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나큰 비극 뒤 예능프로는 어떻게 돌아와야 할까? 9·11 테러 얼마 뒤인 2001년 9월29일 시작한 코미디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새 시즌은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 시장과 소방관들이 오프닝을 맡아 “뉴욕이 다시 일어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 쇼가 방영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엔비시(NBC)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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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비극에 대처하는 예능의 자세
사고 발생 일주일이 넘었지만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사고는 수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차마 믿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들만 드러나고 있다. 신고를 받고도 늦장을 부린 해경의 답답한 초동 대처나, 구조의 최적기였던 소조기의 마지막 날 바지선을 교체하느라 몇시간씩 구조활동을 하지 못하며 보낸 이해하기 어려운 현장 운용, 비극의 한가운데에서 라면을 먹고 기념사진을 찍은 고위 공무원들과 그런 고위 공무원을 비호하며 ‘매분 매초 사과를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한 청와대 대변인까지. 모두의 염원과는 너무나도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는 사태 추이 때문에 적잖은 사람들은 연일 ‘멘붕’을 경험하고 있다. 실낱같이 남아 있던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무너지고, 정치, 행정, 언론 등 거의 모든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가 붕괴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과 부조리의 반복 앞에서 사람들은 매일같이 분노와 우울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이다.
상황이 이러니 어디 가서 웃어 보이는 것조차 어렵다. 어느 순간 웃음 자체가 두려워진 것이다. 동거차도 현장에서 방송을 준비하던 에스비에스(SBS) 기자가 방송 연결을 기다리며 웃는 듯한 장면이 기술적인 실수로 전파를 타자, 온 인터넷은 해당 기자와 방송사에 대한 비난으로 들끓어 올랐다. 방송사는 긴급하게 사죄의 입장을 밝히면서 ‘웃은 것이 아니라 강한 햇살 때문에 얼굴을 찡그린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사람들의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실제로 길거리에서 웃다가 지나가는 행인으로부터 봉변을 당했다는 식의 이야기들도 속속들이 올라오고 있다. <아이즈> 강명석 편집장의 지적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모두가 슬픔에 공감하고 있다는 믿음 대신 사회관계망서비스의 누군가는 이 참사에 전혀 공감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이용만 할 사람일 수도 있다는 불안이 자리 잡았다.” 내가 슬픔에 공감한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웃음을 삼가는 것뿐인, 불신의 지옥이 펼쳐졌다.
9·11 테러 직후 미국 SNL에는구조나선 소방관·경찰관 나와
웃음으로 상처 보듬는 역할해
무기한 결방중인 한국 예능도
예의갖춘 복귀방법 고민해주길 대부분의 방송사들은 기한 없이 예능프로그램의 결방을 결정했다. 2주차 월요일이었던 21일을 기점으로 드라마들은 대부분 정상 방영 스케줄로 돌아왔지만, 더 직접적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예능프로그램들은 아직 복귀의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참혹한 비극의 시기에 웃고 떠드는 예능프로그램의 편성을 자제한 제작진과 편성담당자들의 판단은 옳은 결정이다. 그렇다면 과연 결방으로부터 어떻게 돌아오는 것이 적절한 방법일까. 방영을 재개한 드라마들은 대체로 별다른 코멘트나 수정 없이 곧바로 궤도로 돌아와 정상 방영을 시작했다. 그것이 과연 적절한 처사였는가에 대한 논의는 별개로 두더라도, 예능프로그램조차 그런 식으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가 남는 것이다. 사고와 그 사고를 가능케 한 불편한 진실의 향연에서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능은 바로 돌아와도 괜찮은 걸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음은 잘 활용하면 상처를 치유하고 유대감을 확인하며 권력과 부조리를 꼬집어 비웃을 수 있는 도구가 되지만, 잘못 활용하면 그 웃음에 동참할 수 없는 이를 밀어내는 배제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겐 이 비극이 아주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이번 사고로 확인한 한국 사회의 배금주의와 전시행정, 무사안일주의에 대한 분노는 그러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고치기 위해서라도 오래 지속될 것이다. 이런 거대한 감정의 물결 앞에서 기존 방영분의 방영 스케줄로 바로 돌아오는 것은, 자칫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이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웃음을 마냥 포기하고 결방만 계속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심적으로 지친 이들을 위무하는 웃음 본연의 역할을 생각할 때, 당연하게도 언젠가는 오랜 결방에서 돌아와 사람들을 즐겁게 해줘야 하는 시점이 온다. 쇼 비즈니스는, 예능은 어떤 식으로 이 비극을 맞이할 수 있을까? 여기 힌트가 될 만한 사례들이 있다. 2001년 9월29일은 미국 엔비시(NBC) 방송사의 유서 깊은 생방송 코미디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의 새 시즌이 시작되기로 예정되었던 날이었다. 그러나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첫 방송을 18일 앞둔 9월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가해진 비행기 충돌 테러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사고가 터졌다. 전세계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고, 당사자인 미국인들, 특히나 엔비시 방송사가 위치한 뉴욕의 시민들 또한 마찬가지로 도저히 웃을 수 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제작진은 연기 없이 예정된 새 시즌을 시작했다. 대신 제작진은 9월29일 방송의 오프닝을 호스트나 크루에게 맡기지 않고, 당시 뉴욕시장 루돌프 줄리아니와 인명 구조를 위해 투입되었던 뉴욕의 소방관들과 경찰관들에게 맡겼다. 줄리아니 시장은 카메라와 관객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구조에 투입된 인력들과 용기 있게 대처한 시민들을 기념한 뒤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가슴은 무너졌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하게 뛰고 있습니다. 뉴욕은 단결했습니다. 우리는 테러리즘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공포에 질린 채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 속에서 살아가길 선택했습니다.” 쇼의 책임프로듀서 론 마이클스의 감사 인사를 받은 줄리아니 시장은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는 뉴욕의 오래된 전통이고, 뉴욕이 다시 일어섰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에서라도 오늘 이 쇼가 방영되는 것은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론 마이클스가 “우리, 웃겨도 될까요?”라고 묻자 잠시 뜸을 들인 줄리아니 시장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건 어때요?” 물론 우리와는 조금 이야기가 다를 수 있다.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사고는 우리 사회 내부의 병폐와 모순이 낳은 참사고, 그에 비하면 9·11 테러는 예상하기 어려웠던 외부의 공격이었다. 자학과 반성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사건과, 외부의 공격에도 건재함을 보여줘야 했던 사건을 동일선상에 놓고 보긴 어렵다. 뉴욕의 소방관과 경찰들이 목숨을 잃어가며 현장을 지켰던 것에 비하자면, 적어도 지금까지의 한국 해경과 공무원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줄리아니 시장처럼 팔을 걷고 나서 사태 수습을 책임졌으며, 심지어는 농담까지 능숙하게 잘하는 정치인도 우리에겐 없다. 하지만 분명 쇼가 곧바로 방영 일정에 들어가는 대신, ‘우리는 이 비극을 잊지 않고 있으며,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웃음으로 당신들의 상처를 위로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시작하는 방식은 참고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예는 없을까? 비슷한 시기인 2001년 10월3일에 방영된 정치드라마 <웨스트윙>은, 새 시즌이 시작되는 날 정규 에피소드 대신 급하게 제작해서 만든 외전 격 에피소드인 ‘이삭과 이슈마엘’을 방영했다. 원래 내용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독립 에피소드였던 ‘이삭과 이슈마엘’은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오랜 반목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슬람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평범한 이슬람 신도와 이슬람 근본주의자 사이의 간극은, 평범한 기독교 신도와 백인 우월주의 인종차별집단 케이케이케이(KKK) 사이의 간극과 같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사고의 배후로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탈레반이 지목되면서 전미에 이슬람 신도들에 대한 증오가 들불처럼 번지던 시점에, <웨스트윙>은 무분별한 증오를 멈추자는 제법 용감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오프닝에 출연자들이 등장해 사고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그 가족들과 생존자들을 위로하며, 평소와는 달리 배우들의 크레디트 대신 생존자 및 구조자들을 위한 모금 번호를 안내하는 것은 덤이었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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