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률이 중요한 방송 환경 특성상 트렌드를 기민하게 읽어내고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드라마에서 ‘음모론’과 ‘정부에 대한 불신’을 주로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에스비에스 수목드라마 <쓰리데이즈>에서 암살당할 뻔한 대통령 역의 손현주. 에스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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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쓰리데이즈’ ‘신의 선물’ ‘정도전’
권력과 정치 추악한 모습 드러내
TV는 대중의 불안과 욕망 투영
현실의 정치가 TV 속 초상 낳아
용의자 호송 중이던 경찰 차량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도로를 이탈해 전복된다. 그 틈을 타 유력한 연쇄살인 용의자 차봉섭(강성진)이 도주하고, 그를 어떻게든 잡아야 하는 해결사 기동찬(조승우)은 이를 악물고 그의 뒤를 쫓는다. 그때 등장한 오토바이를 탄 의문의 남자가 야구 방망이로 차봉섭을 가격해 죽인다. 뒤따라온 경찰의 사격에 쓰러진 의문의 남자는 알고 보니 연쇄살인의 희생양이었던 여인의 유가족 한기태(곽정욱)이고, 진범으로 추정되는 누군가로부터 차봉섭을 죽이라는 청탁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갈수록 꼬여만 가는 사태 앞에 시청자들이 골머리를 앓을 때쯤, 화면은 그동안 한 것 없이 무력하게만 있던 청와대로 넘어간다. 이 복잡한 사태 앞에서 대통령(강신일)과 그 참모들이란 사람이 한다는 이야기는 고작 이 수준이다. “경찰에 한기태씨 신원 감춰달라고 요청했느냐”, “그냥 몇 놈만 본보기로 사형시킵시다. 그러면 여론도 (움직일 것)”. 꾸준히 ‘강력한 대한민국’이라는 슬로건 아래 사형제도 부활을 부르짖던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연쇄살인 사건조차 정국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끌고 올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긴다. 에스비에스(SBS) 월화드라마 <신의 선물-14일>(2014)에서 그려지는 국가의 초상은 이리도 무능하고 음흉하다.
요일을 바꿔서 이번엔 수목. 휴가를 즐기던 이동휘 대통령(손현주)을 누군가 암살하려 든다. 이 음모를 사전에 감지한 대통령 경호관 한태경(박유천)은 대통령 전용 별장 청수대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리려 하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내부 정보를 저격범에게 알려주었다는 누명을 쓴 채 쫓기는 신세가 된다. 진상을 뒤쫓아가다 보니 진짜 저격범은 경호실장 함봉수(장현성). 몇 화에 걸친 소동 끝에 저격범 함봉수는 사살되었지만, 사태는 더 복잡해질 뿐 명쾌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과거 미국 군수산업체 팔콘의 컨설턴트로 일하던 이동휘는, 한국에 무기를 팔기 위해 팔콘을 대신해 한국의 고위 공직자들에게 북한 인민무력부를 매수해 무장공비사건을 일으키자는 제안을 건넨다. “인명피해는 없을 것”이라는 달콤하고도 안일한 기획은 대규모의 민간 사상자와 군 사상자를 남기고 끝났고, 이동휘에게 매수되었던 이들은 이제 국정원장, 합참의장, 여당 대표가 되어 과거 사건의 전모를 캐려던 이동휘 대통령을 침묵시키기 위해 암살을 기획한다. 거대 군수산업체의 개로 살았던 과거를 지닌 대통령과, 그런 대통령을 침묵시키기 위해 대통령 암살까지 서슴지 않는 권력자들. 에스비에스 수목드라마 <쓰리 데이즈>(2014)가 그리는 대한민국 또한 겨 묻은 개와 똥 묻은 개들의 싸움으로 얼룩져 있다.
최근 들어 인기를 끌고 있는 일련의 드라마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이 ‘음모론’과 ‘정부에 대한 불신’이라는 점은 예사롭게만 볼 일은 아니다. 물론 누군가는 “에스비에스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설립된 민영방송이다. 민영방송이 돈을 벌기 위해서 못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라고 반론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디 공영방송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를 볼까? 요새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방송(KBS) 대하사극 <정도전>(2014)을 한번 볼작시면, 어이쿠, 여말선초가 배경이다. 왕은 폭군이고, 그 밑에서 국정을 돌보는 권신이라는 작자들은 백성이 굶어 죽어가고 있어도 제 사욕을 챙기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애꿎은 백성들과 입바른 소리를 하던 관리들은 이상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픽픽 죽어나간다. 게다가 극 중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권신 이인임(박영규)이 실각하는 계기는, 공교롭게도 정국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역모’를 ‘조작’한 사건이다. 어떤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몇 가지 키워드들이 있지 않은가?
본래 티브이 쇼는 다른 여타 장르의 예술들에 비해 당대 대중의 불안이나 욕망을 가장 빠르고 민감하게 반영한다. 작품성만큼이나 시청률이 중요한 방송 환경 특성상, 트렌드를 기민하게 읽어내고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야 했던 시절, 문화방송(MBC)의 <21세기 위원회>(1998), <칭찬합시다>(1999), <느낌표>(2001) 등의 ‘공익예능’은 우리 주변의 착하게 사는 사람들을 찾아 칭찬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손을 내밀며 ‘더 따뜻한 세상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그러나 아이엠에프 체제가 끝나도 소득 양극화와 신자유주의 드라이브 탓에 일반 서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고, 그리하여 ‘나라는 망한 걸 딛고 일어섰을지 몰라도 내가 망한 건 회복이 안 된다’는 것이 확실시될 무렵부터 티브이는 독해지기 시작했다. 문화방송 <무한도전>의 초창기 모토는 ‘무한이기주의’였고, 한국방송 <해피 선데이-1박2일>의 캐치프레이즈는 “나만 아니면 돼”였다. 온갖 쪼잔하고 비루한 욕망들을 여과 없이 대중 앞에 펼쳐 보이던 박명수와 김구라가 대중의 열광을 얻기 시작했다. 드라마라고 달랐으랴. ‘막장 드라마’ 장르가 아침 드라마라는 게토를 벗어나 일일 연속극, 나아가 미니시리즈까지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2014년 현재, 대중의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일련의 드라마들이 모두 권력과 정부에 대한 환멸과 불신, 그리고 음모론을 담고 있다는 점 또한 현실의 반영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단순히 ‘불온한 사상’에 물든 일부 작가들의 문제라고 하겠지만, 드라마가 그리는 세계관을 시청자들이 무난하게 공유할 것이라는 확신 없이는 드라마가 투자를 받고 편성을 받는 일 또한 어려우니까 말이다. 그렇게 치밀하게 검토되어 제작되고 방영되고 있는 오늘날의 드라마 속 풍경은 어떤가. 권력자들은 사건을 기획, 조작하거나(<정도전>), 특정 사건을 빌미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국을 조성하려 들고(<신의 선물-14일>), 더러운 과거와 얽힌 복잡한 정국을 적당히 윤색해 진실을 은폐하려 든다(<쓰리 데이즈>). 드라마 속 진짜 저격범, 진짜 연쇄살인마, 진짜 국가내란죄를 저지른 이들은 따로 있다. 진실을 밝히려고 발버둥치는 이들은 음모에 가로막혀 저지당하거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싸움을 외롭게 헤쳐나가야 한다. 이 끔찍한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한 한국인들이 널리 공유하고 있는 권력과 정부에 대한 인식과 맞닿아 있다.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정도전> 속 이인임은 정계에 떠오르는 신예 이성계(유동근)를 꺾어 놓기 위해, 측근 임견미(정호근)를 시켜 미륵신앙을 고수하는 이들을 고문해 “이성계로부터 자신을 미륵으로 떠받들라는 청탁을 받았다”는 거짓 자백을 받아낸다. 이를 보며 국가정보원 산하 중앙합동신문센터 조사관들이 유가려씨에게 폭행, 협박, 회유를 가한 끝에 오빠 유우성씨가 간첩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낸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건 어색한 일이 아니다. <신의 선물-14일> 속 정부가 내부의 적(강력범죄)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무능함을 감추고 사형제도 부활을 통한 ‘강한 국가’ 프로파간다를 펼쳐 나가려는 모습 위에, 현실의 정부가 외부의 적(북한)과 내부의 적(종북세력)을 강조하며 정국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모습을 겹쳐 읽는 건 어렵지 않다. <쓰리 데이즈>에서 경호실장 함봉수가 정황증거들을 조작해 애꿎은 한태경을 대통령 시해범으로 몰아가는 과정을 보며, 위조된 중국 화룡시 공안국 출입경기록을 항소심의 증거로 제출한 검찰과 국정원을 연상하게 되는 건 딱히 시청자가 좌익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월화수목을 넘어 주말까지, 티브이가 온통 권력과 정부에 대한 환멸과 불신, 조소로 가득 찬 건 “문화예술계가 죄다 좌파들의 판이어서”가 아니다. 해소되지 않는 의문과 권력자들의 석연찮은 움직임이, 이 모든 환멸과 불신을 낳은 것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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