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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5.09 19:22 수정 : 2015.10.23 14:33

방송인 김보성.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언젠가 이런 물건이 나올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지난 5월6일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 유튜브에 올라온 식혜음료 광고 바이럴 영상은, 배우 김보성(사진)의 존재를 아는 전세계 네티즌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갔다. 무슨 질문을 던져도 ‘기-승-전-의리’의 순서로 대답할 정도로 ‘의리’라는 가치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김보성에 대한 인터넷상의 농담을 차용하되, 당사자인 김보성을 섭외해 직접 재현하게 한 것이다. “탄산도 카페인도 색소도 없는 식혜를 먹는 게 우리 몸에 대한 의리”라며 포문을 연 김보성은, 이윽고 ‘의리’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모든 단어를 가지고 농담을 걸기 시작한다.

초반에 등장하는 ‘전통의 맛이 담긴 항아으리(항아리)’라거나, ‘신토부으리(신토불이)’ 정도의 언어유희는 양반이다. 카페인이 담긴 ‘아메으리카노(아메리카노)’나 ‘에네으리기음료(에너지음료)’ 대신 식혜를 먹으라 절규하는 김보성은 식혜를 ‘으리집 으리음료(우리집 우리음료)’라 선언한다. 급기야 “이로써 나는 팔도(광고주)와의 의리를 지켰다. 광고주는 갑, 나는 으리니까(을이니까)!”라고 비장하게 외치는 대목쯤 되면 웃다 지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노트북 모니터 앞에서 실성한 사람처럼 한참을 웃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유튜브 댓글난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온통 “보성이 형과의 의리 때문에 오늘 식혜 사먹었다”는 네티즌들의 간증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 파괴적인 동영상에 혼을 빼앗긴 게 나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십수년간 “의리” 외쳤던 김보성
‘언어유희’ 음료광고로 SNS 화제

“사랑에서 비롯된 정의로움”이란
의리에 대한 그의 정의는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가 무너진
지금 절절하게 다가와

하루 종일 ‘의리’ 타령을 듣다 보니, 어느 순간 그 단어의 원래 뜻이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게슈탈트 붕괴가 일어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새삼 검색을 해보았다. 국립국어원이 제공한 국어사전은 ‘의리’를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혹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굉장히 포괄적인 의미의 단어지만, 세번째 뜻풀이를 보면 조금 더 의미가 선명해진다. ‘남남끼리 혈족 관계를 맺는 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리’라는 단어의 인상은 사실 이쪽에 가깝다. “남자가 의리가 있지” 같은 관용구를 연상케 하는 이 단어는, 남남끼리 의기 하나에 기대 혈족에 준하는 수준의 연대관계를 맺고 그 연대관계에 기반해 일을 도모하는 전근대성을 내포하고 있다.

어쩌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이런 시대착오적인 ‘의리’라는 가치를 외치는 남자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일까? 물론 가장 간단한 답변은 ‘복고’와 ‘키치’다. 이미 영화 <다찌마와 리>의 주인공 다찌마와 리(임원희)가 인터넷상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바 있고, 최근 들어서도 복고적인 폰트나 패션이 재해석되어 대중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복고’와 ‘키치’가 트렌드가 된 이유까지 말하지 않으면 이 질문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니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려면 일단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

‘의리’와 ‘인정’을 바탕으로 지탱되던 전근대적인 공동체는 경제 발전과 함께 타파의 대상이 되었고, 그 자리에는 합리와 효율의 논리가 대신 자리를 잡았다. 최근 청해진해운 세월호 참사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겉보기엔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듯한 이 체제는 사실 순수한 욕망만을 동력으로 움직이지 않나. 과거를 지탱해주던 전근대적 가치는 타파되었으되, 욕망을 통제하고 의견을 나눌 만한 새로운 근대적 가치는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세계, 그 시절을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조금씩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불신과 불안이 팽배한 순간, 무조건 ‘의리’와 ‘남자다움’을 외치며 직진하는 단순하고 명쾌한 사람이 주는 위안과 안도감이 새삼 필요해진 건 아닐까?

더구나 도저히 의리라는 가치만으로는 돌파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에도 의리를 내세우는 김보성의 행보에는 어떤 경이로움마저 서려 있다. 스타들의 결혼식 하객으로 와서는 덕담이랍시고 “결혼 생활도 의리로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거나, 묻지마 주식투자를 한 끝에 전재산을 날린 것도 모자라 ‘의리로’ 지인들에게 주식 정보를 건네준 탓에 지인들까지 돈을 잃게 만드는 일련의 행보. 심지어는 빚 때문에 청해진해운 세월호 참사 애도 성금을 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오로지 성금을 내기 위해 은행에서 천만원을 대출받으며 “의리의 사나이로서는 부족한 금액이다. 내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이 원망스럽다”고 말하는 아름다우면서도 기괴하기 짝이 없는 광경.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각각 ‘사랑’, ‘우정’, ‘애도’ 등의 단어로 번역해 표현할 만한 모든 감정을 김보성은 오로지 ‘의리’라는 한마디로 표현한다.

어쩌면 김보성이 말하는 ‘의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미의 ‘의리’보다 훨씬 광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2013년 6월, 남성지 <맥심>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정의 내린 ‘의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의리란 사랑에서 비롯된 정의로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 충만한 남자가 진짜 의리의 사나이지.” 인터뷰어가 “요즘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여성스러운 남자들이 꼴보기 싫지 않”으냐 묻자, 김보성은 이렇게 답한다. “전혀. 그런 건 남자답지 않은 게 아니라 각자의 개성이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예쁘장한 외모로 여자를 농락하며 금전적인 이득을 취하는 ‘제비’들은 정말 비겁한 사람들이다. 그건 남자가 아니다.” 김보성에게 옷차림이나 말투, 태도나 취향은 ‘의리’나 ‘남자다움’의 본질이 아니다. 김보성에게 ‘의리’나 ‘남자다움’은 차라리 ‘정의로움’과 ‘지극한 이타심’에 가깝다.

한때 노조 탄압을 일삼던 용역회사 ‘컨택터스’의 대표이사로 이름을 올렸던 일로 구설에 올랐을 때, 그는 “매니저의 지인이 하는 경호업체라기에, 사람을 지키는 건 내가 추구하는 의리와도 일맥상통한다 싶어 잘 모르고 이름을 빌려주었다”고 자초지종을 해명하며 이렇게 덧붙인 바 있다. “정의롭지 않은 의리는 의리가 아니라는 것을 통감한다.” 혹시 김보성은 지금, 자신이 경험하고 체득한 삶의 모든 선량한 가치를 ‘의리’라는 단어 안에 모조리 응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의리’는 국립국어원이 제공한 첫번째 뜻풀이인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한없이 가까워진다.

실제로 김보성은 자신이 여리고 시심이 지극한 사람이란 사실을 기회가 될 때마다 과시한다. 물론 그의 시는 온통 ‘산기슭’, ‘고독’, ‘사나이’, ‘의리’ 따위의 뻔한 단어로 점철된 자기복제의 산물이지만, 적어도 그의 정신세계 안에서 ‘시를 쓰는 마음’과 ‘남자다움’은 서로 대립하는 일 없이 조화롭게 자리를 잡는다. 여기에 자신이 부리 달린 생물은 다 무서워한다며 치킨조차 못 먹는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얘기한다는 점을 더해 생각하면 김보성이 말하는 ‘의리’와 ‘남자다움’은 보다 더 흥미로워진다. 김보성에게 ‘의리’와 ‘남자다움’은 사랑과 정의에 기반한 가치고, 닭 좀 못 먹는다고 그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일견 우스꽝스럽다고 놀리기 딱 좋은 모습이지만, 김보성의 세계 안에서 시심과 조류 공포증, 의리와 남자다움은 상충할 이유가 없다. 각각 취향과 공포, 덕목의 영역에 있는 가치들이 충돌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대중은 이런 모습을 우스꽝스러운 ‘반전매력’으로 소비하지만, 김보성에겐 그게 우스운 것도 반전도 아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마치 비와 태진아가 ‘라 송’(LA SONG)을 함께 부르기로 결정해 노래에 대한 사람들의 비웃음을 경외가 섞인 웃음으로 역전시킨 것처럼. 한때 한물간 비(B)급 액션배우의 대명사처럼 희화화되었던 액션배우 척 노리스가 직접 자신을 소재로 한 농담에 기반한 펩시 광고에 출연했던 것처럼. 김보성은 직접 자신이 그 농담의 주체가 됨으로써 대중의 비웃음을 한 큐에 역전시키고 십수년간 외쳐오던 ‘의리’를 대중의 유행어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보성이 진지하게 외치는 ‘의리’라는 단어를 그만큼 절절하게 받아들이진 않겠지만 상관없다. 장난삼아서라도 ‘의리’를 외치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그가 바라는 ‘의리의 시대’가 도래할 날도 한발쯤은 더 가까워질 테니 말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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