보면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게 아니라 난디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 배후에 비치는 고향 풍경은 황량하고 주검들이 흩어져 있다. 고향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펠릭스는 그저 망명지의 작은 방에서 거울 너머로나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이윽고 어딘가에서 날아온 총탄을 맞고 난디가 쓰러진다. 슬픔의 푸른 물이 넘실대며 풍경을 채우고 있고, 펠릭스는 내내 물속에 서 있다. 난디는 ‘고향’ ‘아프리카’ ‘여성’에 대한 은유다. 휘몰아치는 폭력 속에서 위엄을 잃지 않고 서 있는 여신이다.

2005년 가을, 나는 독일 베를린에서 켄트리지의 중요한 개인전 <블랙박스>(Black Box Chambre Noire)를 봤다. 이 작품에서는 백인의 총에 맞아 거대한 코뿔소가 쓰러지는 영상이 되풀이해서 비친다. 바로 식민주의의 우화다. 이 작품 속에 숨겨져 있는 기억은 1904년 독일의 남서아프리카 헤레로족 대학살이다. 이 작품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무대미술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었다. <마술피리>가 계몽주의의 유토피아적 시기를 시사하는 것이라면, <블랙박스>는 그 종말을 표현하고 있다. 계몽주의의 원래 뜻은 ‘빛을 쬔다’는 것이다. 후진적인 어둠의 세계에 사는 자들에게 지식과 이성의 빛을 쬐게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 빛과 어둠을 둘러싼 플라톤적인 사상 자체에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양의성과 폭력성이 내포돼 있는 게 아닐까. 켄트리지는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식민자의 자손인 켄트리지의 작품이 구미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과 관련해, 그것이 일부 유럽인들의 (죄책감을 무마해주는) 심리적 ‘알리바이’ 구실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그런 의문에는 켄트리지 자신의 이런 얘기가 답이 될 것이다. “백인 죄책감이여, 돌아오라. 백인 죄책감은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한데, 그 가장 뚜렷한 특징은 이젠 그마저 좀처럼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 아주 가끔 한 방울씩 복용하는 작은 병에 든 약이고, 효력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는다.”

이번에 한국에서 켄트리지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린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남서아프리카에서 헤레로족 학살이 자행됐을 때 이 땅에서는 항일의병 토벌이라고 이름 붙은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그 과정을 거쳐 이 땅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병탄당했다. 병탄기간 중에 이 땅의 사람들은 참혹한 식민지배와 민족차별을 당했다. 이 땅은 지금도 분단돼 있고, 사람들은 불안과 우울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이곳은 그런 땅이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12월1일 전시 개막식 행사에서, 250명쯤 되는 비교적 젊은 청중을 앞에 두고 나는 켄트리지와 공개대담을 했다. “계몽의 프로젝트는 좌절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그는 곧바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며 분명히 말했다. “자유, 인권, 평등, 민주주의, 이들 계몽의 프로젝트는 미완의 상태고 아직도 진행중이다”라고. 그로서도 아파르트헤이트 타도의 순간은 “축제와 같았다”고 했다. 뒤돌아보면 우리 민족에게도 “축제”와 같은 순간은 있었다.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순간, 군사정권이 타도된 민주화 실현의 순간…. 새해 첫날을 맞아 나는 이런 순간의 환희와 그 순간을 위해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을 다시금 기억하고자 한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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