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2013년의 마지막 날, 송년회 자리는 그리 즐겁지 않았다. 불판 주위로 둘러앉은 친구들은 벌써부터 “몸이 20대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술이 한 순배 돌자 불콰해진 친구들 사이에선 슬금슬금 시국 이야기도 흘러나왔고,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괴악한 노동조건의 직장을 그만둘까 고민하는 친구도 있었고, 일찌감치 자영업에 뛰어들어 “우린 이제 간신히 사원인데 너는 벌써 사장님”이란 부러움 섞인 놀림에 시달리다 대출 이자를 갚느라 허덕이는 속사정을 털어놓고 만 친구도 있었다. 건강, 연예, 취업, 생업, 경제, 정치, 사회. 무슨 이야기를 꺼내도 분위기는 축축 처지는 방향으로만 흘러갔다. 서른의 밤이 그렇게 피폐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야, 그래도 한 해 마지막 날인데 좀 밝은 얘기도 좀 하고 그러자. 야, 승한아. 요즘 티브이에서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뭐냐? 너 아직도 <무한도전> 매주 챙겨 보냐?” 건강 때문에 술 대신 사이다나 홀짝거리고 있던 나는, 불시에 당한 습격에 사레들려 기침을 뱉었다. 맞다. 나의 노동 현장은 이들에게는 몇 안 되는 위안이고 도피처였지. 그래도 그렇지, 하루라도 마음 편하고자 온 송년회 자리에서 또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기침을 하는 동안 다른 친구가 먼저 선수를 친다. “올해는 연예대상 누구 주려나 했더니, 김병만이더만. 받을 사람 받은 거 같아.” 하루 전(12월30일) 방송된 에스비에스(SBS) <연예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김병만이 제일 먼저 화제에 올랐다. 갑자기 친구들의 얼굴이 아련해졌다. “야, 수상소감 봤냐? 좀 짠하더라?” “짠하기는, 멋지지. 그게 남자지.” “선배님들은 정말 만능 엔터테이너이신데, 전 사실 그것에 비하면 부족한 게 참 많습니다. (중략) 저의 방법은 그거였습니다. 스카이다이빙, 하늘에서 뛰어내리고, 물속으로 들어가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중략) 저 김병만은 김병만 방식대로 여러분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울음을 삼키며 소감을 이어간 김병만의 모습에 적잖은 친구들이 울컥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조작 방송 논란이 있었다 하더라도, 에스비에스 <정글의 법칙>을 보노라면 김병만이 목숨 내걸고 방송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든 부정하기 어려우니까. 그 오랜 고생에 대한 보답을 손에 거머쥐고, 김병만은 자신이 부족한 게 많다는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대상 수상자들이 으레 하는 말이지만, 온갖 고생을 다 겪은 김병만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확실히 그 울림이 달랐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유재석, 강호동의 시대도 갔어. 한국방송(KBS)도 김준호가 받았던데?” “완전 정통 코미디언들 전성시대네. <개그콘서트> 출신들이 싹 쓸었어.” 내가 눈알만 굴리는 동안 아까까지 죽을상을 하고 있던 친구들은 신나게 한마디씩 보탰다. 아까까지 반쯤 죽어 있던 애들 맞나? 하긴, 함께 원년부터 <개그콘서트>를 지켜온 짝패 김대희와 오랫동안 포옹하며 눈물을 훔치던 김준호의 모습도 기억에 오래 남을 법했다. 내가 가만히 듣고만 있자, 한참 이야기하던 친구 중 누군가가 다시 말을 꺼낸다. “야, 승한이한테 물어봐 놓고 우리끼리만 떠들고 있었네. 우리 ‘티브이 평론가’ 선생 이야기 들어봐야지.” 다시 좌중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기침을 뱉느라 바싹 마른 입을 다시며 말문을 열었다. 연예대상 받은 김병만·김준호각고의 노력 끝에 최고 올랐지만
‘정법’·‘인간의 조건’ 등 덕에 수상
‘정통 코미디’ 부활 말하기엔 일러
한길만 판 코미디언 빛 볼 날 언제? “일단 유재석, 강호동의 시대가 갔다고 말하긴 어렵지. 유재석이 일주일에 프로그램을 딱 세 개 하는데, 세 개만 하고도 여전히 대상 후보에 오르고, 대상을 못 받은 게 뉴스거리가 된다는 건 여전히 그 양반이 최고란 이야기니까.” 친구들의 표정이 어딘가 미묘했지만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김준호나 김병만이 대상을 받은 건 분명 받을 사람들이 받은 거라고 생각해. 두 사람 모두에게 정말 잘된 일이고. 그런데 그게 정통 코미디언들이 인정받는 시대가 된 거라고 보는 건 좀 김칫국 마시는 게 아닌가 싶다.” 맨 처음 말문을 열었던 친구가 반문한다. “어째서? 정통 코미디언들 맞잖아. 김병만이야 리얼 버라이어티니까 그럴 수 있다 치자. 김준호는 아직까지 <개그콘서트> 나오잖아?” 친구들의 시선이 어딘가 시무룩해졌다 했는데 이제 보니 이 친구들, 자신을 김준호와 김병만에게 투사하고 있었다. 매일 죽을 둥 살 둥 발버둥쳐도 앞으로 한 걸음 떼기 어려운 세상을 사는 나의 친구들은, 늘 잘나가던 1인자들을 제치고 정상에 오른 이들의 승리를 보며 대리만족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까보단 조심스러운 말투로 설명했다. “물론 올 한 해 김준호가 <개그콘서트>에서 활약이 컸고, 수상소감도 <개그콘서트> 위주였지. 그런데 생각해봐. 김준호가 올해 출연한 한국방송 프로그램이 몇 개인지 생각나?” 친구들이 어물어물하며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두 개인가? <개그콘서트>하고 <해피선데이-1박2일>하고?” 말을 꺼낸 나도 가물가물했지만 친구들 앞에서 천천히 헤아려보았다. “자, 봐봐. <개그콘서트> <인간의 조건> <퀴즈쇼 사총사>, 올해 초 폐지된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 올해 초 하차한 <해피투게더3>, 올해 생겼다 사라진 <황금카메라>, 올해 말에 투입된 <해피선데이-1박2일> 시즌 3까지. 한 해 동안 7개야, 한국방송에서만. 그것도 정통 코미디, 퀴즈쇼, 비디오 클립 쇼, 토크쇼, 리얼 버라이어티 안 가리고 두루두루.” 친구들은 다소 얼빠진 표정으로 날 주목했다. “분명 열심히 했고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받은 상이야. 그런데 정통 코미디만 해서 받은 상은 아니라는 거야. 그런 거였으면 작년에 한참 ‘꺾기도’ 할 때 받았어야지. 김병만이나 김준호나 사실 정통 코미디에서 보여준 활약이나 인기만 보면 진작 몇 년 전에 받았어야 하는 사람들이잖아? 한길만 꾸준히 파고 있을 땐 그 값을 제대로 못 받다가 버라이어티로 진출을 한 다음에야 상을 받은 걸 보면, 아직까지 한국에서 정통 코미디만 해서 인정을 받는 일이 쉬운 것 같진 않아. 당장 예능 프로그램 비중만 봐도 그렇잖아. 너희도 <개그콘서트>나 티브이엔(tvN) <에스엔엘(SNL) 코리아> 정도는 알아도, 에스비에스 <웃찾사>나 문화방송(MBC) <코미디에 빠지다>에 누가 나오는지는 가물가물하지?” 한참을 떠들고 보니 주변의 분위기가 싸늘히 가라앉았다. 하필이면 그 순간, 고깃집 티브이에선 2013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카운트다운이 중계됐다. 이런 망할. 괜한 입방정으로 친구들의 새해 첫 심경을 거지같이 만들다니. 얼른 짐을 싸 도망가고 싶은 심경이었다. 보신각 종 타종까지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친구 중 한명이 쓸쓸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말은 결국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건 끝내 인정받지 못한다는 거네.” 막 서른한살의 취업준비생이 된 친구는 하염없이 소주잔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잠시 그 친구의 눈을 바라보다 말문을 뗐다. “그건 아니야. 너무 일찌감치 샴페인을 터뜨리진 말자는 이야기였어. 여전히 세상은 정통 코미디보다 버라이어티쇼를 더 좋아하고, 앞으로 또 상황이 안 좋아지면 전에 그랬듯 정통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폐지될 수도 있잖아. 너무 빠른 낙관은 너무 빠른 실망으로 이어지니까. 하지만 언제나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겠니? 과대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작은 승리가 의미가 없는 건 아니잖아. 김준호와 김병만의 대상은 오랜 시간 고군분투하며 걸어와 얻어낸 값진 성과니까.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정통 코미디 한길만 판 코미디언이 제대로 된 인정을 받을 날도 오지 않을까 생각해. 여기서부터가 시작인 거지.”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내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여기서부터가, 시작이라.”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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