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시인’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함민복 시인은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린 시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쉰 넘어 늦깎이 결혼을 해 강화도에 살고 있는 그는 새벽에 시를 쓰고, 낮에는 아내와 함께 인삼 장사를 한다. 그는 “이(利)가 아니라 의(義)가 기준이 돼서 평형을 되잡지 않으면 이 전복에서 헤어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강화/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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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시인 함민복
우리에겐 말랑말랑한 힘이 필요하다
“김포평야에 아파트들이 잘 자라고 있다.”(함민복 시 ‘김포평야’ 중에서)
고층아파트 단지가 빼곡하게 들어선 경기도 김포를 지나면서 그의 시 한 구절을 실감했다. 십수년 전 내가 살 때만 해도 퇴비 냄새와 개구리 소리 가득한 들판이었는데, 이젠 왕복 8차선 도로를 따라 매머드급 아파트 단지들이 무더기로 들어서 있다. 땅과 하늘이 만나는 수평의 접선은 사라지고, 땅과 아파트, 하늘과 아파트가 만나는 직각의 긴장이 곤두선 곳. 시인은 “수평”의 땅에 들어서는 “수직”의 문명을 경계했다.
“결국/ 도시에서의 삶이란 벼랑을 쌓아올리는 일/ 24평 벼랑의 집에 살기 위해/ 42층 벼랑의 직장으로 출근하고/ 좀더 튼튼한 벼랑에 취직하기 위해/ 새벽부터 도서관에 가고 가다가/ 속도의 벼랑인 길 위에서 굴러떨어져 죽기도 하며…”(함민복 시 ‘옥탑방’ 중에서)자본주의는 벼랑 끝에서 돌아 내려오는 길을 안내해 주지 않는다. 거기엔 길이 없다고, 무한경쟁궤도를 벗어나 살 수는 없다고 우리를 세뇌한다. 그곳에 길이 있고 그곳에서 아름답게 사는 방법이 있음을 증거하는 사람, 시인 함민복은 가장 부드러운 방식으로 자본주의에 대항한다. 그의 대표 시집 제목처럼 <말랑말랑한 힘>은 딱딱한 반인간적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대항 수단이다. 말랑말랑한 것들이 딱딱하고 뾰족한 것들보다 강할 수 있다는 것을 나도 확인하고 싶었다. 잔혹한 4월과 5월을 겪어낸 우리의 성찰과 반성은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강화대교를 지나면 바로 보인다는 ‘만남의 광장’은 대로변에서 한 블록 뒤에 있어서 하마터면 진입로를 놓치고 지나칠 뻔했다. 단체관광객을 염두에 두고 지은 것 같은 넓은 식당은 대낮인데도 실내가 어둑했다. 막걸리 한잔 하러 찾아온 동네 노인 한분이 러닝셔츠 차림의 식당 사장과 말벗하며 목을 축이고 있었다. 때 이른 초여름 더위, 시간이 정지한 채 고여 있는 듯한 공간이었다. 잠시 후 그가 왔다. 바로 옆 인삼센터에 낸 가게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출근길 운전 멈추게 한 시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딱딱한 물질문명에 대항하는
말랑말랑한 연대의 절박함
잊었을 때 세월호 참사가 나
관념의 거품과 지적 허영을
배격하는 시는 쉬워보이지만
그래서 더 넓고 깊은 울림
삶을 닮은 시, 시를 닮은 삶
군더더기와 허세가 없다
-장사를 하신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직접 하시는 거 맞나? “난 잘 못 팔고…. 집사람이 하는 거 보조만 한다.” -장사는 잘되나? “뭐, 요즘 경기 다 안 좋으니까…. 게다가 인삼 장사한테 여름은 비수기다.” -여름에 삼계탕 먹는다고 인삼들 많이 안 사 가시나? “삼계탕에 들어가는 건 제일 작은 삼인데 그런 건 돈이 안 되고. 홍삼 같은 게 팔려야 하는데….” -장사는 언제 시작하셨나? “햇수로 4년째다.” 쉰살이 되도록 노총각이던 함민복은 2011년 동갑내기 아내를 맞아 결혼했다. 인삼 장사는 결혼 무렵부터 아내와 함께 시작한 일이다. 부인은 함민복이 강사로 나가던 시창작교실의 수강생이었다. 함민복이 하는 시 수업을 들으러 일부러 여의도에서 김포까지 온 열성 팬이었다. 강화대교 대로변에서 부부가 인삼 장사 -부인의 첫인상이 특별했나? “모르겠다. 특별한 생각은 없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고향 사람이고. 공부는 잘했는데 돈 없어 실업계 나온 것도 나랑 비슷하고, 직장 다니면서 다시 공부한 것도 나랑 비슷했다. 살아온 길이 비슷해서 서로 빨리 통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함민복은 충북 중원군 노은면에서 3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한 살림에 중학도 못 갈 처지였는데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돈을 모아줘서 겨우 입학했다. 고등학교는 수업료가 무료고 기숙사 시설이 있는 수도전기공고에 들어갔다. 한방에 스물다섯명씩 생활을 하고, 복도를 이동할 때도 줄을 서서 직각으로 걸어 다니며, 외출외박은 한달에 한번만 허용이 되는, 규율이 엄격한 학교였다. 식사시간이 되면 1500명이 일렬로 줄을 서서 배식을 기다렸는데 그 시간 동안 소년은 줄 선 채로 삼중당문고 책을 읽었다. 숨막히게 꽉 짜인 군대식 생활에서 유일한 안식은 문학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월성의 원자력발전소에 취직해서 4년을 일했다. 또박또박 월급 나오는 준공무원 신분을 버린다는 게 쉽지 않은 결단이었지만 “거기 머물면 계속 그대로 멈출 것 같아서”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 작정했다. 그리고 선택한 길이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였다. 1987년 26살 늦깎이로 대학에 입학했다. -발전소 취직이 가난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였는데 자청해서 다시 가난이 예약된 길로 돌아간 것 아닌가. 원전에 계속 다녔으면 인생이 굉장히 달라졌을 텐데. “그랬을 거다. 그때 친구들은 지금 연봉 1억이 넘는데….(웃음) 그땐 젊으니까 어차피 한번 사는 거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겠다. 좀 이기적인 선택을 했던 것 같다.” 가족들도 그 간절함을 타박하지 않았다. 열두살 위의 형님은 결혼해서 아이 키우는 처지면서도 시인이 되겠다는 동생을 위해 전세보증금을 빼서 학비를 보태줬다.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셋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세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 보이던 이삿짐…”(‘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중에서) -대학 생활은 어땠나? “그때가 87년도니까…. 나도 처음엔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자, 최선을 다하자 하는 생각이었다. 공부가 하고 싶어 온 거니까. 근데 주위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이 책만 보고 도서관에 앉아 있게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었나? “상계동에서 50만원짜리 전셋방에 살았었는데 그 주위 집들이 철거되는 걸 봤다. 학교에 오면 바로 옆에 안기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여학생들이 쭉 앉아 있다가 ‘안기부를 해체하라’ 하고는 바로 잡혀갔다. 안기부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우리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게 내겐 굉장한 충격이었다.” 가난한 이들 삶의 터전이 불도저에 밀리고, 권력에 반하는 목소리가 포박당하는 곳. 그런 세상에서 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시의 힘은 무얼까, 고민하던 청년 함민복에게 시인 오규원 선생의 가르침은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혔다. “무겁다고 깊이가 있는 건 아니다. 가볍고 쉬운 글 속에 깊이를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이후 함민복 시를 관통하는 기본바탕이 되었다. 대학 2학년이던 1988년 함민복은 <세계의 문학>에 ‘성선설’로 등단한다. 한 문장, 3행짜리 짧은 시였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외로운 개체의 공감 욕구가 시를 만들어 관념의 거품과 지적 허영을 배격하는 그의 시는 평이하고 쉬워 보이지만 그래서 더 넓고 깊은 울림을 담고 있다. 함민복의 시는 늘 자신이 살아내는 딱 그만큼까지다. 삶을 닮은 시, 시를 닮은 삶에는 군더더기와 허세가 없다. 1996년 시인은 우연히 놀러 온 마니산이 좋아서 강화도에 자리를 잡았다. 동막해변, 보증금 없는 월세 10만원짜리 양철지붕 폐가를 세내어 살면서 물고기 잡는 이웃과 개펄과 섬, 달과 하늘을 노래하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가난한 시인” “자본에 저항하는 빈자”의 표상이라 불렀다. -몇 년 전 것이긴 하지만 시인의 평균 연봉이 300만원이란 조사가 있었고 그 이후 다른 조사에서도 평균이 485만원에 불과했다. 시인은 다 가난한데 왜 유독 당신에 대해서만 ‘가난한 시인’이란 타이틀이 붙을까? “모르겠다. 그런 게 필요해서 만들어낸 것 같다. 집중적으로 한 사람을 가지고 대표성을 부여해서.” 자본주의에서는 가난마저도 마케팅의 도구가 되는 걸까. 그러나 함민복은 가난도, 가난을 외경하는 이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듯하다. 가난을 자랑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듯, 부부가 인삼을 팔며 생업을 이어가는 일을 자랑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 없이 자신의 삶을 이어갈 뿐, 자신의 삶을 애써 규정하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다섯권의 시집을 내고 김수영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문학적 성과도 인정받았다. 그런데 3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1996)와 4집 <말랑말랑한 힘>(2005) 사이, 또 4집과 5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2013) 사이 공백이 길었다. 그 기간 동안 산문집을 여러 권 냈는데, 시로 못다 하는 산문의 매력이 있어서인가, 아님 다른 이유인가? “대개 경제적 이유다. 산문 한편을 쓰면 시집 400~500권 팔린 정도의 인세가 들어오니까.” -산문집 한권이 시집 400~500권? “아니, 산문집 한 ‘꼭지’(편)가 시집 400~500권 인세에 맞먹는다는 얘기다. 시집은 한권에 600원씩 받으니까.” -시집 한권을 팔면 600원을 받는다고? “천권 팔리면 60만원이다. 요새는 시집 가격이 조금 올라서 8천원 하니까 80만원.” -그래서 산문을 쓰면 일단 수입이 되니까…. “산문을 쓰면 시가 안 써진다는 걸 시인은 누구나 안다. 산문은 작은 꼭지를 써도 시집 두세편에 쓸 얘기가 들어가니까. 그러고 나면 시를 못 쓰게 된다.” -그런데 산문으론 만족을 못한다는 것 아닌가? 시만이 가진 매력이 뭔가? “산문은 모든 걸 다 보여주면서 설명하는 것 같다. 비유하자면 산문은 꽃밭을 다 보여주는 것 같다. 설명하고 자기 밑천을 몽땅 드러내고. 거기 비해서 시는, 꽃씨를 던져주고 더 이야기하지 않는다. 보는 사람이 꽃씨를 어떻게 가꿀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 시를 쓰는 게 행복한가? “난 주로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는데 새벽 풍경도 보고, 별도 달도 보고, 새벽기도 나가는 사람들 발자국도 보고, 그럴 때가 제일 행복하다. 내가 가치를 두는 일을 행하고 있다고 느낄 때.” -글을 쓸 때 느껴지는 가치가 뭔가? “공감? 자기가 본 세계를 이야기하고 공감을 가지려는 욕구 아닐까. 어떤 한 개체, 외로운 개체가 취하는 삶의 행태 같다. 내 시선, 내 마음에 있는 생각들을 사람들하고 나눠보고 싶다는 욕구.” -돈이나 명예에 대한 집착은 정말 없는 건가? “예전에 방송국에서 책을 소개하는 프로가 있었는데 나한테 제의가 들어온 적 있었다. 책이 하나 소개되면 십만 부 이상 나간다는 프로였는데, ‘그거 하면 나한테 뭐가 좋죠?’ 물은 적 있다.” -왜 안 했나? “나는 그래도 만 부를 넘기는데, 그런 시인이 몇 명이나 되나. 지금도 많이 팔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려면 다른 사람 거를 해야지.” -자본주의에 적응을 못 하는 건가, 안 하는 건가? “둘 다인 것 같다.” -뭐가 싫은 건가? “자본은 끝없이 사람들을 경쟁하게 만든다.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고, 그게 올라갈수록 성장이라고 하는데 경쟁을 통한 성장이야말로 마음경제를 더 황폐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마음경제란 게 무슨 뜻인가? “마음경제는 마음이 부유해지는 거다. 어떤 인간적인 관계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마음.” 세상과 단절된 ‘나’의 존재란 성립하지 않는다. 함민복의 시 ‘양팔저울’은 상대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자기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인간의 삶을 그린다.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성선설’ 전문)
나는 나를 보태기도 하고 덜기도 하면서-양팔저울 같은 관계가 바람직한 인간관계라고 보시나? “그렇다. 사람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은데 다르다고 생각할 때 서로 분류하고 명령하려 든다. 같은 점이 있다는 걸 확인할 때 이해하고 포용하는 마음이 생긴다.” 대한민국의 마지막 에어포켓은 무엇일까 -‘뻘에 말뚝 박는 법’이란 시에서 개펄의 말랑말랑한 힘이 어떻게 수직의 말뚝을 품어 안는지 그려내셨다. “힘으로 내리박는 것이 아니라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으로 빨아들일 때까지”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고. 그런 말랑말랑한 힘들이 세상의 질서를 새로 짤 수 있을까? “글쎄….” -나의 이삼십대는 날카롭고 뾰족한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 스스로 날카롭고 뾰족해지려고 애쓴 시기다. 그게 아닌 것 같다 느낄 무렵 당신의 시를 보게 되었고 깊이 공감했다. 그런데 여전히 의심스럽다. 날카롭고 뾰족한 것들은 늘 빠르니까. 그것에 대한 경계와 분노가 우리를 다시 날카롭게 한다. 세상을 넉넉하게 품고 다독이는 말랑말랑한 힘을 어디서 찾을까? “말랑말랑한 힘이란 말을 생각한 건, 인간의 본성, 원초적인 것에 주목해보자는 뜻이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딱딱한 것 일색으로 편향되었는데 인간의 처음 출발이었던 말랑말랑한 힘으로 돌아가자. 딱딱한 것들은 이미 한계에 와 있다. 아니, 한계를 넘어섰다.” 그의 말대로, 이미 한계를 넘어선 딱딱한 물질문명에 대항하는 유일한 길은 말랑말랑한 생명의 연대뿐이다. 우리가 그 절박함을 잊고 있었을 때 세월호 참사가 났다.
당신을 읽어나갑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나를 읽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
당신 쪽으로 기울었다가 내 쪽으로 기울기도 합니다. 상대를 향한 집중, 끝에, 평형,
실제 던 짐은 없으나 서로 짐 덜어 가벼워지는 (후략) (‘양팔저울’ 중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깜깜한 물을 밀어냈을-출근길 차 안에서 라디오로 당신이 이 시를 낭송하는 걸 듣고 운전을 멈춰야 했다. 그날 인터뷰에서 진행자가 사람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시도 써달라고 하니까 꼭 쓰겠다고 하셨다. 쓰셨나? “우리가 탄 배가 침몰하고 있다면 이 배의 에어포켓은 무엇인가, 한동안 생각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양심과 연대, 정의, 사랑. 그 네 가지였다. 자본주의 이윤이나 이득에만 기준을 잡고 잘살기만 하면 돼. 이러면서 도덕이 타락했다. 이(利)가 아니라 의(義)가 기준이 돼서 평형을 되잡지 않으면 이 전복에서 헤어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속임으로 빼놓았던 우리 사회의 평형수를 다시 채우자고 시인은 말한다. 네가 나를 비추는 “양팔저울”이 되어 “수평”의 연대로 “말랑말랑한 힘”을 모으자고, 거꾸러진 침몰선의 에어포켓이 다 사라지기 전까지 우리에겐 아직 마지막 기회가 남았다고.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가녀린 손가락들
나는 괜찮다고 바깥세상을 안심시켜 주던
가족들 목소리가 여운으로 남은
핸드폰을 다급히 품고
물속에서 마지막으로 불러보았을
공기방울 글씨
엄마
아빠
사랑해! 아, 이 공기,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함민복 시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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