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톤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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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몰아보기
<어톤먼트>(2007, 조 라이트 감독)<스크린> 20일(일) 오후 5시 세상에 완벽한 각색이라는 게 있긴 할까. 매체의 특성상 원안을 고스란히 다른 매체로 옮겨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양평동 이씨는 원작이 있는 영화를 볼 때마다 원작 생각에 작품 몰입에 실패하곤 한다. <호빗>을 보면서 그 짧은 원작을 왜 이렇게 길게 늘렸을까를 생각했고, <레미제라블>은 마리위스가 영화·뮤지컬 판에선 참 후하게 그려졌구나 싶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떤 번안이나 각색도 자의식의 개입 없이 존재할 수 없으니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심지어 남의 이야기를 전할 때조차 발화 당사자의 본의를 완벽하게 전달하는 게 불가능한 존재 아닌가. 비죽 튀어나온 입으로 극장을 나서는 길에, 이씨는 이언 매큐언의 원작 <속죄>를 영화화한 <어톤먼트>를 떠올렸다. 극중 소설가인 브라이오니는 자신의 오해로 인해 서로를 잃은 연인들 로비와 세실리아에 대한 실명 소설을 쓰는 것으로 평생에 걸친 속죄를 시도한다. 원작이 소설 속 소설의 존재를 통해 ‘글로 세계를 창조하는 절대자로서의 소설가’의 윤리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었다면, <어톤먼트>는 자신이 보고 들은 타인의 행동을 자기 식으로 번안해서 전달하는 과정의 윤리에 대해 말한다. 영화가 개봉했을 때 원작과는 무관하게 화제가 되었던 장면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밀려 퇴각하는 영국군들로 즐비한 됭케르크 해변의 지옥도를 찍은 5분간의 롱테이크가 그것이다. 원작이 소설가 브라이오니의 속죄에 방점이 찍힌 작품인 데 비해, 영화 후반부의 무게가 로비의 고난에 몰려 있다는 점을 못내 찜찜하게 여겼던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조차 사실 브라이오니의 속죄의 일부인 게 아닐까. 이 이야기는 누구의 시점으로 진행되든 사실 소설가 브라이오니의 관점으로 재구성한 역사니까. 이 장면을 ‘쓰면서’ 브라이오니는 자신이 로비를 어떤 지옥으로 밀어 넣었는지 고백하기 위해, 5분이란 시간을 할애해 됭케르크의 묵시록적 살풍경을 외면 없이 응시중인 것이다. 영상매체이기에 가능한 어떤 윤리인 셈이다.
이승한 티브이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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