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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28 19:25 수정 : 2015.10.23 14:36

한국방송 <해피 선데이> ‘1박2일’에서 김주혁은 잘생긴 외모와 달리 빈틈 많은 친근한 동네 형 또는 오빠 이미지로 다가온다. 짜증도 잘 내고 투덜거리고 장난기 많은 김주혁의 편안한 모습이 ‘1박2일’의 인기를 되살렸다는 평가다. 한국방송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이 남자는 도대체 어디까지 자기 자신을 내려놓을 셈인가. 나와 내 주변의 이들은 요즘 모였다 하면 김주혁 얘기다. 한국방송(KBS) <해피 선데이> ‘1박2일’(이하 <1박2일>) 시즌 3에 합류한 이후로, 김주혁은 연일 대중이 미남 배우에게 기대할 법한 요소들을 무참히 깨부수고 있다. 원래 <1박2일>이 힘들고 배고프고 그래서 절박한 프로그램이라고는 하지만, 김주혁은 좀 다르다. 본인 입으로도 이미 “난 바닥 쳤어”라고 이야기한 바 있지만, 모든 걸 내려놓고 망가지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 복잡한 심경으로 몰아넣는 구석이 있더란 말이다.

‘먹다가 떨어뜨린 음식은 선착순으로 주워 먹는 사람이 임자’라는 조건이 내걸린 밥상, 김주혁은 남들이 흘린 낙지 다리에 주저없이 손을 뻗는다. 그래도 방바닥에서 입으로 바로 직행하면 깔끔한 편이지. 정준영이 맨손으로 주워 먹다가 뜨거워서 놓친 전복을 차태현이 다시 주워 반절을 먹고, 나머지 반절을 김주혁의 입에 넣어주는 장면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얼핏 보면 어디가 이상한지 모르고 지나갈 지경이다. 이지적인 눈매와 귀공자풍의 외모, 슈트핏이 완벽하게 떨어지는 몸을 지닌 이 댄디한 배우는, <1박2일> 합류 3개월 만에 어딘가 억울하고 맹해 보이는 눈매와 어지럼증을 견디지 못하는 어르신의 육체를 지닌 구시렁 대마왕으로 변해 있었다.

‘1박2일’서 완벽히 망가진 김주혁
미남배우 어느새 ‘구시렁 대마왕’
티브이에선 영웅역 많이 했지만
영화선 주로 못난 ‘소심남’ 역할
완벽하지 않아도 친근한 매력이
휴 그랜트로 호명되는 진짜 이유

똑 떨어지는 서울 말씨와 점잖은 어조로 툭하면 “젠장”이라고 욕설을 내뱉는 남자. 연말 시상식장에서 대상 수상자 김준호가 자신들을 언급하지 않자, “삐 처리”로 멘트를 지워줄 것을 요구하며 “정말 가오가 이빠이 떨어졌어”라고 거친 소감을 피력하는 배우.(<1박2일> 제작진은 “삐 처리”로 멘트를 지워주는 대신, 굳이 “정말 품위가 가득 손상됐어”라는 자막을 달아 멘트의 저렴함을 한층 더 강조했다.) 멤버 전원이 짜고 자신을 몇 차례나 반복해서 속여도 그 사실을 눈치 못 채는 굴욕을 당하는 맏형. 길거리에서 마주친 시민들이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상황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데뷔 16년 차 스타. 김주혁을 좋아하던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낄낄 웃다가도, 김주혁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저 연기 계속할 수 있겠죠?”라고 말할 때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글쎄요. 저도 그건 아직 확신이 서진 않는데요.

그런데 가만히 그의 필모그래피를 되짚어보다 보니, 이런 모습이 꼭 낯설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가 김주혁을 사랑했던 건, 그가 허우대는 멀쩡해도 결국 내용물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자라서가 아니었을까. 아마 이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사람들이 있을 테다. 티브이 드라마 속에 비친 그의 모습은 대체로 이지적인 주인공이거나 영웅이었으니까. 제일 최근작인 문화방송(MBC) <구암 허준>(2013)의 의성 허준이나, 가장 비천한 노비의 자리에서 고려 무신정권의 정점을 향해 올라가는 <무신>(2012, 문화방송)의 김준, 에스비에스(SBS) <떼루아>(2008)의 까칠한 와인전문가 강태민, 대통령의 딸과 로맨스를 일궈가는 <프라하의 연인>(2005, 에스비에스) 속 강력계 형사 최상현까지. 티브이로만 김주혁을 접해왔던 사람들이라면 그를 근사한 외모와 냉철한 성격, 선량한 의지를 지닌 멋진 주인공으로만 기억할 것이다. ‘한국의 휴 그랜트’라는 별명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필모그래피의 나머지 절반인 영화를 살펴보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영화로 넘어오면, 김주혁은 자주 허우대‘만’ 멀쩡할 뿐, 못나고 유별난 남자를 연기해왔다. 7년간 짝사랑해온 여인과 키스할 수 있는 타이밍에서조차 특유의 소심함 탓에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는 데 그치는 궁극의 소심남 광식(<광식이 동생 광태>, 2005)이나, 변변한 직업 없이 동네 대소사에 수저를 얹어 먹고 사는 괴짜 홍두식(<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2004) 정도는 양반이다. 집시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아내에게 이끌려 억지 춘향으로 팔자에도 없는 일처다부제를 받아들이고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덕훈(<아내가 결혼했다>, 2008)은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찌질함과 무력함으로 남성 관객들을 악몽으로 몰아갔다. 오죽했으면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배우가 제 입으로 직접 “잘못하면 병신, 제대로 해도 병신 소리 들을 게 뻔한 역할”이라고 이야기했을까. 최근 작인 야구영화 <투혼>(2011)조차 퇴물 투수 윤도훈이 연일 터뜨리는 사건사고로 2군으로 방출되고 집에서도 쫓겨나는 지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니, 말 다 했지.

어쩌다가 근사한 배역으로 나오는 작품들에서도, 김주혁이 맡은 인물들은 어딘가 한구석씩 모자란 부분이 있었다. 조국이니 민족이니 그런 거엔 관심 없고, 한번 사는 인생 허랑방탕하게 살겠다는 <청연>(2005)의 무사태평 기상장교 한지혁이나, 좋아하는 여인에게 제 마음을 표출할 기회를 얻지 못해 뒤에서 진땀을 빼는 <적과의 동침>(2011) 속 인민군 장교 김정웅도 전형적인 주인공 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남성 순애보의 정점을 찍은 작품 <방자전>(2010)의 방자조차,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호색가 마 노인(오달수)에게 배움을 청하는 대목에선 진지하게 망가진다. 남자가 진지한 자세로 찌질하면 얼마나 웃길 수 있는지. 적어도 영화 속에서만큼은, 김주혁은 냉철하고 이지적인 남자주인공보다는 소심하고 찌질해서 실수를 연발하거나 혼자서 속앓이를 하는 평범한 남자주인공으로 더 많이 사랑받았다.

이렇게 꼼꼼하게 그의 작품 연표를 살펴보다 보면, ‘한국의 휴 그랜트’라는 별명이 지니는 의미도 조금은 다르게 해석된다. 그리스 석고상처럼 생긴 외모 때문에 종종 간과되곤 하지만, 휴 그랜트가 로맨틱 코미디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게 된 비결은 ‘잘생김’이 아니라 ‘친근함’이었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1994)에서 엉망진창 횡설수설의 고백을 해놓고선 “말했다는 거 자체가 중요하죠”라고 말하며 보는 이들의 복장을 터지게 하는 찰리나, 사랑에 빠진 톱스타를 보기 위해 경마 잡지 기자를 사칭해 인터뷰 장소에 들어가 엉뚱한 질문만 늘어놓는 <노팅힐>(1999)의 윌리엄 역시 소심하고 찌질하고 못난, 그래서 평범한 사내들이었으니 말이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이런 친근하고 평범한 사내들이 사랑받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불꽃같은 로맨스 장르에서는 생애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주인공들을 보며 본격적인 판타지를 소비하지만,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는 ‘나에게도 이런 사랑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손에 잡힐 듯한 판타지를 소비한다. 남자들은 자기 자신을 쉽게 대입해 볼 수 있고, 여자들은 자기 주변에도 그런 남자가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볼 수 있는, 그래서 잘생겼지만 완벽하진 않고 소심하지만 미워할 수는 없는 남자. 김주혁의 필모그래피 절반을 차지하는 티브이 드라마 속 완벽한 도시남자나 입지전적인 영웅의 반대편에, 스크린 위의 소심하고 엉뚱한 평범한 남자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남자. 사실은 이것이 김주혁이 ‘한국의 휴 그랜트’로 호명되곤 했던 진짜 이유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그렇다면 <1박2일>에서 시민들이 김주혁을 알아보고도 금방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는 상황도 그렇게 이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그는 여느 동네에 있을 법한 수준의 외모를 지닌 사람은 아니지만, 마치 원래 그 동네에 살았던 청년처럼 친근한 인상을 지니고 있으니까. 김주혁이 툭하면 동생들에게 속는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거나, 매번 혼자 구시렁거리고 구석에 움츠러든 모습도 이렇게 꼼꼼히 따져보니 익숙한 모습이다. 굶주림에 지쳐 방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냉큼 주워 먹는 절박함이나, 반찬을 얻어먹으려 노래방 기계 마이크를 붙잡고 한 곡조를 뽑아 올리는 경박함도 아주 낯선 면모는 아니다. 그러니 그가 과연 다음 작품을 할 수 있을지, 그나 팬들이나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 근사한 외모 탓에 잠시 간과되었지만, 우리가 사랑했던 김주혁은 원래 그렇게 소심하고 평범한, 우리 곁에 하나쯤 있을 법한 남자였으니까.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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