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홍석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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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여기 모인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죠. 우린 모두 동성애자입니다. (중략) 제가 곧잘 하는 ‘의무적인 동성애자 농담’입니다. 뭔가 동성애자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거든요. 안 그랬다간 누군가는 이 공연장을 떠나면서 그럴 거거든요. ‘저 사람 오늘 아무 말도 안 했어. 더 이상 우리의 리더가 아니야!’” 미국의 유명 스탠드업 코미디언 엘런 디제너러스가 자신의 코미디 쇼 <히어 앤 나우>(2003) 공연 오프닝에서 던졌던 농담이다. 물론 반쯤은 농담이었겠지만, 1997년 자신이 레즈비언이란 사실을 커밍아웃한 후 엘런 디제너러스는 미국 레즈비언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아이콘 같은 존재가 되었다. 정상의 위치에 서 있는 코미디언이 커밍아웃을 하고, 그로 인해 한 차례 커리어가 붕괴되었다가 재기하는 일련의 서사는 그 시절 미국에서도 꽤나 극적인 일이었으므로. 문제는 그러면서 잠시나마 그의 재능이나 매력보다 그의 성 정체성만이 부각되는 시절이 있었다는 점이다. 대중이 그를 인식하는 순서가 ‘코미디언인데 레즈비언’인 것이 아니라, ‘레즈비언인 코미디언’으로 굳어질 뻔했던 것이다.
영국의 유명 배우 이언 매켈런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마거릿 대처 행정부가 ‘섹션28’ 입법으로 동성애에 대한 공론을 범죄로 규정하려 들었던 1988년, 그는 영국 <비비시>(BBC)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게이임을 커밍아웃하고 본격적으로 게이 인권운동을 시작했다. 세간의 관심이 온통 그의 성 정체성에만 쏠렸던 그 시절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게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내가 게이일 뿐 아니라 배우라는 사실을 신문에 투고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할 정도였다. 커밍아웃, 커밍아웃, 커밍아웃. 내가 한 건 그것뿐이다. 묘비에다 써넣기라도 해야겠군.” 뒤집어 생각해보면 좀 우스운 일이긴 하지 않은가. 이성애자 배우나 이성애자 코미디언을 보면서 그들의 재능이나 경력 이전에 그들의 성적 지향부터 관심을 가지는 이는 별로 없는데, 성 소수자인 연예인들을 보면서는 그들의 성적 지향을 다른 모든 가치보다 먼저 보게 되다니 말이다. ‘연예계 1호’ 커밍아웃 13년 만에야
대중들은 그에게 익숙해졌다
성 정체성에 대한 관심 여전하지만
홍석천은 ‘게이 농담’ 밀어붙여
그 농담마저 흔하게 만들어버렸다
성 정체성은 홍석천의 배경일 뿐
그 위에 새로운 그림 가능해져
드디어 정극서 무거운 역할 맡아
배우로서의 길 제대로 걷고 있다
2000년 커밍아웃을 한 뒤 지금까지 ‘한국에서 커밍아웃을 한 유일한 연예인’으로 살고 있는 홍석천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2010년 법무부 정책 블로그 기자가 그를 인터뷰하러 가서 던진 “꿈이 무엇이냐”는 마무리 질문에, 홍석천은 잠시 고민하다 이렇게 답을 했다. “이런 인터뷰를 안 하는 거요. 내가 ‘동성애자 홍석천’이 아닌, 그냥 ‘인간 홍석천’으로 인정받는 거요. 말하고 나니 조금 슬프네요?” 사실이 그랬다. 그에게 돌을 던지는 이든 응원을 하는 이든, 그가 어떤 매력을 가진 배우였고 얼마나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는지 기억하기보단 먼저 ‘연예인 커밍아웃 1호’로 그를 소비했다. 그가 커밍아웃하기 전에는 대중이 ‘배우 홍석천’은 보되 ‘동성애자 홍석천’은 보지 못했다면, 그가 커밍아웃하고 난 뒤에는 오랫동안 ‘동성애자 홍석천’은 보았으되 ‘배우 홍석천’은 보지 못했던 셈이다. 커밍아웃 이전에도 이미 연기로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받은 이언 매켈런과 비교를 하는 것은 조금 반칙 같지만, 이언 매켈런이 커밍아웃 이후에도 다양한 배역을 맡아 활동했던 것과는 달리 홍석천은 커밍아웃 이후 커리어가 끊기다시피 했다. 커밍아웃 이전 ‘1년 정도 일이 없을지 모른다’고 각오했던 그였지만, 그가 김수현 작가가 집필한 에스비에스 드라마 <완전한 사랑>(2003)으로 안방극장에 돌아올 수 있기까지는 3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그가 티브이에 나오지 못하던 그 시절, 그를 섭외했던 몇 편의 영화들은 홍석천에게 뻔한 게이 스테레오타입 캐릭터를 요구했고, 완성도 또한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를 섭외하는 사람들이나 그를 보는 사람들이나, 많은 이들이 “여자처럼 입고 여자처럼 이야기하는” 게이에 대한 뻔한 편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인물로 분하는 것이 직업인 배우에게 이미지의 고착은 사망선고와도 같았다. “그런 역만 할 수 있다고 인식되고 싶지 않았다. 그거 아니면 내가 배우로서 밥줄 끊긴다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홍석천은 많은 출연제의를 고사했고, 그러는 동안 배우로서의 그는 점점 잊혀 갔다. 수많은 활동가들의 피나는 노력 끝에 한국에 성 소수자 담론이 조금씩 퍼져나가면서 그에 대한 이유 없는 공격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성 정체성에서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지가 좋아져봐야 “용기 있게 성 정체성을 고백하고, 열심히 성 소수자들을 위해 인권운동을 한 사람”으로 좋아지는 거지, 본업인 배우로서의 이미지가 좋아진 건 아니지 않은가. 사람들의 견고한 편견과 마주한 홍석천이 선택한 길은 차라리 그 편견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온 국민이 그가 게이인 것을 알고 있고 그를 볼 때마다 그의 성 정체성부터 먼저 떠올린다면, 연예계에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게이 농담을 던져 ‘성 소수자’라는 주제 자체를 익숙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는 대중의 편견 속에 있던 ‘끼 부리고 여자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이’라는 이미지를 적극 차용했고, 토크쇼에서는 여성 게스트들과 자연스레 스킨십을 하며 “너희는 이런 거 못 해도 나는 해도 괜찮아”라고 농담을 치기 시작했다. 잘생긴 남자 게스트에게 추파를 던지다가도, 못생긴 남자 게스트를 향해서는 “넌 내 취향 아니거든?”이라고 쏘아붙였다. 마치 남자 코미디언이 여자 게스트에게 추파를 던지는 게 어색하거나 낯선 일이 아니듯, 자신도 똑같다고. 다만 그 성별이 다를 뿐이라고. 대중이 그런 그의 농담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 농담이 흔해질 때까지 홍석천은 꿋꿋이 캐릭터를 밀고 나갔다. 지상파가 건드리지 못하는 소재를 찾던 케이블 예능 시장이 2000년대 중반 제일 먼저 그를 찾았고, 여러 게스트와 섞여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말을 섞을 수 있는 형식의 토크쇼였던 에스비에스 <강심장>이 그를 불러들였다. 2013년, 차례로 문화방송 <라디오스타>와 에스비에스 <힐링캠프>가 그에게 손짓을 했고, 그는 조금 더 진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칠 기회를 얻었다. 커밍아웃 후 13년 만에, 대중이 다시 그에게 익숙해졌다. 종합편성채널 제이티비시(JTBC)의 연애 토크쇼 <마녀사냥>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며 홍석천은 그 지점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마녀사냥>에서 그는 시청자들이 보내는 각종 연애 사연들에 대해 이성애자 남녀와는 다른 제3의 시선으로 답을 해준다. ‘당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설득해야 했던 시절이 지나고, ‘그런데 이런 건 좀 다름’을 대화 주제로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치 빌 코스비가 <코스비 쇼>를 통해 백인사회와 동화된 흑인가정을 보여주며 ‘우리도 당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던 것에서, 데이비드 샤펠이나 크리스 록 같은 후배 세대 코미디언들이 한발 더 나아가 흑인사회 특유의 문화를 보여주며 ‘그래, 우린 당신들과 다르다.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라고 강변했던 것처럼. 다른 게 있다면 그 동네에선 두 세대 정도의 연예인들이 겪었던 변화를 홍석천은 혼자 겪어냈다는 게 차이겠지만 말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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