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음의 성공을 보면서 반가운 이유는 그의 또래가 겪은 숱한 실패와 자잘한 승리의 역사가 떠올라서다. 그는 방영중인 <한국방송>(KBS) 수목드라마에서 눈물뿐인 인생의 주인공을 잘 소화해내며 연기자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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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사회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무렵 그의 초년운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수많은 아이돌 그룹들이 뜨고 지던 2000년대 초반, 기획사에 발탁되었을 때만 해도 그렇게까지 그 시절이 암울해지리라곤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체중 감량을 요구하는 회사의 관리를 피해 몰래 나무 밑에 떨어진 은행을 주워 먹으며 허기를 달랬던 시절이었으니, 그보다 더 심한 마음고생이 남아 있을 것이라 어찌 예상할 수 있었으랴. 그가 그 쓸쓸한 시절을 무슨 생각으로 버텼을지 나로선 알 수 없다. 그저 토크쇼 프로그램 등에서 ‘나도 에스이에스(SES)나 핑클 같은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요정 같은 이미지의 걸그룹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며 어렴풋이 짐작해 볼 뿐이다. 데뷔만 하면 모든 게 나아질 것 같았겠지만, 데뷔한 후에도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은 대부분 서툰 한국말과 어수룩한 표정으로 티브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재일 한국인 멤버 아유미에게 쏠렸고, 남은 관심의 대부분은 코끝에 점이 매력적이었던 박수진에게 돌아갔다. 남은 두 멤버는 그룹의 일원이었으나,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남진 못했다. 활동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분명 그가 메인이었는데, 사람들이 즐겨 찾는 멤버들에게 가운데 자리를 하나둘씩 양보하고 나니 어느 순간 그의 자리는 가장 끝자리로 밀려나 있었다. 회사는 그의 몸에 맞지 않는 이미지를 요구했고, 그 요구에 고분고분 따른다고 해서 다른 멤버들에게 집중된 스포트라이트를 조금이라도 나눠 받게 되는 즐거운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중학생 시절부터 동네 오빠들은 물론 지하철에서 마주친 의경에게 헌팅을 당할 정도로 돋보이는 외모의 소유자였던 그로서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철저하게 멀어진다는 게 퍽이나 낯선 일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리틀엔젤스’ 예술단 활동으로 이미 몇 년간의 무대 경험을 쌓아왔던 터였다. 기획사에 소속되기 전부터 혹독한 반복 훈련과 엄격한 위계질서로 점철된 다년간의 트레이닝을 받아왔고, 남북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평양 무대에도 올라갔던 그였다. 그 오랜 훈련과 고생을 거친 끝에 얻은 게 고작 ‘유명한 그룹의 안 유명한 멤버’라는 포지션이라는 건, 어린 그에겐 아마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리라. 그는 회사와의 계약이 끝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계약 없이 몸담고 있던 그룹 ‘슈가’를 탈퇴했다. 데뷔 2년이 채 되기도 전의 일이었다. 스스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표현했던 그룹 생활은 끝났지만, 그렇다고 바로 좋은 날이 온 것도 아니었다. ‘안 유명한 연예인’이란 건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것이다.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깔끔하게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어정쩡하게 얼굴이 알려진 상황에선 툭하면 “요샌 왜 티브이에 안 나오느냐”는 질문과 마주쳐야 한다. 그 시절 그도 그랬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룹은 나왔으되 여전히 ‘그룹 슈가 출신’이라는 수식어를 떼어내진 못했고, 한창 <에스비에스>(SBS)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일요일이 좋다-엑스맨을 찾아라>에 출연하던 시절에도 그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보다는 “쟤는 뭐냐”는 떨떠름한 반응을 주로 얻었으니까. 세상은 그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새로 선택한 연기의 길도 만만치는 않았다. 에스비에스 드라마 <루루공주>(2005)에서 작은 역을 받았지만, 드라마 자체가 워낙 엉뚱한 방향으로 화제가 된 탓에 그가 출연했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질 틈도 없었다. 같은 방송사의 드라마 <사랑하는 사람아>(2007)에 출연했을 때는 ‘발연기’ 논란에 몸살을 앓아야 했고, 그 후 출연한 작품들에서는 이렇다 할 인상 자체를 남기는 데 실패했다. 그 시기 그가 출연한 작품들을 나열해보면 그 리스트가 제법 길다. <채널씨지브이>(CH CGV) 드라마 <리틀 맘 스캔들>(2007), <문화방송>(MBC) <겨울새>(2007),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2008), <에덴의 동쪽>(2008) 등이다. 아마 그가 출연한 장면을 떠올리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슈가를 박차고 나온 지 4년이 넘도록, 그는 여전히 제 존재감을 세상에 알리지 못한 채 고군분투만을 반복중이었다. 쇼 비즈니스 업계에서 7년을 일했는데 통장 잔고는 487원뿐인 기가 막힌 상황. 여자 연예인의 나이에 유달리 가혹한 한국에서, 나이 스물다섯의 데뷔 7년차 중고 신인의 잔고가 그 모양이라는 건 결코 청신호가 아니었다. 심지어 연예인이 아닌 그 또래의 평범한 청년들도 스물다섯이면 슬슬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나이다. 그렇다고 그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긴 했을까. 2009년 <텐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그 시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지금 와서 연예인 아닌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는 거고. 아빠가 일을 하시긴 하지만 전처럼 엄마가 함께 일을 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무용을 했는데, 예중하고 예고 보내려면 정말 많은 돈이 나간다고 하더라. 그렇게 부모님이 고생 많이 하셨으니까 이젠 내가 도움을 드리고 싶었다.”(2009년 10월27일. <텐아시아>) 그것은 흡사 자신을 뒷바라지해준 부모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포기해선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는 고시생과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일은 희한한 방향에서 풀렸다. 실제 연인인 그룹 ‘에스지 워너비’(SG Wannabe)의 멤버 김용준과 함께 문화방송 가상 결혼 예능 <우리 결혼했어요>에 출연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결혼을 장담하기엔 너무 어린 연인들 입장에서는, 만천하에 자신들의 연애를 공개하는 게 다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신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게 낫겠다”며 내린 그 선택은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꿨다. 드디어 전국민이 그의 이름 석 자를 제대로 외우기 시작한 것이다. 황.정.음. 그 뒤로 이어진 황정음의 행보를 새삼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화방송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9), 에스비에스 드라마 <자이언트>(2010), 문화방송 <내 마음이 들리니>(2011), <골든 타임>(2012), 에스비에스 <돈의 화신>(2013)을 거치는 동안 그는 매번 연기력 논란에 시달리면서도 그 논란을 정면으로 돌파해냈고, 매번 비슷한 배역을 맡는다는 비판 속에서도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한국방송>(KBS) 드라마 <비밀>(2013)을 통해 마침내 연기로도 인기로도 크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배우가 될 때까지, <우리 결혼했어요>에서부터 딱 4년이 걸렸다. 성공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해둬도 좋을 것이다. 이 글은 그의 성공이 아닌 그의 실패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한 글이니까.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갑내기 입장에서 감히 이야기하자면, 그가 경험했던 실패들은 또래 청년들의 보편적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인으로 내디딘 첫 발걸음은 불만족스럽고, 일은 자신의 생각처럼 되지 않으며, 목표는 저 높이 있는데 현실은 그저 갑갑할 따름인 상황. 나 혼자만 제자리걸음인 것 같은데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흐르는 청춘의 어떤 암울함. 드라마틱한 성공을 제외하면, 그의 경험은 처음 본 수능을 망치고, 처음 품었던 장래희망이 맥없이 좌절되는 걸 경험하고, 먼저 취직한 친구들을 보며 스스로를 자책했던 나와 내 또래의 경험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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