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감독의 이름은 남았다. 2003년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영화 <지구를 지켜
라!>의 장준환 감독이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를 들고 돌아왔다. 팬들은 그의 귀환 소식에 마음이 설렌다. <씨네21>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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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지구를 지켜라’로 천재감독 칭호
너무 기발해 흥행 안된다는 꼬리표
‘인어프로젝트’ ‘파트맨’ 투자 무산
‘화이’…특유의 유머·상상력 없지만
힘있고 매끈한 연출력은 여전해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화이)의 오프닝 크레디트, ‘장준환 감독 작품’이라는 일곱 글자를 보자 나도 모르게 뜨거운 게 울컥하고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랐다. 내가 이 사람의 작품을 극장 스크린에서 다시 보기 위해 기다린 지난 10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지구를 지켜라!>(2003) 이후 두번째 장편영화 개봉까지 딱 10년.
작품이 뜸한 사람의 팬이라는 건 고단한 일이다. 어쩌다가 그에 대한 이야기라도 나오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 사람 요즘 뭐 하냐?” 같은 질문들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얼마나 피곤하고 모양 빠지는 일인지. “그런 게 아니다. ‘인어 프로젝트’라는 걸 준비하다가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 것 같아서 접었다. 필생의 역작인 <파트맨>이란 히어로 영화도 준비했는데 투자자들이 장준환의 위험한 상상력 앞에서 주춤주춤해서 제작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2008년엔 <타짜>의 속편 <타짜-리벤저>를 준비했는데 제작사 상황이 안 좋아서 엎어졌고, 개봉을 못해서 그렇지 2010년엔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카멜리아>(2010)의 세번째 에피소드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다 보면 어쩐지 서러워졌던 것이다. 나는 왜 내 일도 아닌 일에 이렇게 핏대를 올려가며 내 일처럼 해명해야 하는가. 모든 건 <지구를 지켜라!> 때문이었다. 운좋게 전국 7만 관객 중 한 명에 들 수 있었던 나는, 그 작품이 그렇게까지 흥행에 참패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고, 영화가 극장에 걸렸다가 내려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방팔방에 ‘천재 감독이 등장했다’고 떠들고 다녔으니까. 그때 뿌려둔 말의 빚이 10년을 간 셈이다.
미처 <지구를 지켜라!>를 못 본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줄거리 요약을 해보자. 자신이 겪은 모든 불행이 외계인의 탓이라고 믿는 주인공 병구(신하균)는, 일주일 후 개기월식이 일어날 때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병구는 자신의 악덕 고용주인 유제화학 사장 강만식(백윤식)이 안드로메다에서 지구 침략을 위해 내려보낸 척후병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납치, 강 사장이 진실을 말할 때까지 고문한다. 이 범우주적 규모의 황당한 설정에 처음에는 킥킥거리며 웃었지만, 이내 무서워졌고, 슬퍼졌다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선 뭐라 할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먹먹해졌다. 코미디와 스릴러, 에스에프(SF)와 사회고발 드라마가 탄탄히 뒤섞인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이질적인 요소들을 드라마의 힘 하나로 밀어붙이는 감독이 등장했단 사실이 경이로웠다.
주변에 추천할 수 있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개봉 1주일 만에,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설 수 있는 상식적인 거리 안에 있는 모든 극장에서 <지구를 지켜라!>는 자취를 감췄다. 모두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 영화를 단순한 코미디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포스터와 마케팅이 문제였을까? 꼭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류에 대한 연민과 세상에 대한 환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다가, 끝내 ‘다 같이 끝장을 보자’는 식의 공멸에 대한 갈망이 스멀스멀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지구를 지켜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폭력의 수위는 잔혹했고, 후반부의 신파는 숨쉴 틈 없이 휘몰아쳤으며, 안전하고 무난한 결말을 거부한 반전은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흥행은 실패했으되 영화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해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춘사영화제, 대종상, 청룡영화제, 대한민국 영화대상 신인감독상은 모두 장준환의 몫이었고, 영화는 로테르담, 브뤼셀, 모스크바, 부천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흥행에선 운이 없었지만 이렇게 고른 지지를 받았으니, 다음 작품을 찍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때는 2003년, 한국 영화계가 활력의 정점을 찍던 시절이었다. 첫 작품에서 썩 좋지 않은 성과를 거둔 감독이라 하더라도 운이 좋으면 두번째 작품을 연출할 기회를 얻곤 했다.
우연히 그가 구상 중이라는 다음 작품 이야기를 듣고, 기대는 걱정으로 바뀌었다. 물속에 살던 인어들이 뭍으로 올라와 인간 세상에서 착취당하는 광경을 담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인어 프로젝트’는 듣기만 해도 매혹적이었다. 동시에 ‘너무 매니악하다’는 얘기를 들었던 <지구를 지켜라!>에서부터 훨씬 멀리 나간 ‘인어 프로젝트’가 제대로 투자를 받을 수 있을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과연 투자와 관련된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감독 본인부터 ‘저예산으로 찍기엔 스케일이 너무 크다’며 접고야 말았다는 후문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다음에 들고나온 장편 프로젝트는 조금 더 멀리 나갔다. 지독한 방귀 냄새 때문에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한 주인공이, 그 천형을 극복하기 위해 산에서 수련을 하고 내려와 슈퍼 히어로가 된다는 내용의 <파트맨>은 여러 가지 지점에서 <지구를 지켜라!>를 닮아 있었다. 불행한 유년기, 콤플렉스를 동력으로 세상을 지키고자 하는 뒤틀린 주인공, 갑갑한 현실을 판타지의 힘으로 초극하려는 시도, 우스꽝스러움과 비애감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시놉시스의 정서와 무시무시한 상상력까지. 문제는 너무 기발한 나머지 전작처럼 흥행에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투자자들의 발목을 붙잡았다는 것이다.
그 무렵 장준환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산업이 커지면서, 산업은 잘 모르지만, 살아남기 위해 검증된 것만 하는 것 같다. 겁을 많이 내서 그런 것 같다. 크게 성공한 거 보면 무모한 것들이 더 사랑받고 그렇게 된 거 아닌가.”(2006년 10월9일, <씨네21> 인터뷰 중) ‘살아남기 위해 검증된 것만 하는 것 같다’는 말 속에서, 평단의 호평을 받은 데뷔작을 찍고도 투자자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감독의 쓸쓸함을 읽었다고 하면 너무 멀리 간 걸까.
영화는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이다. 감독 혼자 그 많은 제작비용에 대한 위험부담을 감당할 수 없기에 산업의 형태로 그 위험을 분산시켜야 한다. 그러니 안전한 길을 택하려는 투자자들을 마냥 욕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산업의 측면만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한쪽에선 장준환을 ‘천재 감독’으로 떠받들면서 다른 한쪽에선 번번이 투자가 무산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2010년, 영화 <큐브>의 빈첸조 나탈리 감독과 나눈 대담에서 장준환은 <파트맨>의 실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제작자나 투자자들이 보기에는 위험하다고 생각하더라. <지구를 지켜라!>는 잘 만들었다고 인정하지만, 동시에 그것보다 더 장르적이고 안전한 영화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한다. 그러니 어렵다.”(2010년 7월8일, <씨네21>)
그렇게 돌아 돌아온 10년, 장준환은 최근 한국 영화의 경향인 ‘슈트 입고 액션 하는 남자주인공’ 영화에도, ‘김윤석이 괴물 같은 악당으로 나오는 하드보일드’ 영화에도 맞는 작품 <화이>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본인이 직접 쓴 시나리오가 아니라 특유의 유머나 상상력을 찾아보긴 어렵다는 건 불만이지만, 위험한 정서와 화면 가득한 폭력, 파국을 향해 돌진하는 에너지를 드라마의 힘 하나로 봉합해 내는 매끈한 연출력은 여전하다. 무엇보다 이번엔 다음 작품까지 10년을 기다릴 일은 없을 것 같아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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