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19집 앨범 쇼케이스에서 ‘헬로’를 부르는 조용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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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19집 발표되자 찬사가 쏟아진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평가는
‘나이든 거장의 새 도전’에만 매몰
사실 그는 늘 새로움을 시도했어
적어도 조용필이라면
더 냉철한 평가 받아야하지 않을까
타고난 팔자가 그런 건가. 여덟살 때 “말투만 들으면 영락없는 노인”이란 평을 들은 이래로, 20년 넘게 나이에 비해 노숙하다는 이야기를 달고 사는 중이다. 이유도 각양각색이다. 넌 말투가 노인네 말투야.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이 애창곡이라니 애늙은이 같기는. 자꾸 캐주얼 정장을 입고 다니니까 나이가 더 들어 보이잖아. 근육통으로 비가 올 걸 맞히다니 역시 너다워. 넌 그냥 생긴 게 나이보다 삭아 보여. 상황이 이러다 보니 가끔 술집에서 신분증 검사라도 당하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이런 비굴함이라니.
다른 모든 것들은 그러려니 해도, 사람들이 내 소박한 조용필 애호마저 노숙함의 근거로 들먹일 때면 억울함을 참기 어려웠다. 노래방에서 ‘모나리자’라도 선곡해 부를라치면 “역시 이승한이야. 선곡하는 곡들 연대부터 다르잖아”라는 놀림 섞인 감탄이 돌아오는데, 이게 아주 사람 미치게 만드는 거다. 어떻게 조용필 애호가 노숙함의 근거가 될 수 있느냐 말이다. “비틀스 ‘렛 잇 비’ 부르면 그게 고릿적 취향이냐? 세월에 퇴색하지 않는 고전이라는 게 있는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태가 급변한 건 지난 16일부터였다. 조용필의 10년 만의 신곡 ‘바운스’가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자,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 앞다투어 찬사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정규 19집 <헬로>가 발매된 23일엔 어찌나 다들 조용필 이야기뿐이던지, 난 지각변동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당신들 언제는 조용필 좋아하는 게 내 노숙함의 증거라면서. 나의 억울함 따위엔 무관심한 이들의 갑작스런 열광엔 남녀노소가 없어서, ‘고독한 러너’(1992년)가 발표될 무렵 태어난 후배도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찬탄을 아끼지 않는다. “그 연세에 이렇게나 새로운 도전을 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그 연세’에 ‘새로운 도전’. 사실 온·오프라인을 수놓은 수많은 호평은 대체로 내 후배의 그것과 맥을 같이했다. 한국 나이로 예순넷, 올해가 데뷔 45주년인 이 거장이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 세간의 환호가 몰린 것이다. 조용필은 메인 프로듀서 자리를 박용찬, 박병준 두 젊은 프로듀서에게 양보했고, 직접 작곡한 ‘어느 날 귀로에서’ 한 곡을 제외하곤 국내외 젊은 작곡가들로부터 받은 곡들로만 앨범을 채웠다. 한국이 워낙 세대간 문화 단절이 심하다 보니, 조용필의 이런 시도가 귀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다.
그런데 참 공교롭기도 하지. <헬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평자들 또한 비슷한 이유를 든다. “젊은 청자들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색깔을 너무 많이 버린 것 아니냐”는 불만이 그것이다. 심지어는 유보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근거도 맥락이 비슷하다. “곡 자체는 평이하나, 이 노래를 부른 이가 이미 오래전에 확고한 자기 세계를 구축한, 예순이 넘은 ‘국민가수’ 조용필이라는 점이 흥미롭다”는 것인데, 여기까지 보고 있자니 입맛이 썼다. 불현듯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이 먹은’ ‘거장의’ ‘새로운 도전’이라는 점에 매몰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다들 왜 이러지? 조용필이 새로운 장르를 들고나오는 걸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너무 오랜만에 나온 신보라서 사람들이 잠시 잊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조용필은 언제나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 아티스트였다. 가깝게는 오케스트라의 적극적인 활용으로 록 오페라를 구현하려 했던 18집 <오버 더 레인보우>(2003년)가 있었고, 앨범 전체를 ‘꿈’이라는 하나의 테마 아래 작업했던 13집 <더 드림스>(1991년), 한 곡의 길이가 19분 54초에 이르는 대작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이 실려 있던 11집(발매 당시 10집 파트2, 1989년), 국악·동요·프로그레시브록 등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한 장에 펼쳐 보인 4집(1982년)까지, 조용필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조용필이 다른 작곡가들의 곡으로 앨범을 채운 것도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이를테면 실험적이었던 7집에 쉽사리 공감하지 못했던 중·장년 팬들을 겨냥했던 8집(1985년)은 어떤가? 자신의 곡은 한 곡도 없이 김희갑-양인자 부부, 정풍송, 장욱조 등 당대 최고의 인기 작곡가 7명의 곡으로만 가득 채운 8집은, 결과적으로 역사에 길이 남는 앨범이 되었다. ‘허공’, ‘그 겨울의 찻집’ 그리고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모두 이 한 장의 앨범에 실려 있었다. 한술 더 떠 전곡의 작사·작곡을 김희갑-양인자 부부에게 맡긴 11집은 어떤가. 조용필은 위대한 싱어송라이터이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에 맞는 작곡가들과의 협업을 마다하진 않았다. 새로워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젊은 작곡가들과 함께 작업한 2013년의 19집 <헬로>도 결국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게 아닐까? 7집의 과감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중·장년 팬들을 위해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8집을 준비했던 1985년처럼.
“선배, 그래도 조용필이 늘 ‘바운스’처럼 말랑말랑하고 통통 튀는 음악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요?” 내 열변을 한참 듣던 후배가 어렵사리 꺼낸 말에, 나는 다시 흥분하고 말았다. “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넌 그럼 ‘단발머리’(1집 수록곡. 1980년)는 뭐라고 생각하는데?” 비록 작법에서 새로운 트렌드를 많이 반영하긴 했지만, <헬로>에 수록된 곡들이 조용필에게 그리 낯선 장르들은 아니다. ‘바운스’ 옆에 슬그머니 ‘단발머리’를 세워 본다거나, ‘서툰 바람’과 나란히 ‘고추잠자리’(3집 수록곡. 1981년)를 배치해 보자. 혹은 ‘걷고 싶다’와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12집 <세일링 사운드> 수록곡. 1990년)는 어떤가? 얼마간의 시차는 느껴지겠지만, 각 쌍 사이에 장르적 친연성을 선명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조용필이 ‘허공’이나 ‘돌아와요 부산항에’처럼 트로트 장르에 특화된 사람이라고 잘못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기본적으로 미8군 무대에 밴드 기타리스트로 오르면서 경력을 시작한 사람 아니냐. 원래 음악적 기반이 밴드 음악이고, 로큰롤을 하던 사람이란 거지. <헬로>가 분명 새로운 시도인 건 맞지만, 전혀 해본 적 없는 장르를 족보 없이 건드린 게 아니야. 늘 해오던 걸 여전히 멋지게 한 거에 가깝지.”
“그러니까 선배, 말하고 싶은 요지가 뭐예요? 이번 앨범이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건가요?”
후배의 퉁명스러운 마지막 질문에 답을 할 때가 되었다. 공개적인 지면이라 조심스럽지만, 난 <헬로>에 대한 평가나 열광이 과열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10년의 기다림 끝에 나온 신보라서 팬의 한 사람으로서 더없이 반갑고, 그 결과물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발랄한 모양새인 것도 즐겁다. 이제 노래방에서 조용필의 노래를 부른다는 이유로 생년월일을 의심받지 않아도 될 테니, 그 또한 감사하고 기꺼운 일이다.
그런 반가움을 걷어내고 냉정하게 보면, 단지 젊은 트렌드와 조우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번 앨범에 새삼스런 극찬을 보내는 건 좀 남우세스럽지 않나? 평생을 자기 혁신을 해 온 사람에게? 전작 <오버 더 레인보우>가 그 시도의 파격성과 완성도에도 비교적 조용히 넘어갔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것은 오히려 매 앨범 꾸준히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며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해온 조용필의 일생의 노력에 대한 결례가 아닌가. 적어도 조용필의 앨범이라면, 이것보단 더 냉철한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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