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 데프콘은 넘치는 예능감을 발산하며 시청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지난여름 힙합계를 지배했던 디스(비방)전에도 평화를 지키며 ‘힙합 비둘기’로 군림한 그는 일반 대중과 힙합 청취자 모두에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디아이뮤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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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문화방송(MBC) <무한도전>이 개최한 ‘자유로 가요제’ 공연이 열린 날,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그날의 무대를 직접 보고 온 사람들이 쓴 게시물이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스포일러 자제염’ 따위의 반응과 ‘현장에서 직접 봤다니 부럽다’ 따위의 반응이 어지럽게 뒤섞인 게시판을 서성이던 내 눈에, 문득 이상한 게시물 제목이 하나 들어왔다. ‘형돈+지디 무대에 난입한 비둘기 한마리.’ 뭐지 이건, 하는 마음으로 클릭했다가 그만 마시던 음료수를 컴퓨터 모니터에 뿜고 말았다. 촌스러운 의상을 입고 이상한 춤을 너무도 진지하게 추고 있는 정형돈과 지드래곤만으로도 이미 우스워 죽을 지경인데, 그 앞에 거대한 비둘기 날개를 단 데프콘이 서 있는 광경은 우스꽝스러운 것을 넘어 어딘가 초현실적인 맛까지 있었다. 아, 그래. 데프콘이 자신을 평화의 상징 비둘기로 명명했었지. 그 비둘기가 이 비둘기 얘기였구나.
저 거구의 남자가 왜 안 어울리게 ‘비둘기’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조금 해보자. 지난여름 일군의 힙합 가수들이 서로의 노선에 대한 비판이나 금전 관계에서 생긴 불화에 대한 폭로를 랩으로 만들어 서로를 공격하고 도발하며 화제를 불러 모은 적이 있다. 이른바 ‘컨트롤 비트 대전’이라 불렸던 이 힙합 전쟁은 힙합 특유의 나르시시즘과 배틀 문화에 대해 잘 몰랐던 이들까지 모두 힙합 신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뜬금없이 과거 데프콘이 문화방송 <황금어장-무릎팍도사>에 나와 했던 발언이 다시 화제가 됐다. “땅덩어리 넓은 미국은 디스(비방)하고 안 마주치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여기(한국)는, 여기저기서 다 만나게 돼요.” 덕분에 컨트롤 비트 대전에 참전하지도 않았던 데프콘은 졸지에 ‘선견지명’을 재평가받으며 평화의 상징, 힙합 비둘기가 된 것이다.
방송으로만 데프콘을 접해왔던 이들에게는 그저 재미있는 일 중 하나였겠지만 그의 과거 음악을 들어봤던 이들에겐 조금 낯선 일이었다. 물론 누군가를 특정해서 비방하는 일 따위는 벌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데프콘이야말로 거칠고 생생한 가사와 핵폭탄 같은 욕설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하드코어 힙합 가수였으니까 말이다. 누군가를 특정해서 비방하지 않았을 뿐 4집 <마초 뮤지엄>(2010)에 실린 곡 ‘독고다이’나 ‘국가대표’에서 힙합 신 전체를 욕설과 샤우팅으로 잘근잘근 씹어 먹었던 랩괴물 아니었나.
한땐 음악성 인정받던 힙합가수 생계위해 방송서 코믹모습 선봬
낯선 모습에 ‘변했다’는 평가도
음악·방송 구분해 진실담아 할 뿐
과거에 했던 말들 배반한 적 없어 사실 과거 데프콘이 음악적으로 높이 평가를 받으면서도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지 못했던 이유는 직설적이고 파괴력 있는 가사의 탓이 컸다. 성이나 범죄, 폭력 등 사회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가사들은 에둘러 표현하는 법이 없었다. 적나라한 가사와 강렬한 메시지는 음악적으로 높게 평가받았지만 메이저 언론에 소개되기는 다소 어려웠고, 방송 금지를 받을지언정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포기하지 않는 데프콘의 태도 때문에 방송에서 그의 진가를 확인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딜리버리(랩 가사가 잘 들리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기술)는 또 어찌나 좋았는지, 그 거친 가사는 어물거림 없이 귓전에 쏙쏙 들어왔다. 데프콘이 음악을 잘하는 뮤지션이라는 사실은 음악깨나 듣는 이들에겐 낯선 일이 아니었고, 한국대중음악상 댄스·힙합 부문 최우수상 수상이라는 타이틀은 그 사실을 증명하는 수많은 사례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생계를 보장해주진 못했다. 음악 시장 자체가 방송에 종속되다시피 하면서, 방송에 나가지 않으면 음악으로 돈을 벌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방송 금지곡이 수두룩한 데프콘의 음반은 완성도 있는 힙합 음반일지 몰라도 돈이 되는 음반은 아니었던 것이다. ‘데프콘이라는 이름으로 내는 마지막 정규 음반’이라 말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5집 <더 레이지 시어터>(2011)는 평단의 호평을 받은 명작이었지만 시장에서 성공하지는 못했다. 5집의 상업적 실패는 데프콘에게 깊은 배신감과 허탈감을 안겨줬다. 이미 <무한도전>과 엠비시 에브리원의 <주간 아이돌> 등으로 방송가에서는 자리를 잡아가던 시점이었다. 방송을 통해 경제적으로는 안정을 찾아도 본업인 음악에서는 철저히 시장의 외면을 당하는 아이러니의 반복이었던 셈이다. 모두들 아는 것처럼, 탈출구는 장난처럼 만들었던 정형돈과의 유닛 ‘형돈이와 대준이’의 싱글 앨범 <껭스타랩 볼륨1>(2012)에서 터졌다. <주간 아이돌>을 통해 검증된 조합인 정형돈과의 듀엣은 대중의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고 일수 가방과 가짜 명품 옷, 금 목걸이 등으로 치장한 ‘건달 룩’은 보는 이들의 허를 찔렀다. <껭스타랩 볼륨1>은 음반 활동으로는 한번도 흑자를 기록한 적이 없다던 데프콘의 첫 흑자 앨범이 된 것으로도 모자라 급기야 음악 순위 프로그램에서 아이돌 그룹과 1위를 놓고 다투는 진기록을 세웠다. 세상사를 섣불리 판단하고 정의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데프콘의 이런 변신에 대해 ‘사람이 변했다’고 말한다. <주간 아이돌> 엠시 자리를 필두로 문화방송 <나 혼자 산다> 고정출연, 준고정급 대우를 받고 있는 <무한도전>, 심심치 않게 출연하는 각종 토크쇼까지 방송가를 종횡무진하며 코믹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가 낯설기도 할 것이니 영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가만히 다시 생각해보면, 데프콘의 이런 모습은 그렇게 갑작스러운 일도 변절도 뭐도 아니다. 데프콘은 예전에도 힙합 리스너들을 위한 음반과 상업용 싱글 음반을 명확하게 분리해서 생각하는 뮤지션이었다. 힙합 신을 넘어 더 다양한 청자를 만나기 위한 시도였던 노래 ‘아버지’로 대중의 호응을 얻었을 때 그는 “그 앨범으로 힙합 팬들에게 어필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음악과 자신이 ‘진짜 힙합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의 경계를 나름 명확하게 나눈 것이다.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음악적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에 대한 자부심을 자주 드러내 보이던 데프콘은 힙합‘만’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힙합을 할 때 어설프지 않게 제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힙합 뮤지션으로서의 자부심을 세웠다. 흑인음악 웹진 <리드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그런 자신의 주관을 선명하게 밝힌 바 있다. “한마디로 음원 시장을 노린 거면 그쪽만 노리든가 해야지, 힙합 커뮤니티에 와서 ‘아~ 우리 노래 사랑해주세요’ 이러는 건 좀…. (중략) 차라리 매니저를 고용해서 라디오 피아르(PR)를 열심히 하든가 하라는 거죠. 그렇게 그쪽에 힘을 더 쓰면서 착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다시 또 힙합 할 때는 돌아와서 힙합을 하고! 그건 타협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2010년 4월12일 인터뷰 중) 가만히 생각해 보면 데프콘은 ‘형돈이와 대준이’ 활동을 할 때 단 한번도 자신들이 ‘힙합’을 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 장르가 ‘힙합’이냐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그는 늘 ‘돈 되는 음악’ ‘상업음악’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거칠지만 사실적인 농담처럼 들리던 그 말들은, 사실 자신이 지금 하는 음악이 일반 대중을 향한 것인지 힙합 청취자들을 향한 것인지 엄정하게 구분하려던 진심이었던 셈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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