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가 9·11에 대해 가장 노골적인 은유를 감행한 작품으로 꼽히는 영화 <스타트렉 다크니스>의 한 장면. 후대의 대중예술가들은 세월호 트라우마를 어떻게 기록할까.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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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9·11 테러 후 미국 국민들이 모두 힘을 모아 그 힘든 과정을 극복해냈듯 한국 국민들도 이 위기를 반드시 극복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난달 25일, 방한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만난 박근혜 대통령은 9·11을 언급했다. 적잖은 이들이 아직 바다에 갇혀 있는데 벌써 ‘극복’ 운운하는 박 대통령의 무신경함에 경악했다. 더구나 관할 소방서장이 구조 총책임을 맡아 비교적 체계적으로 수습이 이뤄진 9·11 테러와, 컨트롤타워의 부재로 당국이 초기 대응을 ‘안’ 하다시피 한 세월호 침몰 사고를 함께 비교하는 게 적절한가?
설마하니 박 대통령이 이런 의미로 9·11 테러를 언급하진 않았겠지만, 사실 두 사건 사이에는 한 가지 강력한 공통점이 있긴 하다. 두 사건 모두 뉴스를 통해 생중계되며 보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것 하나 없이 마냥 지켜만 봐야 하는’ 극도의 무력감과 공포, 좌절감을 안겨주었다는 공통점 말이다. 2001년 9월11일 아침 미국인들은 초현실적인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아메리칸항공 AA11편과 충돌해 검은 연기를 내뱉는 세계무역센터 북쪽 빌딩과, 맑은 가을 하늘을 가르며 남쪽 빌딩을 향해 돌진하는 유나이티드 175편의 모습이 미국의 뉴스채널들을 통해 생중계됐다. 첫 충돌부터 빌딩이 붕괴하기까지 1시간40분, 미국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사람들이 죽어가는 걸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공포와 무력감을 마주해야 했다. 그것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사상 초유의 시청각적 충격이었다.
9·11 테러는 외부의 공격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다르다
배금주의·행정편의주의…
우리가 매일 보면서 외면했던
내부의 모순이 터진 사고다
탓할 외부의 적은 없다
우리 모두가 ‘잠재적 공범’이다
후대는 이 초라한 시대 뭐라 기록할까
그날의 충격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에도 깊게 반영이 되었다. 얼마나 깊었는고 하니, 한동안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들이 영화에 대규모 도심파괴 장면을 삽입하는 걸 망설일 정도였다. 어떤 장면도 9·11의 시청각적 스펙터클을 능가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고, 괜히 그날의 충격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넣었다가 보는 이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해봐야 좋을 게 없기도 했다. <스파이더맨>(2002)은 9·11 이전에 찍은 세계무역센터 장면을 통째로 덜어냈다. <썸 오브 올 피어스>(2002)는 핵폭발 테러 순간의 상세 묘사를 포기했음에도 낙진이 휘날리는 후폭풍 장면 때문에 여전히 보기 불편하다는 불만을 들어야 했다. 물론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들의 그런 조심성이 오래가진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 대규모 도심파괴 장면도 다시 영화에 등장했다. 테러 이후 만들어진 블록버스터 영화들엔 9·11의 그림자와 9·11 이후 폐쇄적으로 변한 미국인들의 세계관이 반영되기 시작했다. 9·11 이후 변해가는 미국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반영된 작품으론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배트맨 3부작이 있다. 타락한 고담을 심판하겠다는 종교적 신념에 찬 악당 라스 알굴이 전차에 폭탄을 싣고 고담시 중심의 웨인 타워를 향해 돌진하는 <배트맨 비긴즈>(2005)는, 분명 9·11이 남긴 충격과 외부에 대한 공포를 반영했다. <다크 나이트>(2008)에는 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강한 무력(배트맨)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혼돈의 화신 조커와, 정의를 지키려다 상처를 입고는 자기통제를 잃은 채 광기로 치닫는 투페이스가 등장했다. 3부작의 최종장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는 어떤가? 대단한 신념을 지닌 듯 보였던 악당 베인은 알고 보니 탈리아 알굴의 사적 복수를 위해 움직이는 꼭두각시였고, 탈리아 알굴 역시 사적 복수에 집착하는 범죄자였다. 무엇보다, 3부작을 거치며 배트맨은 악당으로부터 고담을 지키기 위해선 고담 시민 전원의 휴대폰 음파를 감청하는 기계를 돌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괴물이 되어간다. 할리우드가 나름의 방식으로 9·11을 이해하고 반영한 작품 중 가장 노골적인 은유를 감행한 작품은 아마 제이제이(JJ) 에이브럼스 감독의 영화 <스타트렉 다크니스>(2013)일 것이다. 영화 후반부, 동족들을 구하고 동족을 착취했던 이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신념을 지닌 악당 칸이 거대 우주 전함을 몰고 스타플리트의 본부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 추락시키는 장면이 스크린을 메운다. 앵글이나 편집은 9·11 테러 당시 시민들이 촬영한 영상이나 뉴스클립을 연상시키는 구도를 빼다박았다. 하지만 스타플리트의 대원들은 칸을 생포하되 죽이지 않는다. <스타트렉 다크니스>는 절대 칸의 동기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 괴물과 같은 칸을 깨워 통제 불능의 위험으로 키워낸 이들이 다름 아닌 스타플리트 내부의 강경파였음을 잊지 않는다. 영화 말미 “악마와 싸우기 위해 우린 종종 스스로 악마가 되곤 하지만, 그것은 옳은 게 아니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지켜가야 한다”는 연설은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내부의 광기를 향한다. 수많은 미국인은 ‘외부에서의 공격’으로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주저앉는 모습을 무력하게 실시간으로 지켜봐야 했고, 그래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외부에서의 공격’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폐쇄적으로 변했다. 참사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도 그것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괴감은 외부에 대한 증오와 공격성으로 덮어졌다. 시간이 지나며 미국인들은 긴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얻게 된 상흔들 앞에서 군사국가로서의 미국을 돌아보기 시작했고, 그 이해와 극복은 다시 영화에 반영되었다. 그렇다면 배가 천천히 가라앉는 걸 무력하게 실시간으로 지켜본 우리는 어떨까? 늘 그렇듯 다시 문제는 ‘우리’다. 9·11 테러는 어쨌거나 외부에서의 공격이었다. 비행기를 빌딩에 갖다 박는 상상 초월의 테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걸 지켜봐야 하는 고통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다르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면서도 ‘더러워서 피한다’며 외면했던 우리 내부의 배금주의와 행정편의주의와 같은 모순들이 겹겹이 겹쳐서 터진 사고였다. 세월호 참사는 과거의 참사들과도 다르다. 삼풍백화점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한국인들은 뉴스를 통해 무너져 내린 이후의 폐허만 목격했다. 성수대교도 마찬가지였고, 화성 씨랜드나 경주 마우나리조트 참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참사에선, 우리는 세월호가 선수 밑바닥 부분이나마 수면 위로 드러내어 놓고 있던 때부터 ‘아직 에어포켓이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지켜보기 시작했고, 그것이 아주 천천히, 완전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을 이틀에 걸쳐 생중계로 지켜봤다. 사상 처음으로, 한국 사회가 죽어가는 이들을 방관하는 광경을 티브이를 통해, 인터넷을 통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보게 된 것이다. 일찍이 이런 대형참사 앞에서 한국인들이 마주할 수 있는 최악의 공포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2006)에서 묘사된 바 있다. 왜곡된 보도를 일삼는 언론과, 통제와 뒷수습에만 몰두하는 무능한 정부, 위기를 기회 삼아 잇속을 챙기려는 장사치들, 아이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족의 울부짖음 앞에 무신경하게 대처하는 일선 공무원들. <괴물>에서 이러한 시스템의 붕괴는 사태를 악화시키는 장애물에 그쳤다. 이제 우리는 ‘시스템이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막아줄 수 없다’는 수준을 넘어선,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 우리를 죽인다’는 공포를 마주하게 되었다. 미국인들은 두려워하고 탓을 할 외부인이라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없는 한국인들은 이제 내부인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길을 걷는 우리 중 누군가도 어쩌면 이런 비극을 만들어낸 괴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잠재적인 살인자일지 모른다는 공포가 시작됐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사소한 규율 위반 정도는 불가피한 일로 여기고, 힘 있는 윗선의 지시 앞에서 “까라면 까야지 어쩌냐”며 고개를 숙인 우리 모두가 잠재적 공범이라는 자괴감과 함께. 후대의 대중예술가들은 이 트라우마를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까. 우리 스스로 우리 내부의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 이 초라한 시대를.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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