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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13 19:28 수정 : 2015.10.23 14:39

배우 성동일은 전라도 사투리를 맛깔스럽게 표현한다. 어린 시절 짧게 전라남도 화순에서 살았을 뿐이다. 1998년 드라마 <은실이>부터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 <응답하라 1994>까지 그의 차진 사투리 연기가 드라마 속 판타지의 계를 현실로 끌어들인다. <씨네21>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티브이엔(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는 그럴싸한 판타지의 세계다. 주인공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천재 의대생 오빠야’와 ‘공 잘 뿌리는 국보급 투수 친구’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주인공 집안은 땅값 높은 신촌에 너른 마당 딸린 하숙집을 경영중이며, 하숙집에 모인 팔도 청년들은 아무도 ‘표준어’를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 많은 하숙생 중 운동권 청년은 한 명도 없고, 영남과 호남 사이의 지역감정 이야기는 밤새워 컴퓨터 게임을 하는 룸메이트와의 다툼 정도로 갈무리된 채 지나가 버린다. 서로 얼굴을 붉힐 만한 정치 사회적 맥락은 모두 제거된 채 문화적 배경만 존재하는 아름다운 과거부터, 그렇게 아웅다웅하던 친구들이 20여년 뒤에도 아무도 다치거나 망한 이 없이 웃으며 함께 집들이를 할 수 있다는 현재 시점까지, <응사>는 온통 ‘그럴싸한’ 판타지로 가득 채워진 작품이다.

덕분에 요즘엔 어디를 가든 나정(고아라)의 남편이 쓰레기(정우)일 것인가 칠봉이(유연석)일 것인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일견 당연한 일이다. <응사>가 내포한 판타지의 핵심은 둘 중 누구를 선택해도 만인의 부러움을 살 만한 킹카 청년 둘이 모두 자신을 좋아하는데, 둘 중 하나와는 결혼에 성공하고 나머지 하나도 친구로 ‘킵’할 수 있다는 에스에프(SF)급 설정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사근사근하면서도 속으로는 끓는 투지를 눌러 담은 서울 남자 칠봉이를 지지하는 이들과 허술하고 게으른 듯하지만 속정이 깊은 경상도 남자 쓰레기를 지지하는 이들의 토론은 흡사 나라의 명운이라도 건 것처럼 치열하다. 그 치열한 ‘성나정배 남편 타이틀 쟁취대회’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종종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다. “성동일이랑 이일화가 없었다면 이만한 판타지가 가능이나 할 것 같으냐”고 말이다.

사실 주인공들의 한발 뒤에서 은은하게 배경을 깔아주는 성동일과 이일화가 없었다면, 이 위태위태한 판타지의 신뢰성은 다소 떨어졌을 것이다. 전작 <응답하라 1997>(2012)에서는 광주 출신 성동일과 부산 출신 이일화가 어떻게 부부가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에피소드도 존재했지만, 이미 전작을 통해 두 사람의 조화를 확인한 시청자들은 <응사>에선 그런 구차한 설명 없이도 이들 부부를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구성진 서남 방언의 성동일과 억센 동남 방언의 이일화가 연을 맺고 사는 것이 하나 이상할 게 없어진 덕분에, 팔도 출신 청년들이 아무도 자신의 방언을 교정하지 않는 것이나, 지역 유지 출신 청년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자석처럼 신촌하숙에 모이는 일, 눈치 없는 경남 청년 삼천포(김성균)와 다혈질의 호남 처녀 조윤진(도희)이 서로 사랑하는 광경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응사’ 주인공 성나정의 아버지
단순 배경으로 소비되지 않고
연기 통해 ‘자신만의 공간’ 형성
‘추노’ 등서도 감초조연 연기하며
주연들 위한 풍성한 배경 제공
그가 없었다면 ‘응사 빛났을까’

그것은 부모 세대를 단순히 극의 배경으로만 소비하지 않는 이우정 작가와 신원호 감독의 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역할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배우들의 공이기도 하다. 이 부부의 화학작용을 리드하는 것은 단연 성동일이다. 성동일은 극의 주인공이 어디까지나 젊은 배우들인 것을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역할에 특유의 질감을 덧붙여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화면의 초점 밖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도 인물 특유의 느낌을 살려 입안 가득 음식을 넣는다거나, 손이 큰 이일화에게 야참을 부탁하는 장면에서 “조금만”이 아니라 “쪼오~끔만”이라고 대사를 조여서 말맛과 대사의 숨은 의도를 100퍼센트 살리는 등의 디테일들은 여러 설명 없이도 이 인물이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조연의 자리에서 주연들이 뛰어놀기 좋은 풍성한 백그라운드를 제공하는 이런 성동일의 연기는, 오랜 시간 감초 조연으로 다져온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성동일이 주연을 맡은 작품은 드물지만, 작품의 지배적인 정서를 좌우하는 배역을 맡은 순간은 많았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2008)의 식민지 조선에서 신분을 속이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으나 번번이 임무완수에 실패해 자책하는 독립군이나, 한국방송(KBS) 드라마 <추노>(2010)의 금수 같은 추노꾼 천지호는 단순한 코믹 조연이 아니라 작품이 기반한 세계관의 분위기를 한 몸에 응축한 인물이었다.

성동일은 늘 농담처럼 “돈 받은 만큼만 연기한다”고 말하지만, 이런 풍성한 조연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인물의 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디테일을 쌓아 올린다. 주연에게야 극의 서사와 하이라이트가 자연스레 몰릴 수밖에 없지만, 조연은 간과되기 쉽기에 스스로 당위성을 쌓아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추노>를 찍은 뒤 <텐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성동일은 자신이 극중에서 방언을 구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들려준 바 있다. “사투리 쓰는 역할을 맡으면 일단 그 지방에 간다. 5일장 열리는 날 네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선술집 가면 적당히 취한 노인 분들이 많다. 그쪽으로 카메라 돌려놓고 밥 먹고 술 먹으면서 테이프 분량 두어개 찍어 오면 그 안에 별별 이야기가 다 들어 있다. 작가들의 대본은 말을 글로 쓴 문어체인데 배우는 글을 말로 풀어야 하니까 분명히 느낌이 다르다.”

그렇게 탄탄히 쌓아진 역할들은 한가지 색깔로만 채색되지 않는다. 시종일관 실수만 자아내던 <원스 어폰 어 타임>의 독립투사는 마지막 순간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하는 기백을 보여주며 근사한 비틀기를 보여줬고, 한국방송 <도망자 플랜 비>(2010)의 나까무라 황은 어느 순간 감초에서 확 극의 중심으로 올라와 보는 이들을 압도했다. 적을 야습하려다 발각당한 <추노>의 천지호가 꼬리가 빠지게 도망가는 장면은 보는 이들을 모두 폭소로 몰아갔지만, 대길(장혁)의 품에 안겨 스스로 입안에 저승 갈 노잣돈을 넣고 숨을 거두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도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동일이 맡은 인물들은 그렇게 풍부한 배경을 제공하고, 마침내는 스스로도 자신만의 서사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하긴 출세작인 에스비에스 <은실이>(1998)에서의 ‘빨간 양말’ 양정팔부터가 4회 출연을 예정으로 등장했으나 성동일의 디테일에 힘입어 분량을 확보하고 상대역까지 얻어낸 작품 아니었나.

그런 성동일이 좋은 파트너인 이일화와 좋은 제작진인 이우정 작가, 신원호 감독을 만나면서 시너지는 배가되었다. 이미 전작 <응답하라 1997>에서 암 수술을 앞둔 성동일을 위해 유명 드라마 작가에게 전화로 ‘등장인물을 암으로 죽이지 말라’고 싸움을 걸던 이일화의 에피소드로 자신들만의 서사를 확보한 부모세대 배우들은, <응사>에서는 더 자주 작품의 전면에 나서서 어른들의 공간을 확보한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을 다녀오는 부부의 서러움이나, 아내의 폐경 앞에서 어떻게 위로를 해주면 좋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중년 남자의 곤혹, 알고 보니 폐경이 아니라 늦둥이 임신이라는 낭보를 접한 뒤 기쁨과 민망함이 교차하는 부부의 기쁨 등은 <응사>를 단순한 트렌디 드라마가 아니라 가족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둔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조금은 생뚱맞은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 지어보자. <전원일기>를 통해 ‘한국의 어머니상’이라는 수식어를 부여받은 김혜자는, <씨네21> 김혜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누구누구의 엄마인 주변인물이라기보다 엄마가 주인공인 드라마를 많이 하셨다”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전원일기>에서도 속상하면 혼자 광에 가서 아버지가 남긴 소주 홀짝거리면서 어떻고 저떻고 이야기하는 여자였죠. 그렇게 김정수씨가 집필한 10년 동안은 그 엄마의 공간도 만들어주고 했는데 바뀐 작가들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었어요. 만날 엄마는 ‘들어왔니? 밥 먹었니?’만 했죠. 그러다가 결국은 시청자가 외면했죠.”

건강한 드라마는 조연들에게 자신만의 공간을 열어주고 독립된 서사를 남겨둔다. 동시에 그런 배역은 그 배역을 소화할 준비가 된 배우를 만났을 때만 빛을 발한다. 김정수 작가가 “가슴에는 폭발만 안 했지 화산이 하나 들어 있다”고 표현했다던 김혜자처럼. 어쩌면 성동일도 새로운 ‘한국의 아버지상’으로 기록될 수 있을까? 속단하기는 어렵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렇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어 보인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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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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