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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닷컴 운영자 권산씨가 지난 9일 전남 구례군 광의면 난동리 산자락에 걸려 있는 빨랫줄 아래에서 활짝 웃고 있다. 구례/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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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지리산닷컴 ‘마을이장’ 권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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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닷컴 운영자 권산씨가 지난 9일 전남 구례군 광의면 난동리 산자락에 걸려 있는 빨랫줄 아래에서 활짝 웃고 있다. 구례/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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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났든 우리 대부분은 실향민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게도 고향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이다. 흙바닥에 떨어진 연탄가루 때문에 놀고 나면 손톱이 새까매지던 동네 공터, 어스름 녘까지 ‘다방구’하는 우릴 비추던 전봇대의 희뿌연 가로등, 동그란 굴뚝마다 돌돌돌 소리 내며 돌던 가스배출기, 나무격자의 미닫이 유리문 너머로 담배를 팔던 구멍가게…. 어릴 적 내가 살던 곳엔 고층아파트가 들어섰고, 뒷산은 깎이고 공터는 메워져서 아스팔트로 덮였다. 그 어디에도 내가 살던 때를 기억해줄 만한 나무 한 그루 남아 있지 않다. 사진도 한 장 없다. 동네 공터 같은 데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정겹고 애틋한 기억을 실물로 보여줄 물증 하나 갖고 있지 못한 실향민들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잃어버린 고향의 유사품을 찾으려 한다. 흙 마당과 댓돌이 있고 긴 빨랫줄이 걸린 시골집을 보게 되면 수십 년 전 과거로 돌아간 양 추억에 잠긴다. 눈앞에 보이는 건 실물이지만 우리는 그 실물을 탈색한 뒤 자기 소유의 기억으로 윤색한다. 그래서 시골풍경은 늘 그리움과 연민의 대상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로망을 압도하는 리얼리티는 거북하다. 오래전 고향을 닮은 현실공간에서 현재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모든 시골은 평화로워야 마땅하고, 모든 시골사람은 순박한 게 당연하며, 내가 언제 어디서 찾아가든 날 포근히 반겨줄 것이라는 착각. 우리는 스스로 가상의 세계를 그려놓고 우리가 품은 과거의 시간으로 현재를 박제한다.
권산의 사진에세이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다. 눈으로 보면서도 내가 보지 못한 것이 이렇게 많았던가. 농사체험을 하고, 템플스테이를 하고, 둘레길을 따라 걸으며 생명과 자연과 구도(求道)와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외지인들이, 현지인들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히말라야 등정에 성공했다고 숨 가쁘게 인증샷을 찍어대는 원정대원들 뒤에서 묵묵히 등짐을 지고 수십 번씩 같은 길을 오르내리는 셰르파들처럼, 그들도 우릴 지켜봤겠지. 난 그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니, 얼마나 알고 싶은 걸까?
“1960년대부터 농촌은 도시의 풍족함을 위한 종잣돈이었다. 자식들이 나가 살고 있는 도시를 위해 쓰러질 듯 열심히 살았던 시골마을들은 다시 성장과 발전의 성찰 무대로 기능해야 한다. ‘그들이’ 농촌을 떠나갈 때도, ‘그들이’ 시골을 찾아올 때도 ‘원래 살던 것들’은 결정의 실질적 주체가 아니었다.”(권산, <여행, 집으로 가다> 287쪽)
권산(55)은 2006년 전남 구례로 이주한 뒤 ‘지리산닷컴’(jirisan.com) 사이트에 ‘마을이장’이란 아이디로 글과 사진을 올려왔다. 지난 3월엔 구례이야기를 담은 두 권의 포토에세이, <꽃은 눈을 헤치고 달려온다>와 <여행, 집으로 가다>를 출간했다. 아이디는 이장이지만 그는 이장이 아니다. 농촌에 살지만 농사는 짓지 않는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지만 그는 자신이 작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생업은 웹디자인, 인쇄물디자인이라는 것이다. 농민도 작가도 아니면서, 늙은 농사꾼들의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전하는 사람, 그가 보고 듣고 피부로 접한 농촌마을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지난 9일, 전남 구례군 난동마을에서 권산을 만났다.
“시골은 자본주의 아닌 줄 아세요?”
“마당은 공구리(콘크리트)가 젤 좋아요.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나 잔디 깔지, 여기서 2~3년 살아보면 잔디 가꾸는 게 보통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돼요.”
마당을 둘러보는 내게 그가 바닥을 쿵쿵 치며 말했다. 구례로 이사 온 뒤 세 차례 집을 옮겼는데, 주로 먹고 잠자는 곳은 상사마을이지만 몇 달 전 작업실 삼아 이곳에 세를 얻어 들어왔다고 했다. 구례산 우리밀로 빵을 굽는 부인 이언화씨의 작업실은, 안채의 부엌과 마루를 터서 만들었다. 5년 계약으로 세를 얻어 들어온 집을 몇 달 동안 자비를 들여 직접 다듬고 개조한 것이라 했다. 하늘색과 노란색 화선지를 겹쳐 바른 문창살 안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부드러웠다.
“커피 드실래요?”
그가 직접 볶은 커피를 갈기 시작했다. 고소하고 향긋한 커피향이 진동했다.
―와, 베이커리 카페 같아요.
“여기서 커피를 볶는 이유는 간단해요. 그게 로스팅된 원두보다 싸니까.(웃음) 그림만 보고 환상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런 사진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에도 안 올려요.”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귀촌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시겠어요.
“몇 년 전에 머리 빡빡 깎은 젊은 남자 하나가 절 찾아온 적 있어요. 딱 보니 어제 깎은 거야. 진단이 나오죠.”
―비장한 마음으로 인생을 확 바꿀 결심을 하고….
“무슨 일 하냐니까 서울에서 은행 다닌대요. 어제 머리 밀고 3개월 휴가 내서 귀촌지를 찾아다닌다고. 그래서 ‘결혼했냐?’ 물으니 ‘했다’고. ‘부인은 동의하냐?’니깐 아니래요. 그래서 냅다 소릴 질렀죠. ‘이혼을 하든지 서울로 올라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쇼!’ 하고요. 그러곤 조곤조곤 말했어요. 마누라가 동의하면 군소리 말고 순천지점에 전근 신청 내고 거기 아파트 얻어서 살라고요. 여긴 차 몰고 주말에 놀러 오면 된다고.”
―도시에서 탈출하고 싶었겠죠.
“아니 뭐 도시는 자본주의고 시골은 아닌지 알아요? 풍경 좋다고 공과금 내주나요? 꽃 많이 본다고 꽃 본 횟수만큼 공과금 깎아줘요? 시골 내려온 사람들이 근사한 그림만 올리고 언론매체에서도 그런 프로그램을 많이 하니까 어쩔 수 없는 로망이나 이미지만 가지고 생각하는 거예요. 촌에서 사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서울생활 접고 전남 구례 귀촌
시골생활 막연한 환상은 금물
“풍경 좋다고 공과금 내주나?”
도시에서 귀촌한 예술가들보다
마을노인한테 예술적 감흥 얻어
아직 여행자와 주민 사이 경계인
재수 뒤 고교 입학, 미술학도 길
웹디자인 생업 중 2006년 구례행
지역미디어 구축하러 사이트 운영
자신의 구례 이야기·사진으로 출발
지리산 자락의 진짜 예술가들
―누가 지리산에 내려와 산다고 하면 떠오르는 단상들이 있어요. 국선도나 태극권을 하고.
“공중부양도 하고?(웃음) 개량한복에 머리 묶고 다니고.”
―네. 뭐, 비슷한.(웃음) 안빈낙도하면서 자연 속에서 시를 쓰거나 음악, 미술을 하는 분들이 지리산 자락에 많은 건 사실 아니에요?
“사람들이 지리산닷컴 때문에 자꾸 오해하시는데, 전 ‘지리산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구례 사는 사람’이에요. 제가 미대를 나오긴 했지만 예술가니 뭐니 하는 표현은 옛날부터 싫어했어요. 저기 보이는 (맞은편 가리키며) 동네에 군 예산으로 택지조성사업을 해서 서울에서 미대 교수 하는 분들이랑 20가구 정도를 들였는데, 문화적으로 마을이랑 완전히 외떨어진 섬이죠. 해거름 녘에 경운기 탈탈탈 올라오는데 그쪽에선 라흐마니노프가 흘러나오고…. 그 양반들이 주민들 아는 척을 안 하나 봐요. 농부들이 안 좋아해요.”
―선생님은 귀촌한 분들과 안 어울리세요?
“재미없어요. 그보다 마을 노인들하고 얘기하는 게 훨씬 재밌어요. 예전에 (지리산닷컴) 사이트에 글 쓸 거리가 떨어지면 슬리퍼 찍찍 끌고 마을 앞으로 나가곤 했어요. 마을 엄니가 해질 무렵 호미 하나 들고 지나가면 따라가서 말을 붙여요. ‘엄니, 비 올까요?’ 그럼 바로 문학이 나와요. ‘참나무가 쌔빠닥을 내밀고 있으니 비 오겠네’ 하고.”
―참나무가 쌔빠닥을 내밀어요?
“나뭇잎이 처진단 얘기예요.”
―아!
“그럼 비 온대요. ‘참나무가 뒤집어지는 거 보니까 흥하게 (많이) 오겠네’ 그러죠. 아, 죽인다! 이런 문학이 있나. 이런 일상의 멘트들이 지천이죠. 외지에서 온 사람들 얘기는 맨날 똑같아요. 서울에서 잘나가던 시절 이야기, ‘나, 누구 알아’ 이런 얘기….”
권산은 도시에서 온 화가지만, 도시에서 온 예술가보다 촌에서 살아온 노인네들에게서 더욱 큰 예술적 감흥을 느낀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과 섞여드는 것은 다르다. 2006년에 구례에 들어왔으니 햇수로 13년째인데, 그는 여전히 자신이 여행자와 주민의 경계에 서 있다고 느낀다.
―10년 넘게 살아도 주민으로 동화되기 어려운가요?
“여기 사람들은 저 같은 외지인을 보면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원래 살던 사람과 밖에서 들어온 사람의 차이가 쉽사리 좁혀지지 않죠. 처음엔 강하게 부인했는데, 요즘엔 그분들 생각이 맞는 것도 같아요. 마을 인구의 70%가 65살 이상 노령인구인데 제가 어떻게 그분들께 같은 마을, 같은 리그에 속한 사람이란 확신을 주겠어요? 저도 죽으면 사람들이 저를 구례 장례식장에서 장사 지내고 광평묘지에 묻어주길 바라지만요.”
미대 수석입학에 학점 0.0
권산이 본래 나고 자란 곳은 부산이다. 지방신문 기자였던 아버지와 적당히 ‘치맛바람 펄럭이던’ 어머니 밑에서 2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공부는 단 한 번도 잘한 적이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책 읽기를 즐겼다.
―좀 의외인데요.(웃음) 곱게 자란 도련님이었네요.
“제가 고등학교 들어갈 땐 고입 연합고사를 봤죠. 전교에서 한 명 정도 떨어지는 시험인데 제가 그 ‘희귀한’ 고입 재수를 했어요. 다른 애들 교복 입고 등교할 때 난 사복 입고 느지막이 출근했어요. 재수학원으로.(웃음)”
―부모님이 걱정 많이 하셨겠어요.
“집안 전체의 망신이죠. 그래도 저는 용케 그 다음해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그런 경우도 진짜 희귀한 거예요. 고입 재수하면 대부분 고등학교 못 가거든요. 온갖 사고 다 치는 애들이 몇 백 명 모여 있는 건데.”
―갱생하셨군요.(웃음)
“정말 갱생!(웃음) 재수생 60~70명 가운데 인문계 가는 경우가 1~2명이었으니 굉장히 희박한 확률이었죠. 근데 그렇게 한 해 꿇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니까 2학년들이 절 가만 안 두죠. 학교생활에 재미를 못 붙였어요. 그때 문학청년이 된 것 같아요.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자’는 결심으로 소설이고 시고 출간되는 족족 닥치는 대로 읽었거든요.”
미술은 고등학교 2학년 말이 돼서야 뒤늦게 배우기 시작했는데 부산에 있는 미대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 역시 희귀한 일이었다. 더 희귀한 일은 그렇게 입학해놓고 학점은 0.0을 받는 ‘진기록을 수립’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학점이 0.0이 돼요? 올 에프(F)란 말이에요?
“네. 학교를 아예 안 갔으니까요.(웃음) 아침이면 바로 광안리 지하작업실로 가서 미친 듯이 작업을 했어요. 그래서 1학년 때부터 학교 바깥에서 화랑전시를 하고….”
―전시회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집에서 대주셨나요?
“아뇨. 제가 미술학원 강사를 해서 벌었죠. 제가 그때 부산지역에서 아주 잘나가는 데생 강사였어요. 입시 미술이 ‘암기과목’인 거 아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애들한테 석고상을 암기하고 카피하게 해요. 석고상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림을 외우게 하는 거죠.(웃음) 어쨌든 그래서 돈은 아쉽지 않았어요. 어려운 후배들 등록금을 두세 번 내줄 만큼.”
―돈도 있고 일찍부터 전시회도 열었는데, 왜 작품 활동을 계속하지 않으셨죠?
“설치미술, 행위미술의 세계에 빠져서 혼자서 예술가 다 된 듯이 생쇼를 했어요. 두드려 부수고 콘크리트 때려 붓고…. 그런데 새로울 게 없는 거예요. 오늘밤에 내가 ‘명작’을 탄생시켰어. 다음날 아침에 와보면 피카소 거야. 오늘밤 뭘 만들었어. 담날 아침 보면 요제프 보이스(독일 태생 전위예술가) 거야. 무슨 짓을 해도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더라고요. 뭔가 새로운 조형 아이디어를 만들겠다는 게 개인적 목표였는데, 한계를 느꼈죠. 그러다가 서점에 가서 루카치의 미학 서적을 보게 되었어요.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어요.”
―어떤 점 때문에요?
“내가 아등바등한대도 결국은 시장 논리 안의 상품개발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각이 들었어요. 미술이나 예술에 대한 신비감이 제로가 되었죠. 그건 똥이야. 그런 건 없어. 그러곤 인간의 진보에 도움이 되는 ‘도구’가 되겠다 생각했어요. 문화예술은 도구다. 난 그걸 잘 휘둘러야겠다.”
그 뒤론 개인적인 작품활동을 접었다. 시국집회에 쓰일 걸개그림을 그리거나 노동자미술교실 강사를 하면서 1980~90년대 민중미술운동에 참여했다. 웹디자인을 배운 것도 애니메이션이나 사이버저널 같은 쪽으로 도구를 확장시키려고 한 미술운동의 일환이었다. 90년대 중후반 이후 민중문화운동이 사그라들면서 웹디자인이 그의 생업이 되었을 때에도 그가 하는 일의 70%는 시민단체 사이트를 만들거나 영상물을 만드는, 돈 안 되는 일들이었다. 2000년대 초, 반복되고 소모적인 노동에 지쳐 있을 때 구례 출신 지인에게서 제안이 왔다. 구례에 내려와 지역미디어를 만들어보지 않겠냐고. 2006년 5월 서울 연신내에서 구례군 읍내 우유 대리점 2층으로 이사를 왔다.
도농직거래 사업, 마을에 돈 돌아
주민간 위화감·지원금 사유화 문제
“단일품목 농사는 시장 관점 얘기
땅과 사람 지속가능성 고려 안해”
“왜 농약 하냐” 물으면 진짜 화나
동네 주민들의 ‘몸뻬 패션쇼’ 기획
시골의 소멸해가는 풍경들 기록
노인들 구술기록 ‘노력 프로젝트’
구례 생활 13년차 반(反)성장론자
불가항력 변화 속도 지연시키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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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산씨가 지난 9일 전남 구례군 광의면 난동리 자신의 작업실 앞 마을 밀밭에서 산책을 하고 있다. 구례/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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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농촌근대화의 신화?
―지리산닷컴은 한마디로 뭐죠? 첨 듣는 사람들은 지리산 특산물 파는 쇼핑몰인 줄 알 거예요.
“그걸 제안한 김서곤 형이 처음 구상한 건 ‘사이버코뮌’ 같은 거였어요. 지리산포털사이트로, 언론, 커뮤니티, 쇼핑몰, 지리산의 역사문화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집어넣는, 언론적 지향점을 가지고 커뮤니티운동을 하는…. 지금 같은 결과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죠.(웃음)”
지리산 인근 5개 군에 필진을 두루 확보하고 교류한다는 거창한 구상은 출발부터 난항이었다. 할 수 있는 데서 시작해 보자고 2007년 구례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권산 기고, 권산 사진, 권산 기획의 1인 필진 시스템이 되어버렸다. 그는 지금도 틈틈이 사이트에 글을 올리고, 주로 도시에 사는 지리산닷컴 회원들에게 ‘지리산편지’란 이름으로 뉴스레터를 발송한다.
2009년엔 마을신문 <지리산 장수마을>까지 만들고, 2012~2013년엔 ‘맨땅에 펀드’라는 이름으로 사전에 약정한 펀드투자자들에게 제철농산물과 임산물을 보내주는 도농직거래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가 벌이는 일마다 언론의 주목을 받고, 마을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끌어오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는 마을신문과 펀드를 돌연 중단했다.
―마을을 홍보하고 도농직거래를 주선하는 건 주민들을 위해서 좋은 일 아닌가요?
“제가 살던 마을만 해도 행복마을예산, 녹색농촌예산, 무슨 예산 해서 총 20억원 가까이 지원금이 들어왔어요. 실가구수가 45가구 정도 되는 마을에 20억원이 투자되면 사람들은 그만큼 행복해질까요? 돈이 들어오는 건 좋지만 새로운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가구 중에 반은 새로 집을 짓고 반은 구옥 그대로고. 일단 시각적으로 차이가 나고 위화감이 생겨요. 서로 품앗이를 하거나 놉을 낼 때 ‘당신들이 지원받았으니 당신이 더 내’ 하는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2년 정도 지나니까 초복, 중복, 말복, 어버이날에 마을에서 같이 밥 해 먹는 게 점점 사라져요.”
―돈이 들어오면서 사람들 관계에 금이 갔단 얘기군요.
“그렇게 예산 투자된 마을엔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같은 게 설립되기도 해요. 농협이나 관공서 근무했던 눈 밝은 50~60대들이 그런 예산을 끌어가죠.”
―그게 문젠가요?
“사유화하려고 하니 문제가 생겨요. 마을식장, 반찬사업, 농산물판매사업…. 뭐 실적은 안 나죠. 지원이 되니까 인건비 받을 생각에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실사 나와서 허술하게 관리한 게 드러나고 예비 사회적 기업 단계에서 인가가 취소돼요. 이미 사고 친 사람은 사퇴하고, 도장만 빌려준 동네 영감들이 등기이사로 들어가 있어서 줄줄이 그들 앞으로 행정서류가 날아오는 거예요. 몇 달간 월급을 받아본 사람들은 그게 끊기니까 원망을 하게 되고요.”
―냉정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요. 어차피 지금 시골 지키는 노인들은 얼마 안 있으면 다 돌아가실 것이고, 그러면 영세농의 땅을 일괄구매해서 기업화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요. 농업이 살 길은 그것뿐이라고.
“하아!(한숨) 저도 답은 모르겠어요. 몇 년 전에 지역농민운동 하겠다고 여기 들어온 친구도 그런 얘길 했어요. ‘형님! 구례는 딱 세 가지 작물만 특화해서 승부를 봐야 해요.’ 기업이 농토를 인수해서 월급쟁이 농부들을 고용해 농사를 지을 때도 그런 전략을 쓰겠죠. 근데 저는 생태적으로 그게 참 위험한 발상인 것 같아요. 구례의 경우 밀, 쌀, 감만 한다고 칩시다. 단일품목일 경우 한 번의 병충해가 들어오면 그 지역은 전체적으로 폭삭 망해요. 실제로 인도에서 면화만 생산하는 지역에 그런 일이 있었죠. 순환과 지속가능성의 측면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이 얘기되잖아요. 기업화된 단일품목 농사라는 건, 효율과 시장적 관점에서 나오는 얘기지 토양이나 땅이나 사람의 지속가능성은 고려하지 않는 거예요.”
―농촌에 애정이 있는 사람들도 기업적인 패러다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있겠군요.
“도시에서 노동운동할 때 삼성을 욕했어. 근데 시골에 와서 보니 여긴 뭔가 싶을 거예요. 답답한 게 많이 보이죠. 심훈의 상록수를 하고 싶어… 유기농 단지, 무농약 단지도 만들고, 사회적 기업도 만들고. 근데 원래 여기 살던 노인들은요? 도시 사람들이 ‘왜 농약을 해요?’ 하면 진짜로 화가 나요. 왜 농약을 치겠어? 그 풀 누가 뽑을래?”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은 농촌근대화와 소득증대를 위해 초가집을 헐고 마을길을 넓혔다. 기업은 스마트농법으로 농업을 현대화할 것을 주장하고, 건강한 농법과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협동조합과 마을기업을 육성하려 한다. 그 모든 것이 해답일 수 있으나, 그 모든 것이 닿지 못할 것 같은 지점, 그곳에 마을의 오랜 주인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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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산(오른쪽)씨가 지난 9일 전남 구례군 광의면 난동리 작업실 앞 처마 밑에서 이진순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구례/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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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되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경의
2013년 6월의 어느 토요일, 권산이 살던 오미동 마을에 큼직한 펼침막이 걸렸다. ‘엄마는 프라다를 입지 않는다.’ 구례에서 생산하는 우리밀을 도시 회원들과 나누고 즐기는 ‘햇밀2013’ 축제 현장이었다. 마을축제의 일환으로 이날 특히 관심을 끈 행사는 ‘쁘레따 뽀르떼 구례’, 동네 ‘엄니들’의 몸뻬 패션쇼였다. 권산은 몸뻬 패션쇼를 기획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썼다.
“한동안 의문이었다. 왜, 원색, 꽃가라, 땡땡이, 반짝이가 시골에서 가장 흔한 패션 코드일까. 어느 날부턴가 내 눈에 원색과 꽃가라와 땡땡이와 반짝이가 떼로 모여 있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원색과 꽃가라와 땡땡이와 반짝이는 그녀들에게는 자신을 위한 예의이자 존중이었다. 그녀들의 삶이 런웨이이고 몸뻬는 문신이 된 패션이다. 쁘레따 뽀르떼 구례.”(권산, <여행 집으로 가다> 217~218쪽)
빨간 비닐카펫 위로 동네 어르신 18명이 꽃무늬, 호피무늬, 물방울무늬 몸뻬를 입고 등장했다. 퇴행성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지정댁은 전기차를 타고, 양춘댁은 지팡이를 짚고 워킹했다. 대평댁은 ‘도도하고 시크한 콘셉트’를 설정했고, 최광두 어르신은 “남자 패션의 완성은 목수건”이라며 목에 수건 착용을 허용해 달라 주장했다. 그들의 워킹은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고, 절뚝이거나 긴장감으로 굳어 있었지만 그 어떤 모델들보다 아름답고 장엄했다.
―‘여기서 죽을 때까지 외지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패션쇼 할머니들을 담은 사진이나 글을 보면 한분 한분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 느껴져요.
“그런 진심은 있어요. 내가 대면하고 있는 노인, 마을, 분교, 풍경들을 보는 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니까. 읍내에 곧 문을 닫을 것 같은 식당, 찌그러진 막걸리 사발, 술꾼들에게 시래기국을 내는 구멍가게 아줌마. 내가 이걸 기록하거나 남기지 않으면 그냥 소멸되는 게 아닌가. 이게 조선왕조실록에 실릴 것도 아니고. 지금 ‘노력’(老力)이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예요.”
―노력?
“노인의 힘. 구술자서전 작업이에요. 오미동에서 여순사건 때 9명의 청년이 끌려가서 한날한시에 죽었어요. 동네 어른들 표현으로는 ‘마을의 기둥 같던 청년들’이 그때 다 죽은 거죠. 제가 구술기록 하는 노인 중에는 가해자 집안도 있고 피해자 집안도 있어요. 평생 입 다물어온 일인데, 그분들이 가시기 전에 담아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서 대대손손 농사지을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마을 일에 연연하세요?
“흠…. (잠시 생각) 왜 그럴까. 내가 사는 곳이니까요. 어느 날 내가 시골 영감들에 대해 꼰대라고 투덜거리는 걸 듣고 어떤 친구가 그랬어요. ‘형님, 그분들이 있으니까 형님이 왔잖아요. 그 꼰대 영감들이 갑질하고 농약 치면서 여기 살고 있었으니까요’ 하더라고요. 맞는 말이잖아요. 그분들이 있어서 마을이 있었고 그게 나의 토대가 된 거예요.”
―그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뭘까요?
“전 여기 살면서 반(反)성장론자가 되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도 읍내에 10층짜리 건물이 올라갔어요. 잡초가 번성하듯이 인간은 번식하고 점령해 나가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불가항력의 번식력에 간혹 저항하거나 딴지 걸면서 그 속도를 조금 지연시키려고 하는 정도 아닐까요.”
농촌근대화를 통해서 농촌을 잘살게 한다고 했다. 새마을운동으로 소득이 오른 만큼 농촌은 행복해진 걸까. 앞으로 더 스마트하고 더 의욕적인 외지인들이 시골마을을 바꿔놓을 테지만 그 터를 지키고 살아온 이들의 흔적은 어디에 남을까. 낙후하고 정체되고 미적지근한 것들은 척결의 대상이 아니다. 그 터를 지켜온 모든 ‘촌스러운’ 삶에 진심 어린 경의를!
녹취 이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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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산을 만든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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