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17년차 배우 전지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배역은 자신이 드러나는 역할이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실제와 마찬가지로 톱스타를 연기중인 그는 자유롭게 인물을 표현한다. 전지현스럽게 연기하는 배우로 거듭나고 있다. 에스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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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내가 어떤 사람들하고 영화 찍고 그런 줄 알아? 정우성, 강동원, 원빈…” 그렇게 열 내어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사람은 안다. ‘아시아의 별’ 천송이는 아역 스타로 데뷔해 12년간 여러 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거치며 한류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카페모카’와 ‘목화씨’를 구분 못하는 천송이의 무식함을 비웃고 그의 ‘발연기’를 욕하면서도, 그가 광고하는 제품들을 소비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한다. 그리고 여기 정우성과 영화를 찍고, 이병헌과 드라마를 함께 했으며, 장동건과 광고를 찍은 전지현이 있다. 열일곱에 잡지 모델로 데뷔한 뒤 그는 17년간 중화권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역에 이름을 알렸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그가 아직 <엽기적인 그녀>(2001)의 관성에 기대 버티고 있다고 흉보거나, 연기력은 안 늘면서 광고만 찍는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전지현이 광고하는 샴푸를 쓰고, 그가 광고하는 옷을 사 입었으며, 그가 마시는 침출차 음료를 사 마셨다. 에스비에스(SBS) <별에서 온 그대>(별그대·2013)에서 톱스타 ‘천송이’ 역을 맡은 전지현은 자신과 천송이가 “비슷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성향을 오버하고 극대화하면 천송이 같은 인물이 탄생한다”고 말했다. 정확한 표현이다. 극 중 천송이의 사무실에는 <엽기적인 그녀>의 포스터가 붙어 있고, 천송이의 경력을 소개하는 스페셜 다큐에는 영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7)의 제작발표회 클립이 삽입된다. 이쯤 되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건 슬슬 무의미해진다. 천송이는 다소 과장된 버전의 전지현이다. 드라마 <별그대>는 대중이 스타를, 특히나 여성 스타를 어떻게 소비하는지 그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모두의 러브콜을 받으며 최정상을 지키던 천송이는, 자신이 다른 여배우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루머 하나만으로 끝을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드라마에서는 급하게 하차하게 되고 그를 모델로 썼던 광고주들은 그에게 위약금을 요구한다. 재계약을 노골적으로 노리던 소속사는 재계약을 피하고, 대중은 “그럴 줄 알았다”며 천송이의 추락을 즐긴다. 작품뿐 아니라 가십 또한 상품으로 유통되는 쇼 비즈니스계에서, 스타의 불행과 실패는 대중이 일용할 훌륭한 드라마다. 천송이처럼 누명을 쓰고 아찔한 추락을 겪은 건 아니더라도, 전지현의 커리어도 <도둑들>(2012) 이전까지는 내리막길이었다. 영화 <시월애>(2000)와 <엽기적인 그녀>로 열광적인 신드롬 한가운데 섰던 전지현은, 그 이후 전작들을 뛰어넘을 만한 작품을 선보이지 못했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연을 맺은 곽재용 감독과 다시 만난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여친소·2004)는 거대한 피피엘(PPL·간접광고) 덩어리라는 비아냥에 시달렸다. 캐릭터는 <엽기적인 그녀>에서 따오다시피 했고, 전지현이 광고하는 온갖 제품들이 영화 상영 시간 내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의 소속사는 <여친소>에 투자한 홍콩 유력 제작자 빌 콩과 손잡고 일명 ‘월드 스타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데이지>(2005)는 광고에서 자주 노출된 전지현의 청순한 이미지를 고스란히 가져다 반복했을 뿐이었고,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화제를 모았던 <블러드>(2009)는 뚜껑을 열어보니 비(B)급 액션물에 그쳤다. 낯선 언어로 감정 없는 뱀파이어 사냥꾼을 연기해야 하는 <블러드>에서 전지현이 새롭게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은 없었다. 진지한 역에 도전했던 <4인용 식탁>(2003)은 스스로 “맞춰놓은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회고했고,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로는 ‘가능성을 남겼다’는 평을 들었지만 데뷔 10년차 배우에게 ‘가능성’이란 말이 칭찬은 아니었다. <엽기적인 그녀>의 그늘과 광고 모델의 이미지, 자신의 몸에 안 맞는 무거운 배역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스타’가 아닌 ‘배우’로서의 전지현은 점차 논외의 대상이 되었다. 이쯤 되자 처음 전지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고유의 매력들까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지하철역에서 자기 흥에 겨워 몸을 흔들던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광고와, 그 연장선상에 서 있던 ‘춤추는 전지현’을 전면에 내세운 프린터 광고는 사람들에게 이전의 어떤 여배우와도 다른 전지현의 매력을 선보였다. 육감적이진 않지만 곡선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춤을 추지만 유혹하는 대신 제 흥에 취한 소녀. 전지현은 자신이 표정과 몸으로 많은 것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을 지녔고, 애써 구애하는 대신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있어도 모두를 매료시키는 매력을 지니고 있음을 광고를 통해 증명했다. 그러나 배우로서의 영역이 위축되고 광고 모델의 영역만이 하염없이 광대해지면서, 그의 이러한 육체적 매력들은 “예쁜 것만 믿고 연기가 늘지 않는다”는 뻔하고 오래된 비판에 직면했다. 수년간 광고로 그를 만나던 대중은 슬슬 비슷비슷한 이미지가 반복되는 것에 지쳐갔고, 그가 광고에서 보여준 비언어적 표현력은 쉽게 폄하되었다. 비슷한 배역들과 비슷한 이미지의 광고들, 2000년대 초반에 쌓아올린 이미지를 계속 야금야금 빼어먹는 행보 속에서 전지현은 빠르게 소모되었다. ‘월드 스타’라는 타이틀은 커져만 가는데 이미지는 소진되는 상황, 몇 가지 민망한 루머들과 필모그래피에 대한 조롱들 사이에서 전지현의 화양연화는 그렇게 지나가는 듯했다. 어쩌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건지 모른다. 세상을 떠난 애인을 따라 투신자살을 시도하는 <여친소>의 경진이나, 운명에 묶여 수백년간 제 인생을 살아본 적 없는 <블러드>의 사야처럼, 전지현은 순애보나 운명에 묶인 채 사는 인물을 자주 연기했다. 심지어는 <엽기적인 그녀>조차 전지현을 정해진 순애보의 결말 안에 가두는 데 일조했다. 우리는 전지현을 이야기할 때 <엽기적인 그녀> 속 ‘그녀’가 남자친구 ‘견우’를 끌고 다니며 벌인 갖가지 기행에 대해서는 기억하지만, 그 이유가 사실 세상을 떠난 자신의 옛 남자친구를 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시시한 이유와 결국 견우와 다시 재회하는 신파성 결말은 애써 외면한다. 자유롭고 주체적인 춤사위를 통해 새로운 세대의 얼굴로 떠올랐던 여배우가, 신파와 순애보, 운명 따위의 키워드로 필모그래피를 채운 것이다. 그래서 전지현의 두번째 전성기가 자신이 소속사를 거치지 않고 처음으로 직접 선택한 작품, 육체적 매력과 철저한 욕망으로 무장한 도둑 ‘예니콜’로 등장한 <도둑들>에서 시작한 건 우연이 아니다. <엽기적인 그녀>처럼 발랄하되 가슴 아픈 순애보 같은 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이 광고 모델이었던 휴대전화 브랜드를 연상시키는 배역명을 사용하되 자신의 욕망을 위해 동료를 쉽게 배신하는 신뢰 따윈 없는 여인. 자신의 몸을 힐끔 훔쳐보는 잠파노(김수현)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섹시한지 과시하는 예니콜은 전지현 이외의 배우를 상상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그 뒤를 이은 <베를린>(2013)의 련정희 또한 조국의 미래보다는 자신과 가족의 행복이 우선인 인물이었다. 발랄한 이미지로만 각인된 전지현이 서늘하고 우울한 련정희를 잘 소화해낼까 의심했던 관객들은, 하정우와 류승범이라는 연기 괴수들을 상대로 제 몫을 너끈히 해치우는 전지현을 발견했다. 세상엔 어떤 배역을 맡겨도 잘 해치워내는 괴물 같은 배우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배우들은 본인의 매력과 잘 어우러지는 배역을 만났을 때 가장 밝게 빛난다. 엽기적인 것 같다가도 끝내 순애보로 돌아오는 주인공을 연기했던 전지현은, 주체적으로 제 욕망을 추구하는 배역을 맡으며 비로소 배우로서의 행보를 다시 인정받게 되었다. 처음 자신이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본연의 당당함으로 말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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