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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18 19:30 수정 : 2014.04.20 14:54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진도 앞바다에서 청해진해운 소속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했던 지난 수요일, 한국은 위기관리 시스템에서 그 바닥을 드러냈다. 마지막 승객이 빠져나갈 때까지 배를 지킬 의무가 있는 선장은 승객보다 먼저 구조되었고, 조난 신고 또한 선원이 아닌 승객이 했으며, 제대로 된 구조작업은 신고 후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간신히 시작되었다. 경기도교육청은 오전 중에 “학생들이 모두 구조되었다”는 오보를 냈다가 이를 정정하며 사람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또한 구조자 수를 200여명이나 잘못 파악해 발표했다가 이를 정정했다. 심지어는, “배 안으로 산소를 투입하고 있다”던 해경의 발표마저 거짓말이었다. 사건만큼이나 참혹했던 것은, 갑작스런 재난 앞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모르는 한국의 위기관리 시스템이었다.

구조된 6살 아이에 “부모 어딨나”
실종자도 못 구했는데 보험 운운
‘단독’ ‘속보’란 이름의 경마보도
인간에 대한 예의는 실종됐다
방송은 정작 필요한 정보 대신
피해자 가족 비탄 집요하게 비춰
뉴스의 몰락 언론 스스로 초래

바닥을 드러낸 건 위기관리 시스템만이 아니었다. 언론 또한 앞다투어 제 밑바닥을 드러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실종되었고, 참혹한 비극을 가슴 아파하는 인간의 비통보다 시청률과 인터넷 기사 클릭 수를 높이려는 장사치들의 이문계산이 앞섰다. 클릭 수가 광고수익으로 이어지는 인터넷의 시대에는 인터넷 매체도, 종이 매체도, 뉴스통신사도, 방송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이티비시(JTBC)는 뉴스 진행자가 인터뷰 도중 구조된 학생에게 “친구가 죽은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물어 학생을 패닉 상태로 몰아갔고, 에스비에스(SBS)는 홀로 구출된 여섯살짜리 아이에게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고 물어 어린아이를 울렸다. 아직 수백명의 실종자들이 차디찬 바다에 갇혀 있는 시간, 엠비시(MBC)는 추후 보상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망의 경우 보험금을 얼마나 탈 수 있는지를 입에 올렸고, 와이티엔(YTN)은 방금 구조된 학생을 붙잡고 “아저씨라 생각하고 편하게 말하라”며 인터뷰를 강행하려 들었다.

이투데이나 스포츠서울 비즈포커스, 인터넷 조선일보와 같은 인터넷 언론들은 탑승객이 가입한 특정 보험상품을 소개하고, 거대 선박이 침몰하는 내용을 담은 영화를 소개하는가 하면, 급기야 특정 이동통신사의 광고 시그널 음악을 인용하며 간접광고에 나섰다. 뉴스 통신사 뉴시스는 사고를 당한 학생들이 다니던 고등학교로 쳐들어가 피해 학생의 노트와 소지품을 꺼내어 멋대로 사진을 찍어 송고했고, 연합뉴스는 응급처치를 받는 사람의 사진을 모자이크 없이 내보내는가 하면, 한 소속 기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같은 학교 친구들의 구조·사망 관련 소식을 전하느라 여념이 없는 고등학생에게 “혹시 배 안에서 친구들이 찍은 사진 없느냐”고 질문을 했다. 응당 사람이 있어야 할 사람의 자리에, 사람 대신 이빨을 드러낸 굶주린 개떼들만 우글거렸다.

물론 모든 뉴스에는 정보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유통기한이 있다. 남들보다 빨리 입수한 뉴스는 지식이 되고 정보가 되고 상품이 되며 권력이 된다. 그러나 경마하듯 앞다투어 ‘단독’과 ‘속보’를 내느라 사안을 신중하고 사려 깊게 접근해야 하는 기본을 어기는 순간, 뉴스는 아무리 기한을 잘 맞췄다 한들 의미 없는 어뷰징 덩어리로 전락하고 만다. 단독 인터뷰를 잡겠다는 욕심에 생존자들에게 무례를 범하는 기자들, 한참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이슈에 올라타 본질과는 거리가 먼 홍보성 내용을 끼워팔기하려는 기자들의 천태만상은 역설적으로 뉴스 자체에 대한 불신을 불러왔다. 사람들은 이제 뉴스가 아니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상에 떠다니는 풍문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다. 뉴스의 몰락을, 포털과 검색엔진에 잘 잡히게 제목을 자극적으로 뽑아 클릭 수에 기대려는 언론 스스로가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모든 매체가 비극을 그런 식으로 소비하고 끝낸 것은 아니다. 제이티비시는 손석희 사장이 직접 후배의 허물을 대신 사과하며 뉴스를 시작했고, 다른 방송사나 언론사들 중에도 오보나 자극적인 뉴스 등에 대한 사과의 뜻을 표한 매체가 있었다. 이런 악의적인 잘못을 피해가거나 교정하려 든 매체들조차 무신경한 실수를 피해가진 못했다. 지상파 3사의 뉴스는 물론 종편과 뉴스전문 채널들은 오열하는 피해자 가족들의 모습에 카메라를 바짝 들이댔다. 문화방송 <뉴스데스크>는 특집으로 편성된 2시간가량의 방송 동안, 비탄에 빠진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스케치만 여덟 꼭지를 다뤄 반복해서 틀어주었다. 문화방송만이 아니었다. 한국방송(KBS) <뉴스9>, 에스비에스 <8뉴스> 모두 가족들의 비탄에 카메라를 클로즈업했다. 세상을 다 잃은 것만 같은 슬픔과 분노에 잠겨 있는 이들의 비극이 상품처럼 전시되었다.

망자에 대한 예의도 지켜지지 않았다. 뉴스 앞머리 손석희 사장의 사과가 무색하게, 제이티비시는 숨진 고등학생의 모교를 찾아가 그 학생이 사용하던 책상을 찍은 화면을 내보냈다. 숨진 고등학생이 생전 얼마나 성실하고 착한 학생이었는지에 대한 리포트와, 마지막 순간까지 승객들을 구하다가 숨진 승무원이 평상시 “나이 어린 직원답지 않게 매사에 적극적이고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리포트가 뒤를 이었다. 와이티엔은 숨진 승무원의 가족관계와 경제사정까지 거론하며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는 멘트를 잊지 않았다. 망자에 대한 예의가 이 모양인데 구조된 이들에 대한 예의라고 다르지 않았다. 긴박했던 사고의 순간을 담은 동영상이나, 사고 순간 피해자들이 같은 반 친구들이나 집에 있을 가족들과 주고받았던 문자메시지, 스마트폰 메신저 프로그램의 대화는 고스란히 뉴스가 되어 전파를 탔다.

참상을 알리면서 비극의 심각성을 보는 이들과 공유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사람은 이성보다 감성에 먼저 설득되는 존재고, 비극의 심각성을 전달할 때 이런 ‘휴먼 스토리’나 ‘오열’에 집중할수록 보는 이들의 감성을 건드리는 건 수월해진다. 위기의 순간에도 서로를 챙기려 했던 학생들의 이야기나,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다 실신하는 피해자 가족, 더 이상은 지킬 수 없는 망자의 ‘올해 목표’ 같은 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안타까움으로 새카맣게 타들어 간다. 그러나 여전히 몇 가지 의문은 남는다. 첫째, 이런 보도가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는가. 둘째, 이것이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정보인가. 셋째, 취재대상의 인권과 존엄을 침해하는 식의 보도는 아닌가. 넷째, 사고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망자에 대한 애도는, 망자가 살아생전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서 무게가 달라져야 하는가.

답들은, 불행히도 다 부정적이다. 피해자 가족의 비탄을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보여주는 방식의 보도는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더할 수는 있어도, 사태 해결에 본질적인 도움이 되진 않는다.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침해되는 취재대상의 인권 침해는 또 어떤가. 한국방송은 방송강령에 “개인의 초상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거나 취재과정에서 완벽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이나 영상은 가급적 방송하지 않는다”고 명시했고, 문화방송 또한 “사고현장에서의 취재와 인터뷰는 신중해야 하며, 피해자들의 감정과 인권을 존중하고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을 가중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제이티비시 또한 “공공의 이익과 관계없거나 또는 호기심 등으로 개인의 명예와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적어두는 한편 “유족들이나 비탄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이나 모욕감을 주는 취재행위를 삼간다”고도 적었다. 피해자 가족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방영하고, 망자의 생전 생활상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이 약속들은 모두 속절없이 무너졌다. 2014년 4월16일, 방송은 사태를 보도한 게 아니라 비극을 팔았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작 사태 해결을 위해 빨리 전달되어야 했을 정보들은 이러한 비극의 전시에 자리를 내줘야 했다. 이를테면 구조작업에 혼선을 빚지 않도록 생존자를 사칭해 가짜 문자들을 생산하는 일을 자제해 달라는 통제의 말이나, 구조에 참여하고 싶은 이들은 최소한 스킨스쿠버 마스터급 이상의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현장의 목소리, 직접 현장을 지휘하거나 구조에 참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정치인들의 유세성 방문은 자제해야 한다는 원칙처럼, 일견 작아 보여도 치명적인 정보들 말이다. 탐스러운 뉴스 대신 응당 전해야 할 정보를 전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그 찬 물속에,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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