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심은경.
|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흔히들 ‘아역’이라고 하면 극에서 보조적 역할을 하는 어린아이나, 성인 연기자가 맡은 배역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는 배우를 떠올린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영화나 드라마 제작환경상 어린 배우를 극의 중심으로 내세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말이다. 더구나 최근 십여 년 동안 한국의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사극의 대부분은 처음 몇 화 분량 정도를 등장인물들의 어린 시절을 그리는 데 할애해왔다. 이 과정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는 것은 최근 한국 아역 연기자들이 거쳐가는 주요 코스가 되었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어린이의 역. 또는 그 역을 맡은 배우”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아역’이란 단어는, 이렇게 주격이 아닌 종속격의 뉘앙스를 지니게 되었다. 주인공 보조 머물던 아역 벗어나극에서 존재감 드러내는 데 성공
짧은 출연에도 강한 인상 남기더니
‘수상한 그녀’서 독보적으로 성장
한계 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
배우 심은경의 미래가 기대된다
물론 하나의 흐름이 있으면 또 다른 흐름도 있는 법, 최근 몇 년 사이 고정관념의 틈바구니를 벗어나 온전히 극의 주축이 되어 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군의 아역 연기자들도 점점 늘고 있다. 데뷔작이었던 영화 <여행자>(2009)에서부터 주연을 맡아 관객들을 숨죽이게 만들었던 김새론이나, <괴물>(2006)로 영화계 관계자들의 기대를 한껏 받더니 <우아한 거짓말>(2013)로 신진 20대 여배우 그룹의 중심으로 성장한 고아성, 한국방송(KBS) 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2010)으로 주목받더니 문화방송(MBC) <욕망의 불꽃>(2010)에선 1인 2역을 소화해낸 김유정까지. 이 일군의 아역 연기자들은 점차 극의 부속이 아니라 극의 중심으로, 누군가의 아역이 아니라 당당한 주인공으로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그 명단의 제일 앞줄에 심은경이 있다.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든, 혹은 극의 중심을 벗어나 보조적인 역할을 하든 그 존재감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해 결국 대중의 기억 속에 자신의 자취를 남기고야 마는 연기자. 내가 심은경에 대해 쓴다고 말하자 <한겨레>의 담당기자는 제일 먼저 “헥토파스칼 킥 소녀요?”라고 되물었고, 또 누군가는 “서태지에게 ‘그런데 그 아저씨는 누구세요?’라고 묻던 걔?”라고 되물었다. 심은경은 문화방송 <단팥빵>(2004)에서 최강희가 맡은 ‘한가란’이란 배역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고, 이동통신사 광고에서 서태지가 누구인지 못 알아보는 소녀를 연기했다. 그러나 그 순간들을 ‘최강희의 아역’이나 ‘서태지 옆에 앉아 있는 애’로 기억하는 이들은 없다. 어떤 식으로든, 심은경은 기어코 자신이 맡은 장면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존재감을 새기고야 만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크든 작든, 해당 장면이 자신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면 그 장면만큼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책임을 지는 것. 아마 그건 일찌감치 현장의 즐거움을 깨닫고 작품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고민해 본 사람만이 얻은 깨달음일 것이다. 문화방송 <태왕사신기>(2007)에서 등장인물 수지니의 어린 시절을 연기해 주목받았던 심은경은, 언론사와의 인터뷰 말미에서 경력 4년 차의 연기자가 되돌아보고 얻은 깨달음을 내비쳤다. “(연기라는 게) 굉장히 힘든 일이잖아요. 잠도 잘 못 자고, 고생도 많이 하고, 밤도 새우고.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연기할 때에도 연기하는 건 즐거운 거였더라고요.” 물론 심은경도 처음부터 그렇게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종류의 배우는 아니었다. 연기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것이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기 위해서였을 정도로 숫기가 없었고, 처음엔 오디션에서 떨어져도 그러려니 하고 큰 욕심을 부리지 않던 심은경은 생애 첫 작품인 문화방송 <결혼하고 싶은 여자>(2004)의 촬영 현장에서 배우로서의 욕심을 배웠다. 자신 때문에 엔지(NG)가 많이 나는 상황, 촬영감독이 “어디서 저렇게 연기 못 하는 애를 데려왔냐”고 화를 냈을 때, 열한살의 심은경은 어머니에게 “연기는 내가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괜히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고 회고한다. 그것은 아마 연기자로서의 오기였을 것이다. 심은경에게 연기는 점차 “이거 아니면 안 되는” 무언가가 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광신 속에서 신격화되는 소녀 소진을 연기한 영화 <불신지옥>(2009)에서, 심은경이 출연하는 장면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심은경은 등장인물들의 회상을 빌려 등장하는 그 잠깐 동안을 귀기로 가득 채웠다. 무당 경자(문희경)에게 손목이 잡혀 처음으로 작두 위에 손을 얹은 장면, 손만 클로즈업되는 인서트 컷에서도 심은경은 경련의 세기를 미세하게 조절하며 접신의 단계를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심은경은 “손만 잡혀도 그게 어색하면 뭔가 전체가 아닌 것 같고, 이 손 하나도 캐릭터처럼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나 보다”라고 당시를 회고했고, 덕분에 소진은 인간의 이해로는 가 닿을 수 없는 접신의 상태 한가운데에 있는 인물로 완성됐다. 제삿상에 올라온 생고기를 씹으며 무심한 말투로 “너희 이제 다 죽겠네”라고 저주의 예언을 던지는 소진은, 큰 깜짝효과 없이 시종일관 음습한 기운으로 관객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영화의 중심이었다. 처음으로 매니저 역할을 하던 어머니의 품을 떠나 혼자 책임을 지기 시작한 작품 <써니>(2011)에서, 심은경은 주인공 ‘임나미’의 유년을 중년의 유호정과 동등하게 나눠 가지고 가며 주연의 자리를 짊어지는 데 성공한다. 나이 만 열일곱에 그만한 성취를 거뒀으면 조금은 만족해도 좋지 않았을까 싶지만, 심은경은 끊임없이 자신의 연기를 곱씹어보며 ‘진짜’에 대해 고민했다. 유학 도중 잠시 들어와 찍고 간 <광해>(2012)에서 그의 분량은 크지 않았고 관객과 평단의 평도 좋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이 맡은 배역 사월이의 감정을 다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는 아쉬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극장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 고민의 당연한 결과였을까. 내용 전개가 <빅>을 수상하게 닮은 영화 <수상한 그녀>(2014)에서 굳이 오리지널리티를 하나 찾자면, 20대의 몸에 깃든 70대를 연기한 심은경일 것이다. 영화 전체에서 심은경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거대했던지, 영화평론가 듀나는 이 영화의 존재 이유를 ‘심은경’이라는 세 글자만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고 이야기할 지경이었다. 영화의 부실한 만듦새를 지적하는 사람들조차 원톱 주연을 맡아 소화해낸 심은경의 연기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않았다. 심은경은 갑자기 젊어진 육체를 누리며 록 밴드 길거리 공연을 뛰어다니다가도, 티격태격하던 동네 할멈의 죽음 앞에 스산한 눈빛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고민하고, 모든 것을 달관한 투로 김정호의 ‘하얀 나비’를 부르는 오두리라는 캐릭터를 독보적으로 빚어냈다. 동네 노인 쉼터에서 틀어주는 음악에 맞춰 노인들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이거나, 닭백숙을 손으로 발라내어 밴드 동료(이자 사실은 자신의 손자) 입으로 살코기를 넣어주는 장면들에서 심은경은 단순히 노인들의 행동 양식을 흉내 내는 수준을 넘어, 자신의 방식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행동을 자신의 것으로 재구성한다. 그는 “나문희와 같은 배역을 공유하면서 나문희의 연기를 참고했느냐”는 질문에 “나문희 선생님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 건 연륜이다. 자식 하나 보고 모든 걸 희생했던 어머니의 마음이 무엇일까? 그 마음을 깨닫는 게 가장 중요했다”고 답했다. 뽀글 파마와 체중 증량으로 나문희와 외양을 맞추고 그의 말투를 참조하면서도, 캐릭터를 빚어내는 과정만큼은 온전히 제 이해에 기반해 해낸 것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
기사공유하기