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시모어 호프먼이 지난 2일 47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사진은 논픽션 <인 콜드 블러드>를 쓴 소설가 트루먼 카포티의 전기영화인 영화 <카포티>에 출연했던 모습으로, 그는 이 영화로 2006년 제78회 미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유나이티드아티스츠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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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세상엔 이름만으로도 기억되는 배우들이 있고, 꼭 그렇지만은 않은 배우들이 있다. “어느 작품에서 이러저러한 역할로 출연했던 그 배우 말입니다”라고 설명을 붙여주었을 때 그제야 “아, 맞다. 그 배우!”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물론 모든 배우들이 톰 크루즈나 말런 브랜도처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어 범세계적 스타덤에 오를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게 꼭 유명세나 스타 비즈니스만의 문제일까? 한 배우에 대한 관객의 인지도와 이미지는 관객들의 세대나 취향, 영화 관람의 경험치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본 기억이 있는 관객들에게 피터 오툴은 은막 위의 스타겠지만, 요즘 관객들에겐 “<트로이>에서 프리아모스 왕으로 나온 할아버지”라고 부가설명을 해야 하는 이름이 되었다. 영화의 세계는 광대무변하고, 보통의 관객들이 일생 동안 볼 수 있는 영화의 수는 한정되어 있다. 그 안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려면 우린 이렇게 공통분모를 찾는 수고로움을 감내해야 한다. 그렇다면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어떤 이에겐 낯선 이름이겠지만, 그렇다고 그를 설명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 이들이라 해도 세대와 취향을 막론하고 한번쯤은 그를 본 적이 있을 테니까. 포르노 스타 더크 더글러에게 충동적으로 사랑 고백을 하고는 “이 병신 같은 새끼”라며 자학하던 <부기 나이트>(1997)의 더스티나, 어린아이를 성추행했다는 의심을 받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다우트>(2008)의 플린 신부에게서, 우리는 상처받기 쉬운 나약한 인간을 연기하는 그를 보았다. 그래도 기억이 안 난다면 블록버스터 영화로 넘어가보자. 냉혹한 게임메이커 헤븐스비로 나왔던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2013)나, 톰 크루즈를 궁지로 몰아넣는 능란한 악당 데비언을 연기한 <미션 임파서블 3>(2006)에서 우린 존재만으로도 화면을 얼어붙게 만드는 그를 목격한 바 있다. 영화를 안 본 지 20년이 넘어가는 나이 든 관객이라면 이렇게 설명해보면 어떨까. 알 파치노의 탱고 신으로 유명한 영화 <여인의 향기>(1992)에서, 교장의 차에 페인트를 뿌려놓고서는 그 사실을 무마하기 위해 주인공을 회유하는 느물거리는 부잣집 도련님이 바로 호프먼이었다고.배역과 자신 동일시한
메소드 연기의 달인
조연이든 주연이든
창의적으로 인물 드러내
영화마다 다른 색깔 연기
호프먼! 당신은 아름다웠소
짧게 적어본 리스트에서도 알 수 있듯, 호프먼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종류의 배우다. 흔히들 메소드 연기(극중 인물에 몰입하기 위해 배우 자신과 인물을 동일시하는 극사실주의 연기법)를 하는 연기자들이 작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고는 하지만, 호프먼은 그 격차가 유달리 컸다. 호프먼은 천사의 얼굴로 자신이 간병하는 노인 환자의 혈육을 찾아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간호사를 연기하다가도(<매그놀리아>, 1999), 바로 같은 해 찍은 작품에서 안하무인하고 게으른 부잣집 도련님의 얼굴로 돌변한다(<리플리>, 1999). 중저음의 목소리와 두툼한 살집, 큰 체구가 그나마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생각한 순간, 체중을 18㎏이나 감량하고 새된 목소리와 단신의 소유자인 트루먼 카포티로 변신한다(<카포티>, 2006). 섬세하고 선이 고운 연기가 트레이드마크라고 생각할 무렵, 폰섹스 업체를 운영하는 서늘한 악당 ‘매트리스 맨’의 얼굴로 등장해 관객의 뒤통수를 때린다.(<펀치 드렁크 러브>, 2002)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한 발짝 멀어지는 배우, 호프먼은 그런 배우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한번쯤 호프먼을 보았음에도 스크린 위의 그가 매번 낯설게 느껴지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배우는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배역을) 평가하거나 정의 내리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한 정직하고 인상적으로, 그리고 창의적으로 인물을 연기할 뿐이다.” 그의 말처럼, 호프먼은 종종 단순한 연기를 넘어서 그 배역을 온전히 살아내는 경지를 보여준다. 호프먼은 <마지막 사중주>(2012)의 바이올리니스트 로버트 역을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바이올린을 배웠고, <카포티>를 찍을 때에는 촬영이 끝난 뒤에도 일상으로 돌아오는 대신 카포티로 머물렀다. “물건을 사러 가게에 가는 것조차 두려웠다. 이 영화는 꼭 운동 경기와도 같아서, 달리던 도중 멈췄다가 다시 뛰기란 힘들다. 만일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다시 카포티로 돌아오는 데 엄청난 에너지를 써야 할 것이 자명했다.” 심지어 그는 <인 콜드 블러드>를 쓰기 위해 살인범 페리 스미스에게 접근해 선의를 가장한 착취를 일삼은 트루먼 카포티의 삶에 대해 어떠한 개인적 판단도 내리지 않았다. 그는 대신 대본에 쓰여 있는 카포티의 시야 안에서만 머무르는 쪽을 택했고, 덕분에 관객은 러닝타임 내내 카포티를 사랑해야 할지 경멸해야 할지 내내 헷갈리며 결말까지 끌려간다. 호프먼을 쉽게 정의 내리기 어렵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배역의 크고 작음과 상관없이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역이라면 가리지 않고 출연했다는 점이다. <카포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사람들은 연기파 배우로만 평가받던 그가 마침내 스타의 후광을 얻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에도 조연의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의 게임 메이커 헤븐스비는 분명 강한 인상을 남기는 역이었지만 주연을 더 빛나게 해주는 조연이었고, <머니볼>(2011)의 야구감독 아트 하우는 구단주 빌리 빈(브래드 핏)과 피터 브랜드(조나 힐)가 얼마나 탁월하게 구단을 일으켜 세우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대조군에 가까운 배역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조연을 연기할 때, 주연의 몫을 빼앗아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맡은 역을 풍부하게 연기할 줄 알았다는 점이다. 영화 전문지 <씨네21>은 2013년 초 아카데미 시상식 전망 특집에서, 남우조연상 부문에 <마스터>(2012)의 호프먼을 지지하며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억지를 좀 피우자면 그가 <링컨>의 병사 중 하나로 나왔건 <레 미제라블>의 시민 중 하나로 나왔건 그에 상관없이 우리는 그를 택했을지도 모른다. 호프먼은 단지 영화 속 인물이 되는 게 아니라 영화 속에 있는 또다른 한 세계가 되곤 하기 때문이다.” 자, 다시 한번 호프먼을 설명해보자. 작품마다 배우 본인의 아우라가 아니라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의 아우라로 화면을 가득 채우던 변화무쌍한 배우. 단독 주연과 앙상블 연기, 심지어는 <거짓말의 발명>(2009)의 카메오 연기까지 넘나들며 주연과 조연의 분류를 무색하게 한 배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해 명실공히 할리우드의 스타 대열에 합류한 다음날 아침에도,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걸어서 학교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 이웃들의 하이파이브를 받으며 귀가한 평범한 남자. 이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배우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어떤 이는 그를 “배우들의 배우”라고 부르고, 어떤 이는 그를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미국 배우”라고 이야기했다지만, 어쩌면 그런 수식어들로 호프먼을 호명하는 건 조금은 시시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떤 수사로도 온전히 설명하거나 찬사를 바치는 게 어려운 무언가와 마주했을 때, 우리는 종종 그저 고유명사로 그 대상을 지칭하곤 한다. 비틀스가 비틀스이고, 시나트라가 시나트라인 것처럼. 그렇다면 호프먼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하는 게 가장 적절할 것이다.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필립 시모어 호프먼이라고.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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