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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24 19:45 수정 : 2015.10.23 14:36

게임을 안 하는 사람들은 홍진호를 몰랐다. 그러나 티브이엔(tvN) 서바이벌 프로그램 <더 지니어스 - 게임의 법칙>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내는 ‘게임’을 펼친 홍진호에게 열광하고 있다. 티브이엔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또래 남자아이들과 달리 나는 온라인 게임에 좀처럼 취미를 붙이지 못한 채 청소년기를 보냈다. 생각만 길고 행동은 굼뜬 나는 어떤 게임을 해도 백전백패였으니 일견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국민 게임이라 불리었던 스타크래프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시간으로 자원을 캐내 건물을 짓고 병사를 생산해 전투에서 승리해야 하는 전략 시뮬레이션은 내겐 너무 어려웠다.

물론 농구를 안 보는 사람도 허재 정도는 아는 것처럼, 스타크래프트에 관심이 없던 나도 몇몇 유명한 게이머들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인터넷 구석구석마다 ‘황제’ 임요환이나 ‘몽상가’ 강민에 대한 이야기가 넘실거렸고, 쉬는 시간마다 그들의 경기를 교실 컴퓨터로 재생해서 보는 일군의 소년들 덕분에 그들의 경기도 몇 차례 볼 수 있었으므로.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게이머가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홍진호였다.

속도전에는 유리하나 장기전으로 갈수록 불리함이 크다는 종족 ‘저그’를 가지고도 연전연승했던 천재 게이머. 쉴 틈 없이 공격을 몰아치는 스타일로 ‘폭풍’이라는 별명을 얻은 스타일리스트. 그럼에도 매번 정규리그 우승에 실패하는 바람에 ‘영원한 2등’이라는 비아냥을 한 몸에 사던 플레이어. 불행히도 내가 홍진호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무렵엔 이미 그는 특유의 경기 스타일이나 뛰어난 전적으로 유명한 게 아니라, ‘2의 화신’으로 더 유명해져 있었다. 그에 대한 나의 관심도, 사실 ‘어떻게 이렇게 잘하는 선수가 우승은 한 차례도 못 할까’ 하는 호기심에서 싹이 텄다.

처음부터 그가 ‘2의 화신’ 취급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저렇게 잘하니 언젠가 한 번은 정규 리그 우승을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를 응원하던 이들의 마음이 ‘죽어라 응원해도 준우승에 그치는 그’에 대한 배신감으로 바뀌면서,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준우승에 머물러 있는 그의 커리어에 대한 조롱이었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조롱도 탄력이 붙자 걷잡을 수 없어졌다. 사람들은 그가 발음이 좋지 않은 것을 놀렸고, 그가 춘 춤이 우스꽝스럽다고 놀렸으며, 심지어는 그가 지은 표정이 기괴하다고 놀렸다. 사람들은 그가 놀릴 만해서 놀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놀리기 위해 놀리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콩(홍진호의 별명)은 까야 제맛’이라는 말이 격언 아닌 격언처럼 통용되었다.

‘2의 화신’ 비아냥·조롱 듣던
천재 게이머이자 ‘영원한 2등’
꼼수·변칙 안 쓰는 우직함에
어느새 그에게 매료된 사람들

반칙 없이 우승한 ‘지니어스 시즌1’
오직 자신의 영민함으로만 승부
원칙·신념 지켜 시즌2에선 탈락
‘아름다운 패배’ 선택한 바보


우리는 종종 기억하고 싶은 것들만 편의적으로 기억한다. 사람들은 ‘2의 화신’이란 타이틀로 홍진호를 기억하기 위해 그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의도적으로 잊었다. 이를테면 스타크래프트 정규 리그가 엠비시 게임(MBC GAME)의 ‘엠에스엘’(MSL)과 온게임넷의 ‘스타리그’ 양대 리그로 재편되기 전, 경인방송(iTV) 주최의 스타리그 랭킹전과 신인왕전에서 홍진호가 한 차례씩 우승했다는 사실은 경인방송이 티브이 방송을 중단하면서 스리슬쩍 무시당했다. 홍진호의 ‘폭풍저그’ 스타일이 사실은 공격과 생산을 병행하기에 최적화된 비율을 정확히 계산해낸 고도의 지능 플레이라는 사실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았으며, 그가 저그 종족이 상대하기 까다로운 테란 종족에 맞서 7할이 넘는 승률을 보유한 경이로운 게이머라는 사실은 ‘그래 봐야 2인자’라는 비아냥 앞에서는 묵살되곤 했다.

어떤 일화들은 전혀 무시당할 일이 아님에도 무시당했다. 2003년 마이큐브 스타리그 8강전, 패색이 짙던 경기 중 서버 오류가 일어나 재경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자 홍진호는 단호히 기권패를 선택했다. 경기 외적인 요소로 이득을 보느니 차라리 경기의 흐름대로 자신이 기권패를 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거저 온 기회를 차버린 그의 행동에 적잖은 이들이 감동하고 홍진호의 팬이 되었지만,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은 ‘명색이 승부사이면서 승리에 대한 의지가 부족하다’며 다시 손가락질을 했다.

물론 이제 와 돌아보면 그 모든 것은 홍진호가 우승하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던 팬들의 애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커리어 내내 그를 따라다닌 ‘2인자’라는 낙인과 세상의 비아냥 앞에서도 홍진호는 자신의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전진했고, 꼼수나 변칙 없이 수 년간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는 우직함은 우승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도 등 돌린 이들을 다시 돌려 세우는 힘이 있었다. 인터넷에서 홍진호를 놀리는 것과 그를 칭송하는 것은 점점 구분이 안 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는 팬들뿐 아니라 스타크래프트를 모르는 이들 사이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2인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 역설적인 별명은 그런 기묘한 애증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홍진호만이 얻을 수 있는 칭호가 되었다.

그가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에서 은퇴하고 난 뒤 출연한 티브이엔(tvN) 서바이벌 프로그램 <더 지니어스 - 게임의 법칙>(2013)에서, 그는 처음부터 눈에 띄는 참가자는 아니었다. 십수명의 플레이어들이 서로 연합을 맺고 정치력을 발휘해가며 경기를 치러야 했던 초반 경기에서, 반평생을 개인전에 최적화된 세계에서 보낸 홍진호가 두각을 나타내는 걸 기대하긴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러나 김구라와의 일대일 인디언 포커 게임에서 스무 장의 카드를 외워버려 극적인 승리를 거머쥔 6회와, 남들이 모두 승부를 운에 맡기는 동안 카드 뒷면의 패턴을 분석해 자신에게 유리한 조합을 읽어내 전광석화처럼 우승을 거머쥔 7회를 기점으로 상황은 바뀌었다.

스타크래프트에 애정을 붙이는 데는 끝내 실패했기에 승부사로서의 그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었던 나는, 비로소 홍진호가 싸움에 임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완벽하게 게임을 이해할 때까지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신중함, 그러나 이해가 끝난 순간 귀신같이 필승법을 유추해 유유히 승리를 거머쥐는 속공. 왕년의 팬들은 홍진호의 전성기 때 경기를 보는 것 같다며 환호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홍진호의 매력은 이제 스타크래프트의 세계 너머에 살던 이들까지 매료시키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패배와 추악한 승리’라는 모토를 내걸고 폭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술수를 인정하는 <더 지니어스>의 세계는 미묘하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를 닮았고, 신념을 지켜가며 재능 하나로 승리를 거둔 홍진호는 한번쯤 현실 세계에서도 보고 싶었던 영웅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다.

그가 쇼의 최종 우승을 거머쥐고 “내가 해왔던 길들이 절대 틀린 게 아니다”라고 말했을 때, 혼자 티브이를 보던 나는 남몰래 울었다. 아마 나 혼자만은 아니었으리라. 그것은 반칙과 편법을 쓰지 않고도,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지 않고도 자신의 방법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도덕책에나 나올 뿐 더이상 아무도 진심으로는 믿지 않는 이야기가 현실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누군가는 고작 ‘바보상자’를 보고 울 건 또 무어냐고 하겠지만, 오랜 시간 2인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팬들이 사랑해준 자신의 스타일을 끝내 바꾸지 않던 이 고지식한 사나이만이 줄 수 있는 종류의 카타르시스는 결코 작지 않았다.

시즌 2인 <더 지니어스 - 룰 브레이커>(2013~ )에서 그가 탈락하는 순간 더 많은 이들이 홍진호를 입에 올린 것 또한 그 신념 때문일 것이다. 참가 플레이어들의 연합과 반칙성 플레이는 시즌1 때보다 더 심해지고, 시청자들이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들이 속출하는 논란의 한가운데에서, 홍진호는 자신의 방식을 고수한 끝에 패배했다. 홍진호는 다른 이들의 경기 스타일에 대해 징징거리는 대신 늘 그랬던 것처럼 “내가 그런 플레이에 동의하지 않을 뿐, 그(연합과 권모술수) 역시 게임의 일부”라고 담담히 말했고, 상대방이 올인을 걸어오자 그에 응수하며 전력으로 게임에 임했다. 그에겐 우승보다 경기에 임하는 자신의 신념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함께 쇼에 출연한 이상민의 말처럼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적당한 반칙과 권모술수는 오히려 권장되며, 그러지 못하는 이들은 오히려 바보 취급을 당하는 세상 아닌가. 그가 탈락한 지금도, 사람들은 ‘추악한 승리’가 아닌 ‘아름다운 패배’를 선택한 바보 홍진호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침내 사람들이 그의 우승 여부가 아니라 그가 지키고 싶었던 원칙과 신념에 주목한 것이다. 세상이 다시 한번, 바보에게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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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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